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생각이 세계에 닿는 각도다
우리는 같은 현실을 보고 있다고 믿는다. 같은 방, 같은 사건, 같은 표정, 같은 숫자, 같은 실패를 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눈앞에 놓인 덩어리 그대로 우리에게 도착하지 않는다. 현실은 이미 어떤 이름을 지나고, 어떤 구분을 지나고, 어떤 문장의 형태를 지나 우리 앞에 나타난다. 누군가를 “실패자”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단지 한 사람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원인의 위치를 정하고 있다. 실패는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세계는 잠시 무죄가 된다.
이 글에서 말하는 언어는 단순한 발화나 어휘 목록이 아니다. 언어는 경험을 구분하고, 원인을 배치하고, 책임의 방향을 정하는 사회적 형식이다. 여기서 사고는 머릿속 문장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각, 기억, 정동, 분류, 판단이 얽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글의 핵심 질문은 “인간은 언어로만 생각하는가”가 아니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이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가 세계에 처음 닿는 방향을 어떻게 기울이는가.
언어는 사고의 감옥이 아니다. 인간은 말로 표현하기 전에 이미 느끼고, 몸으로 기억하며, 이미지와 리듬과 직관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언어는 중립적인 껍데기도 아니다. 언어는 세계 전체를 만들지 않지만, 세계에 닿는 첫 각도를 조정한다. 그 조정은 미묘하되 반복되며, 반복 끝에 자연스러워진다.
강한 언어결정론을 넘어서
후대에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라 불린 언어상대성(linguistic relativity) 논의는 오래된 매력을 지닌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은 직관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색을 나누는 이름, 공간을 말하는 방향, 시간을 표현하는 은유가 다르다면, 세계를 알아차리는 방식도 어느 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느끼기 쉽다.
그러나 이 매력은 곧 과장의 위험을 낳는다. 강한 언어결정론(strong linguistic determinism)은 언어가 사고의 가능 범위를 결정한다고 본다. 이 입장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 언어가 허락하는 방식으로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언어에 없는 개념도 배운다. 번역은 불완전하지만 가능하고, 낯선 범주는 훈련을 통해 습득되며,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낸다. 언어가 사고를 완전히 가둔다면 학습, 개념의 발명, 타문화 이해는 원칙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실제 인간의 사고는 그렇게 닫힌 체계가 아니다.
이 글이 붙잡는 것은 강한 결정론이 아니라 약한 언어상대성(weak linguistic relativity)이다. 약한 언어상대성은 언어가 사고의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정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언어가 주의(attention), 분류(classification), 기억(memory), 은유(metaphor), 판단(judgment)의 습관을 형성한다고 본다. 언어는 우리가 무엇을 더 쉽게 알아차리고, 무엇을 뒤늦게 보며, 어떤 차이를 자연스럽게 중요하다고 여기게 되는지에 영향을 준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결정적이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은 너무 강하다. 반대로 “언어는 단지 표현일 뿐이다”라는 말은 너무 약하다. 언어는 지배자는 아니지만, 중립적인 운반자도 아니다. 그것은 생각이 지나가는 통로이며, 통로의 모양은 지나가는 것의 속도와 방향을 바꾼다.
언어로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 사고
언어의 힘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 이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영역을 “언어 밖의 사고”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성인의 사고는 언어와 비언어가 단절된 두 방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 더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다. 인간의 사고에는 언어로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 층(層)이 있다. 언어는 그 층 위에서 작동하되 그것을 남김없이 번역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말하기 전에 이미 세계와 접촉한다. 어린아이는 단어를 갖기 전에도 낯선 얼굴과 익숙한 얼굴을 구별하고, 위험한 소리와 편안한 소리에 다르게 반응한다. 성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자마자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불편함을 느끼고, 어떤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말로 정리하기 전에 긴장하거나 안정된다.
사고는 항상 문장의 형태로만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사고는 이미지로 온다. 어떤 사고는 리듬으로 온다. 어떤 사고는 손의 기억으로 온다. 피아니스트가 건반 위에서 다음 음을 찾아가는 방식, 운전자가 복잡한 도로에서 몸으로 간격을 재는 방식, 수학자가 아직 증명되지 않은 구조를 직감하는 방식은 모두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성분을 포함한다. 이 사례들은 언어와 무관한 사고를 증명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연주자가 레슨에서 들은 지시어, 운전 교본의 규정, 수학 기호 체계와 완전히 분리된 순수 직관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고들의 핵심은 언어적 정식화가 도달하기 전에 이미 작동한다. 말은 이 사고들을 붙잡고 나누고 전달하는 강력한 형식이지만, 사고의 유일한 형식은 아니다.
그렇다면 언어의 힘은 줄어드는가. 오히려 반대다.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언어의 역할을 더 정확히 보게 한다. 언어는 감각의 최초 발생 조건 전체가 아니다. 그러나 감각이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반복되고, 평가되고, 제도화되는 순간 언어는 중심 통로가 된다. 내가 느낀 불편함은 이름을 얻을 때 비로소 항의가 될 수 있다. 내가 겪은 고통은 문장으로 조직될 때 비로소 사적인 하소연을 넘어 공적인 문제로 이동할 수 있다.
언어로 완전히 정식화되기 전의 사고는 있다. 그러나 함께 생각하는 세계는 대체로 언어를 통과한다. 이 지점에서 언어는 개인 내부의 정신작용을 넘어선다. 그것은 경험을 공통의 장으로 옮기는 형식이며,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하기 어려운 것 사이에 선을 긋는 장치다.
언어는 사고의 경사면을 만든다
앞에서 언어로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 사고의 층이 있다는 점이 성립한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그 위에서 언어가 무엇을 하는가이다. 언어는 세계를 그대로 복사하지 않는다. 언어는 세계를 자르고, 묶고, 배열한다. 빛의 파장은 연속적이지만 언어는 그것을 색 이름으로 나눈다. 공간은 하나의 물리적 장이지만 언어는 그것을 좌표로 조직한다. 시간은 직접 만질 수 없는 추상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앞뒤, 위아래, 흐름과 압박의 은유로 이해한다.
이 마지막 관찰은 레이코프(George Lakoff)와 존슨(Mark Johnson)이 Metaphors We Live By에서 제시한 개념은유(conceptual metaphor) 이론의 중심이다. 그들의 주장은 은유가 장식이 아니라 인지의 기본 배선이라는 것이다. “마감이 다가온다”, “앞길이 멀다”, “시간을 아끼다” 같은 표현은 시적 비유가 아니라, 추상 영역인 시간을 구체 영역인 공간과 경제의 구조로 옮겨 와 이해하는 체계적 장치다. “시간이 돈이다”라는 은유는 시간을 낭비·절약·투자의 대상으로 조직하고, 그 순간 하루의 시간 사용은 자연스럽게 회계의 문법 안에서 평가된다. 은유는 이렇게 무엇이 사고에 먼저 도달하는지, 무엇이 당연하게 들리는지를 배분한다.
경사면의 작동을 보여주는 가장 잘 알려진 사례 하나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호주 북부 케이프 요크 반도의 포름푸라우(Pormpuraaw) 공동체가 쓰는 쿠크 타요레(Kuuk Thaayorre)어에는 ‘왼쪽’과 ‘오른쪽’에 해당하는 상대적 방위어가 사실상 쓰이지 않는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동서남북의 절대 방위어다. 그들은 “당신 남동쪽 다리에 개미가 있다”고 말한다. 보로디츠키(Lera Boroditsky)와 개비(Alice Gaby)가 2010년에 보고한 카드 배열 과제에서, 이 언어 사용자들은 시간 순서로 배열해야 하는 카드를 몸의 좌우가 아니라 해가 움직이는 방향, 즉 동에서 서로 놓는 경향을 보였다. 영어 사용자는 좌에서 우로, 히브리어 사용자는 우에서 좌로 놓았지만, 쿠크 타요레 사용자는 자신이 어느 방향을 보고 있든 동에서 서라는 외부 좌표를 유지했다.
이 결과를 언어가 시간 표상을 결정한다는 증거로 읽으면 과장이 된다. 같은 연구의 저자들 자신이 명시하듯, 이 소견은 공간 언어와 시간 표상 사이의 공변량(covariation)을 보여줄 뿐 인과적 방향을 확정하지 못한다. 절대 방위어의 사용이 시간 표상을 이렇게 배치하는 원인일 수도 있고, 절대 공간 감각을 요구하는 생태·문화적 조건이 양자를 함께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더 넓게 보면, 만다린어와 영어 사이의 수직·수평 시간 은유 차이를 보여준다고 주장된 초기 연구(Boroditsky 2001)는 이후 여러 재현 시도에서 일관된 결과를 내지 못했다(January and Kako 2007). 언어상대성은 이처럼 좁고 엄격한 의미에서만 유지된다. 언어가 사고를 명령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복된 언어 사용이 특정 과제에서 주의와 해석이 먼저 놓이는 자리를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명령이 아니라 경사면이다. 경사면은 몸을 강제로 끌고 가지 않는다. 사람은 멈출 수 있고,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으며,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경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자신이 왜 늘 같은 쪽으로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언어도 그렇다. 언어는 사고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지 않지만, 사고의 첫 움직임을 유도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반복적으로 작동하고, 강제하지 않지만 습관을 만든다.
이 비유는 언어의 힘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과소평가하지 않게 한다. 강한 언어결정론은 경사면을 벽으로 착각한다. 반대로 언어를 단순한 표현 도구로 보는 입장은 경사 자체를 보지 못한다. 실제 문제는 벽과 평지 사이에 있다. 우리는 언어 안에 갇혀 있지는 않지만, 언제나 어떤 언어적 기울기 위에서 생각을 시작한다.
이름은 책임의 위치를 바꾼다
언어가 사고의 경사면을 만든다면, 이제 그 경사가 사회적 장면에서 어떤 효과를 낳는지 물어야 한다. 색채나 공간 표현의 사례가 언어와 인지의 관계를 보여준다면, 사회적 명명은 언어와 책임의 관계를 보여준다. 같은 사람, 같은 사건, 같은 고통도 어떤 이름을 얻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처음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누군가가 “실패자”라고 불린다. 이 말은 그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책임의 방향을 이미 정리한다. 실패자는 실패한 사람이다. 이 표현 안에서는 제도, 교육, 계급, 지역, 질병, 돌봄의 부재, 경쟁의 규칙이 뒤로 물러난다. 남는 것은 개인이다. 그는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거나, 충분히 영리하지 않았거나, 충분히 강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같은 사태를 “탈락을 생산하는 구조의 결과”라고 부르면 장면은 달라진다. 이 표현은 개인을 무죄로 만들기 위한 면죄부가 아니다. 그것은 원인의 위치를 넓히는 장치다. 개인의 선택과 책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이 놓인 조건이 함께 보이기 시작한다. 실패는 더 이상 한 사람의 내면에 봉인된 결함이 아니라, 어떤 규칙이 누구에게 더 가혹하게 작동했는지를 묻는 계기가 된다.
명명은 그래서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이름은 시선을 이동시킨다. 어떤 이름은 고통을 개인의 결함으로 고정하고, 어떤 이름은 그 고통을 세계의 배열 문제로 돌려놓는다. 어떤 이름은 문제를 치료와 교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어떤 이름은 권리와 제도 개편의 문제로 만든다. 어떤 이름은 침묵을 요구하고, 어떤 이름은 증언을 가능하게 한다.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는 여기서 사회철학적 의미를 얻는다. 고프먼(Erving Goffman)이 Frame Analysis에서 프레임을 단순한 인지 필터가 아니라 경험을 조직하는 원리로 규정한 것이 이 지점에서 작동한다. 프레임은 설득의 기법이기 이전에, 상황의 어떤 요소를 유관한 것으로 세우고 어떤 요소를 배경으로 밀어낼지 정하는 장치다. “실패자”라는 프레임은 개인을 전경화하고 구조를 배경화한다. 반대로 구조의 결과라는 프레임은 제도와 규칙을 전경화하고 개인의 결함이라는 해석을 상대화한다. 같은 현실이지만, 책임의 좌표가 달라진다.
언어는 현실을 마술처럼 바꾸지 않는다. 단어 하나를 바꾼다고 집세가 내려가거나, 노동시간이 줄어들거나, 차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어는 무엇이 문제로 등장할 수 있는지를 바꾼다. 문제로 불리지 않는 고통은 오래도록 개인의 성격, 운, 능력, 참을성의 문제로 남는다. 이름을 얻은 고통만이 비교되고, 축적되고, 요구가 된다.
언어를 바꾼다는 것의 위험과 조건
이름이 책임의 위치를 바꾼다면, 언어를 바꾸는 일은 단순한 표현 교정으로 축소될 수 없다. 언어를 바꾼다는 것은 무엇을 문제로 부를 것인지, 누구의 고통을 보이게 할 것인지, 어떤 책임을 개인에게 두고 어떤 책임을 제도에 물을 것인지 다시 정하는 일이다. 표현의 변화는 표면적인 예절 교정에 그칠 수도 있지만, 더 깊게는 현실 분절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반론이 있다. 언어 변화가 언제나 해방적인 것은 아니다. 권력은 낡은 폭력을 새 이름으로 씻어내는 데 능숙하다. 해고는 “인력 효율화”가 되고, 감시는 “안전 관리”가 되며, 착취는 “유연한 기회”가 될 수 있다. 폭력적인 현실은 언어를 통해 고상해지고, 책임져야 할 주체는 추상적인 절차 뒤로 숨는다. 이때 언어 변화는 해방의 도구가 아니라 권력의 세탁술이 된다.
이 반론은 외부에서 오는 위협을 지목한다. 그러나 더 치명적인 반론은 내부에서 온다. 언어 비판이 권력에 의해 도구화되는 문제만이 아니라, 언어 비판 자체가 물질적 투쟁을 대체하는 정치적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는 문제다. 비판자는 명명의 재배열을 요구함으로써 “이미 행동하고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고, 이 감각은 분배, 노동시간, 사회권 같은 물질적 개편의 요구를 늦추거나 우회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 프레이저(Nancy Fraser)가 인정의 정치가 분배의 정치를 “대체(displace)”하는 문제로 지목한 것이 바로 이 위험이다. 이름이 바뀌었지만 집세는 그대로인 상황은 해방의 완성이 아니라 알리바이의 완성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어를 바꾸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단어가 무엇을 보이게 하고, 무엇을 요구하게 하며, 어떤 책임을 이동시키는가이다. 그리고 그 요구가 실제로 물질적 조건을 겨냥하는가, 아니면 명명의 재배열에서 스스로 만족해 멈추는가이다. 언어가 고통을 감추는가, 아니면 고통이 발생한 조건을 드러내는가. 언어 비판이 제도 비판을 예비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대신하는가. 언어 비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언어 변화는 제도 변화와 결합될 때 현실 분절의 재배열이 된다. 제도 변화 없는 언어 변화는 장식이 되기 쉽고, 물질적 조건을 건드리지 않는 명명 변화는 불편한 현실을 더 세련되게 은폐할 수 있다. 반대로 언어 변화 없는 제도 변화도 오래 버티기 어렵다. 새 제도는 자신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공유할 새로운 이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으면 요구도 흩어진다. 이름이 잘못되면 요구는 엉뚱한 곳을 향한다.
언어는 사고의 입구다
언어 변화의 위험까지 인정했다면, 이제 남는 결론은 단순하지 않다. 이 글의 입장은 두 가지 오해를 동시에 피하려 한다. 하나는 언어가 인간 사고를 완전히 결정한다는 오해다. 다른 하나는 언어가 이미 완성된 생각을 나중에 담는 중립적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오해다. 인간은 언어로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 층에서도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 함께 생각하고, 서로의 경험을 알아보고, 문제를 제기하고, 책임을 묻는 순간 언어는 사고의 중심 입구가 된다.
입구는 집 전체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입구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처음 보이는 방, 먼저 마주치는 벽, 쉽게 닿는 통로가 달라진다. 언어도 그렇다. 언어는 세계 전체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에 접근하는 첫 방향을 조정한다. 이 조정은 인지 층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누구의 경험이 이름을 얻고 누구의 경험이 이름 밖에 머무는지, 어떤 사건이 문제로 불리고 어떤 사건이 개인의 사정으로 남는지, 어떤 고통이 증거가 되고 어떤 고통이 사적인 하소연으로 분류되는지가 이 조정을 따라 나뉜다.
그래서 언어를 의심한다는 것은 현실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처럼 보이게 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어떤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들릴 때, 우리는 그 말이 오래 반복되었기 때문에 자연처럼 보이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어떤 이름이 너무 당연하게 붙어 있을 때, 우리는 그 이름이 누구에게 편리한지, 누구의 경험을 지우는지, 어떤 책임을 보이지 않게 하는지 물어야 한다.
언어는 사고의 한계가 아니다. 적어도 그것만은 아니다. 언어는 사고의 입구이며, 사고의 경사면이며, 세계와 접촉하는 각도다. 우리는 언어를 벗어나 순수한 현실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언어의 배열을 바꿈으로써 현실이 다르게 드러나도록 만들 수는 있다. 다르게 본다는 것은 현실 밖으로 도망치는 일이 아니다. 현실이 구성되는 방식을 더 정확히 보는 일이다.
결론: 각도를 바꾼다는 것
처음으로 돌아가면, 한 사람은 “실패자”라고 불렸다. 그 말은 짧고, 빠르고, 편리했다. 그러나 바로 그 편리함 때문에 위험했다. 그 말은 복잡한 현실을 한 사람의 이름 안에 접어 넣었다. 세계는 뒤로 물러났고, 개인만 앞으로 나왔다. 이 짧은 이름 하나가 수행한 일은 판단의 결론이 아니라 판단의 배치였다. 누가 원인의 자리에 서고, 무엇이 조건으로 물러나는지가 단어 하나로 이미 정돈되어 있었다.
이것이 이 글이 붙잡으려 한 지점이다. 언어는 판단의 결론에 동원되는 도구가 아니라 판단의 배치를 선행적으로 마련하는 형식이다. 언어는 우리가 세계에 관해 무엇을 주장하기 전에, 누가 주어이고 무엇이 서술어인지, 어떤 것이 능동이고 어떤 것이 수동인지, 무엇이 원인의 자리에 놓이고 무엇이 결과의 자리에 놓이는지를 이미 정돈해 둔다. 이 배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반복되면서 자연처럼 굳어진다.
그렇다고 언어가 전부는 아니다. 굶주림은 이름을 바꾼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차별은 표현을 다듬는다고 끝나지 않는다. 제도와 물질적 조건을 그대로 둔 언어 변화는 쉽게 위선이 되고, 최악의 경우 물질적 투쟁을 대체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그러나 이름 붙지 않은 굶주림은 정책의 언어로 들어오기 어렵고, 말해지지 못한 차별은 공적인 증거로 축적되기 어렵다. 물질과 언어는 서로를 대체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으로는 문제가 문제로 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언어를 다시 본다는 것은 현실을 부드럽게 포장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에 닿는 각도를 다시 잡는 일이다. 각도를 바꾸는 일은 감춰져 있던 조건을 전경으로 끌어내는 일이며, 자연처럼 굳어진 배치를 다시 인공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우리는 공동의 의미 안에서는 언어 바깥에 설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 있는 경사면의 기울기는 측정할 수 있고, 이름이 수행한 배치는 해체하고 다시 짤 수 있다. 언어를 의심한다는 것은 결국 그 배치를 자연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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