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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하청 국가" 공포의 정치경제학

— 조선일보 2026년 4월 20일 사설에 대한 반박


1. 문제 규정

조선일보 사설은 IMF의 한국-대만 1인당 GDP 격차 전망(2031년 약 1만 달러)을 발판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기를 진단한다. 그러나 이 사설이 실제로 수행하는 일은 진단이 아니다. 위기의 원인을 재구성하는 작업, 즉 한국 반도체가 뒤처지는 책임을 어느 행위자에게 물을 것인가를 사전 결정하는 작업이다. 표면 주제는 "한국이 왜 뒤처지는가"이지만, 귀결점은 "그러므로 노동시간을 풀고, 환경규제를 약화시키고, 기업 지원을 확대하라"이다. 진단과 처방이 논리적으로 연결되는가—이것이 쟁점이다.


2. 입장

사설의 처방을 기각한다. 진단에 부분적 타당성이 있다 하더라도(한국 반도체의 메모리 편중 위험, 용인 클러스터의 행정 지연 등), 그것이 사설이 끌어내는 특정 처방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반론은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한국 반도체의 진짜 취약성은 주 52시간제나 노조 성과급에 있지 않다. 재벌 중심 수직통합 체제가 설계·소프트웨어·장기 R&D 생태계에 투자하지 못한 전략 실패, 그리고 그 실패를 감독하지 못한 국가의 선택에 있다. 사설은 이 책임을 덮기 위해 "대만 하청 국가"라는 공포를 동원하고, 대만 모델의 실제 내용은 왜곡해 인용한다.


3. 분석 — 사설의 수사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 사설은 네 단계의 은폐 구조로 작동한다. 각 단계는 독립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

① 전제 설정 단계. 세계 반도체 질서를 "설계(미국) → 파운드리(대만) → 메모리(한국)"의 수직 위계로 고정한다. 이 전제가 받아들여지는 순간, 메모리는 자동으로 '낮은 자리'가 되고 한국은 '아래쪽 사슬'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 위계는 산업 현실의 묘사가 아니다. 엔비디아 블랙웰과 차세대 루빈(Vera Rubin, 2026년 하반기 출시 예정) GPU는 TSMC의 첨단 공정만이 아니라 HBM4 메모리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HBM 시장에서 한국의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합산 점유율은 80%에 달한다. AI 가속기의 성능 한계를 실제로 결정하는 구간이 HBM 대역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메모리 = 하위"라는 전제 자체가 수사적 선택이다.

② 책임 소재 축소 단계. 한국이 파운드리 경쟁에서 뒤처진 원인은 여러 갈래다. 재벌의 단기 수익 중심 경영, 시스템 반도체 투자 지연, 팹리스 생태계 빈약, 대학·연구소 기반 약화, 국가 산업정책의 선택적 부재. 그러나 사설은 이 다층적 원인에서 딱 두 개만 선택한다. 주 52시간제와 삼성전자 노조의 성과급 요구. 이 선택은 중립적이지 않다. 가장 통제하기 쉬운 변수를 원인의 자리에 세우면, 처방 역시 가장 통제하기 쉬운 방향으로 귀결된다. 재벌의 전략 실패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순간 필요한 처방은 지배구조 개혁이지만, 노동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순간 필요한 처방은 노동시간 완화다. 원인의 선택이 처방의 결론을 미리 결정한다.

③ 감정 전환 단계. 선택된 원인에 "대만 하청 국가"라는 자극적 표현이 덧씌워진다. 이 표현은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가 아니라 감정을 조직하는 언어다. 독자의 사고는 구조 분석에서 조급함과 수치심의 감정으로 이동한다. 이 전환이 성공하면 독자는 원인 분석의 정합성을 따지지 않고, 위기를 모면하는 속도만 평가한다. 이성의 작업이 감정의 작업으로 대체된다.

④ 처방 정당화 단계. 감정이 활성화된 독자에게 처방이 제시된다. "대만은 25% 세액 공제를 했다. 용수·전력을 몰아줬다. 그런데 한국은 규제와 노조에 막혀 있다." 여기서 암묵적 결론이 유도된다—규제를 풀고, 노조를 억제하고, 기업이 원하는 속도로 움직이게 하라. 이 단계의 설득력은 전적으로 "대만이 한 일"에 대한 청중의 부정확한 인상에 기댄다. 그 부정확성은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4. 검증 — 사설이 인용한 "대만 모델"의 실제 내용

이 사설의 논리가 무너지는 가장 결정적 지점은 인용된 사실 자체가 왜곡되어 있다는 데 있다. 검증하면 사설의 프레임이 스스로 깨진다.

4-1. "신규 투자의 25% 세액 공제"는 사실과 다르다

사설은 대만이 "신규 투자의 25%를 세액 공제하는 파격적인 지원법"을 통과시켰다고 썼다. 그러나 대만의 산업혁신법 제10조의2(이른바 '대만판 칩스법', 2023년 1월 시행)가 정한 실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R&D 비용의 25%를 당해 법인세에서 세액 공제
  • 첨단 공정용 신규 장비 투자액의 5%를 별도 공제
  • 두 공제의 합계는 해당 연도 법인세의 50%를 초과할 수 없음

즉 대만의 제도는 '신규 투자의 25%'가 아니라 'R&D 지출에 실제로 쓴 돈의 25%'를 돌려주는 구조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R&D 기반 세액공제는 기업에 R&D 지출 자체를 사후적으로 강제하는 효과가 있다. 반면 "신규 투자에 대한 25% 보조"는 시설 투자에 대한 묻지마 세제 혜택에 가깝다. 사설은 전자의 이름을 빌리되 후자의 인상을 심는다.

4-2. 대만 세액공제는 환경·노동 규제 준수를 조건으로 한다

더 결정적인 사실은 이것이다. 대만 산업혁신법은 세액공제 신청 자격에 다음 세 가지 조건을 건다.

  1. OECD 최저세율 15% 이상의 실효세율 부담
  2. R&D 집약도(R&D/매출)와 장비 투자가 일정 기준 이상
  3. 최근 3년 이내 환경보호·노동보호·식품의약안전 관련 중대한 법 위반이 없을 것

즉 대만의 반도체 세제 지원은 환경·노동 규제를 회피한 기업을 배제한다. 이것은 단순한 형식 조항이 아니라 제도 설계의 철학이다. 대만이 채택한 것은 "규제를 풀고 지원한다"가 아니라 "규제를 준수하는 기업만 지원한다"이다.

조선일보 사설은 이 구조를 완전히 지운다. 같은 '대만 모델'을 인용하면서 "한국의 규제가 발목을 잡는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사실과 거꾸로 된 독해다. 만약 한국이 대만 모델을 진심으로 따라간다면, 반도체 세제 혜택의 전제조건으로 노동법·환경법 준수가 들어가야 한다. 사설은 이 방향을 원하지 않는다.

4-3. "용수·전력 공급망 구축"의 실제 모습

사설은 대만 정부가 "용수·전력 공급망을 구축"했다고 쓴다. 인프라 지원의 인상이다. 그러나 2021년 대만 가뭄이 드러낸 실체는 다르다.

  • 2021년 대만은 반세기 만의 최악 가뭄을 겪었고, 저수지 수위가 20% 이하로 떨어졌다
  • 정부는 약 74,000헥타르의 농지에 관개를 중단하고(뉴욕시 면적에 해당) 농민에게 휴경 보상금(헥타르당 약 NT$93,000)을 지급했다
  • TSMC 인근 중남부 지역에서는 3년 연속 쌀농사가 금지되었고, 농업용수가 반도체 공장으로 돌려졌다
  • TSMC는 이 시기 트럭으로 물을 수송해 공장을 가동했다

이것이 "대만식 인프라 지원"의 실제 모습이다. '공급망 구축'이 아니라 농업-산업 간 물 배분 정치다. 대만 정부는 반도체를 선택하기 위해 농업 부문을 희생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에는 대가가 있었고, 그 대가는 농촌 저소득층이 졌다.

사설은 이 결정의 실체와 비용 구조를 언급하지 않는다. '지원'이라는 중립적 단어로 포장하고, 그 이면의 희생 배분을 삭제한다. 한국이 같은 모델을 따라간다면, 사설이 지우는 질문—누구의 물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 그 손실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가 정면으로 제기된다. 용인 클러스터 인근의 농업용수, 전력 배분, 하류 지역 환경 비용이 바로 그 영역이다.

4-4. 소결

사설은 대만 모델의 '결과'(파운드리 경쟁력, GDP 상승)는 가져오고 싶어 하면서, 그 모델의 '설계'(조건부 R&D 세액공제, 규제 준수 전제, 부문 간 희생 배분)와 '비용'(농업 희생, 자원 갈등)은 지운다. 이 선택적 인용이 유지되는 한, 사설의 처방—노동·환경 규제 완화—은 대만 모델의 실제 논리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5. 대가 — 사설의 처방이 불러올 비용

사설의 처방을 그대로 수용할 때 발생할 비용은 다음과 같다.

① 노동시간 규제 완화의 비용. 최첨단 반도체 경쟁력은 장시간 노동에서 나오지 않는다. TSMC의 경쟁력은 야근 누적이 아니라 10년 단위 공정 로드맵, 엔비디아·애플·AMD 등 핵심 고객사와의 깊은 기술 통합에서 축적된다. 시간을 더 쥐어짜는 방식은 단기 속도는 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박사급 연구인력의 소진과 이탈을 누적시킨다. 이들은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며, 한번 잃으면 수년간 회복되지 않는다.

② 환경규제 완화의 비용. 용인 클러스터가 5년을 지연한 것은 실제 문제다. 그러나 해법이 "환경영향평가 생략"이라면, 그 비용은 하류 주민의 용수 부족과 생활환경 악화로 전가된다. 이미 검증된 것처럼 대만은 그 비용을 농민에게 물렸다. 한국에서 같은 결정을 내린다면 그 비용을 누가 지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먼저 필요하다. 그 합의 없이 규제만 푸는 것은 비용을 약자에게 떠넘기는 일이다.

③ 재벌 지원 확대의 기회비용. 세액공제, 용수·전력 우선 배분, 규제 유예는 모두 국가 자원의 선택적 배분이다. 이 자원을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집중하면, 그만큼 팹리스 중소기업, 소재·장비 생태계, 대학 기초연구로 갈 자원은 줄어든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이 시스템 반도체·설계 역량을 키우지 못한 구조적 원인이다. 사설의 처방은 문제의 원인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④ 제도적 비용. 대만식 제도를 '선택적으로' 수입할 때 가장 큰 비용은 제도의 일관성 훼손이다. 세제 혜택의 전제조건인 환경·노동 규제 준수를 빼고 세제 혜택만 가져오면, 그것은 대만 모델이 아니라 단순한 재벌 보조금이 된다. 같은 이름 아래 다른 내용을 집어넣는 일은 장기적으로 제도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약화시킨다.


6. 모순 — 사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반박을 단단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설의 주장 중 부분적으로 타당한 지점을 인정해야 한다.

첫째, 한국이 메모리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방향성은 옳다. 메모리 사이클의 변동성과 중국의 빠른 추격을 고려하면, 시스템 반도체·파운드리·첨단 패키징·EDA·설계 IP로의 확장은 필요하다. 삼성 파운드리가 2024년 Q1 11%에서 2025년 Q3 7.3%로 점유율이 계속 하락한 것은 전략적 실패의 증거다.

둘째, 용인 클러스터의 지연은 실제 문제다. 지자체 간 갈등과 환경영향평가를 5년간 조정하지 못한 행정의 무능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셋째, 대만의 전략적 집중이 성과를 낸 것은 사실이다. 반도체를 안보 자산으로 규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선택·집중한 결정은 TSMC의 70% 점유율이라는 구체적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방향이 부분적으로 맞다는 것이 사설 전체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올바른 문제 제기가 잘못된 처방의 포장지로 쓰일 수 있다. 사설은 이 셋을 재료로 삼되, 정작 도달하는 결론은 "노동과 규제가 문제"라는 자리다. 방향이 맞아도 원인 진단이 틀리면 처방은 엉뚱한 곳을 때린다.

이 긴장은 봉합되지 않는다. 한국 반도체가 전략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과, 그 전환의 비용을 누구에게 물릴 것인가는 별개의 질문이다. 전자에 동의한다고 후자까지 기업·국가 편에서 답해야 할 이유는 없다.


7. 책임 — 누가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 입장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것은, 다음의 책임 배분을 명시한다는 뜻이다.

① 재벌(삼성·SK)의 책임. 메모리 호황기 수익을 시스템 반도체·팹리스·설계 IP·소프트웨어 생태계에 재투자하지 못한 전략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구체적으로는 10년 단위 R&D 로드맵의 공시, 사외 팹리스와의 공동 투자 펀드, 핵심 인력에 대한 주식 기반 장기 보상이 요구된다. "더 일하게 해달라"는 요구는 이 책임을 진 뒤에 꺼낼 말이다.

② 국가의 책임. 산업정책을 재벌 보조금이 아니라 생태계 투자로 재정의한다. 대만 칩스법의 핵심 설계—조건부 R&D 세액공제, 환경·노동 규제 준수를 전제—를 정직하게 수입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대학 반도체 학과의 전임교수 정원 확대, 국가연구소의 장비 공유 체계, 중소 팹리스·소재·장비 기업에 대한 장기 조달 계약이 그 내용이다. 조건 없는 세액공제는 재정 이전일 뿐 산업정책이 아니다.

③ 언론의 책임. 위기 담론을 다룰 때마다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비용을 지는지를 명시한다. 대만 모델을 인용할 때는 그 모델의 설계 전체—R&D 조건, 규제 준수 전제, 농업 희생 비용까지—를 함께 인용한다. 결론에 유리한 부분만 잘라 쓰는 것은 분석이 아니라 대변이다. 같은 지면에 "재벌의 전략 실패"와 "국가 산업정책의 공백"이 비슷한 비중으로 등장하지 않는 한, 그 매체는 산업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행위자의 이해를 조직하는 것이다.

④ 노동의 책임. 노조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전자 노조가 요구하는 40조 5000억 원(2026년 예상 반도체 영업이익 270조 원의 15%)은 2024년 R&D 투자(37.7조 원)를 상회하는 규모다. 이익 배분을 요구하는 권리는 정당하지만, 그 요구가 장기 R&D 투자·생태계 재투자와 경쟁하는 자원 배분 순위로 제시될 때는 논증이 필요하다. 단, 이 책임은 재벌과 국가가 먼저 자기 몫의 책임을 진 뒤에 대등하게 논의된다. 책임의 순서가 뒤바뀌면 그것은 공정한 부담 분담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전가다.


결어

"대만 하청 국가"라는 표현은 강렬하지만 가난하다. 그것은 위기의 구조를 드러내지 않고 조급함만 남긴다. 더구나 이 표현을 받치는 대만 모델의 인용 자체가 사실과 어긋난다. 대만은 규제를 풀어 반도체를 키운 나라가 아니다. 대만은 R&D 지출을 조건으로 세제를 돌려주고, 환경·노동 규제 준수를 요구하며, 농업과 산업 간 자원 배분을 명시적으로 정치화한 나라다.

진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메모리 호황기에 벌어들인 수익으로, 한국은 왜 다음 질서를 설계하지 못했는가. 그 시간을 누가 써버렸고,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대만 모델을 진심으로 수입한다면, R&D 조건·규제 준수 전제·부문 간 비용 배분 정치까지 함께 수입할 것인가, 아니면 결과만 원하고 설계는 외면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위기 담론은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위기를 재료로 한 정치적 동원이다. 그리고 그 동원은 사실을 정확히 인용하지 않을 때 가장 효과적이다. 조선일보 사설이 보여준 것이 정확히 그 문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