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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앞에서

폭포 앞에서 나는 젖은 중력을 잠시 빌려 입는다. 수직으로 쏟아지는 거대한 물줄기가 어깨와 등 위로 내려앉아, 차갑고 무거운 외투처럼 온몸을 감싼다. 물의 압력은 살갗을 두드리고 뼈마디 사이로 스며들며, 흩어지려는 몸을 다시 지면 가까이 붙든다. 발바닥은 미끄러운 바위를 움켜쥐고, 숨은 흰 물안개 속에서 짧게 끊어진다. 사방을 메우는 굉음 속에서 오래 떠돌던 잡념들은 포말처럼 잘게 부서진다.

붙들고 있던 이름들, 끝내지 못한 계산들, 설명되지 않은 마음의 찌꺼기들이 물살을 따라 흘러간다. 남은 것은 생각의 윤곽이 지워진 뒤에야 드러나는 감각이다. 젖은 옷이 살갗에 달라붙고, 차가운 물방울들이 몸의 표면을 새로 그린다. 나는 그 묵직한 몰입 속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축하고 선명한 일인지 가늠한다.

폭포를 등지고 걸어 나올 때, 빌려 입었던 중력은 서서히 증발하기 시작한다. 쏟아지는 물줄기에서 한 걸음 물러나자마자 사방을 압도하던 굉음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낯선 정적이다. 젖은 옷은 여전히 어깨를 짓누르지만, 그것은 내가 지금 이 땅에 굳건히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안도감에 가깝다. 햇살이 등 위로 내려앉아 살갗 위의 물방울을 하나둘 거두어갈 때마다, 방금까지 나를 감싸던 그 거대한 힘이 내 몸 안쪽에 깊은 인장을 남겼음을 깨닫는다.

신발을 옮길 때마다 젖은 발끝에서 물기가 배어 나온다. 마치 내 안의 불필요한 고뇌와 복잡했던 계산들이 정화되어 밖으로 밀려 나가는 기분이다. 고개를 들어 숲을 바라본다. 폭포의 안개에 가려져 있던 초록의 빛깔들이 전보다 선명하게 눈으로 파고들고, 젖은 흙냄새와 나뭇잎의 미세한 바스락거림이 감각의 빈틈을 채운다. 쏟아지는 물속에서 자아의 윤곽을 잠시 잃어버렸던 나는, 이제 다시 나라는 존재의 선을 새로 그려나간다.

세상은 다시 복잡한 이름과 소음들로 채워지겠지만, 내 몸은 폭포 아래서 마주했던 그 하얀 무아(無我)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삶이 가벼워져 어디론가 정처 없이 부유하고 싶어질 때, 나는 이 묵직했던 물의 외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무거운 것이 나를 짓누르는 시련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대지 위에 단단히 세워주는 뿌리라는 사실을. 젖은 발자국이 마른 흙 위에 남았다가 이내 태양 아래 사라진다. 나라는 존재 역시 이 거대한 순환 속에서 잠시 젖었다가 마르는 찰나의 흔적에 불과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게 존재의 무게를 실감한다.

작성일 : 2026년 5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