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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지독한 거짓말 그리고 산타클로스

혹은 도덕의 붉은 외투에 대한 계보학적 해부

거짓말을 경멸한다고 공언하는 자를 조심하라. 그가 경멸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신보다 서투른 거짓말쟁이일 뿐이다. 진실의 편에 선다고 자처하는 자만큼 교묘한 위선자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편견의 이름을 진실이라 불러 왔기 때문이다. 거짓말의 역사는 진실의 역사보다 더 오래되었고, 더 솔직하며, 더 인간적이다. 그리고 인류의 가장 성공적인 거짓말은 언제나 도덕의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이 글은 산타클로스에 관한 글이다. 그러나 산타클로스에 관한 글이 아니다. 이 글은 인간이 선의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자행하는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떠한 지배를 구축하는지, 순수성이라는 이름 아래 어떠한 폭력이 온순한 미소를 짓고 있는지를 묻는다. 붉은 옷을 입은 비대한 노인은 하나의 우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화가 제도가 될 때, 놀이가 교리가 될 때, 허구가 자신을 허구로 고백하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비로소 망치를 들어야 한다.

진실은 때때로 잔인하다. 그러나 거짓말은 대개 그 잔인함을 가리기 위하여 친절해진다.

I. 선의의 계보학, 혹은 사랑이라 불리는 지배술

사람들은 아이의 꿈을 지켜 주기 위하여 산타클로스를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이 명제를 자명한 것으로 통과시키는 순간, 우리는 이미 가장 오래된 도덕적 사기에 가담한 것이다. 누가 그 꿈을 만들었는가. 누가 그 욕망의 무대를 먼저 설치하였는가. 누가 아이의 정신 속에 보이지 않는 심판관의 형상을 심어 놓고, 이윽고 그 심판관 앞에서 떨도록 연출하였는가. 그 뒤에 와서 그 무대가 아이에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갈증을 유발한 자가 물을 팔면서 자선가를 자처하는 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아이는 본래 산타클로스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이는 세계를 필요로 하였을 뿐이다. 감각적으로 넘쳐흐르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세계. 그러나 어른은 그 이름 붙여지지 않은 세계를 견디지 못한다. 해석되지 않은 세계란 통제되지 않은 세계이며, 통제되지 않은 세계란 자신의 권위가 아직 관철되지 않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은 세계 위에 하나의 의미론적 격자를 씌운다. 그 격자의 가장 감미로운 이름이 산타클로스이다. 가장 잔인한 이름은 아직 말하지 않겠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아이의 보호가 아니라 성인의 권력이다. 이 문장은 불쾌할 것이다. 그러나 불쾌함은 진단의 증거이지 반증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진술 앞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대개 그 진술이 우리의 자기 이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순진한 존재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해석권의 선점이다. 어른은 사물 자체를 건네는 대신 이미 가공된 의미를 건넨다. 그리고 가공의 흔적을 감춘다. 이 감춤이야말로 핵심이다. 노출된 허구는 예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은폐된 허구는 교리가 된다. 아이는 상상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권위가 자신의 행위를 감시하고 평가하며 보상한다는 구조를 내면화한다. 산타클로스는 상상력의 선물이 아니라 도덕적 감시 체제의 첫 번째 모형이다.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준다.” 이 단 하나의 문장 속에 하나의 완결된 도덕 체계가 압축되어 있다. 여기에서 선이란 무엇인가. 선은 내적 고귀함이 아니다. 선은 교환 가능한 품행이 되고, 보상을 매개로 한 외적 규범으로 환원된다. 선은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니라 보상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도덕은 여기에서 이미 시장의 문법으로 번역되어 있다. 아이는 선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원하며, 따라서 선의 외양을 연기한다. 우리는 이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이것은 조건반사의 도덕화이며, 복종의 감미로운 의례화이다.

양심이란 타인의 시선이 내면에 정착한 것이다. 산타클로스는 그 최초의 정착민이다.

II. 허구의 위계, 혹은 모든 가면이 동등하지는 않다

여기에서 불가피한 반론이 도착한다. 모든 교육은 허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인간은 허구 없이 살 수 있는가. 이 반론은 부분적으로 옳다. 그러나 바로 그 부분적 옳음이 전체적 기만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은 허구를 만들어 내는 동물이다. 이 사실로부터 모든 허구가 동등하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인간이 음식을 먹는 동물이라는 사실로부터 독과 약이 동등하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과 같다. 조잡한 논리는 언제나 보편성의 외투를 입고 등장한다.

허구에는 위계가 있다. 어떤 허구는 힘의 과잉에서 태어난다. 세계가 넘쳐흐르기 때문에 형식을 부여하는 허구, 혼돈을 견딜 수 있는 자가 혼돈에 양식을 부여하는 허구. 이것은 창조적 허구이다. 예술은 이러한 허구의 최고 형식이다. 반대로 어떤 허구는 힘의 결핍에서 태어난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세계를 축소하고 단순화하며, 의미의 안전망을 미리 깔아 놓는 허구. 이것은 반동적 허구이다. 도덕은 흔히 이러한 허구의 제도적 형식이다.

산타클로스는 어디에 속하는가. 답은 명백하다. 그것은 세계를 다의적으로 열어젖히는 허구가 아니라, 세계를 하나의 도덕적 회로 안에 봉쇄하는 허구이다. 아이에게 가르쳐지는 것은 상상의 자유가 아니라 보상의 조건이다. 감시의 편재성이다. 복종의 감미로움이다. 이 허구가 얼마나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든, 그 내적 문법은 지배의 문법이다. 수지 장식과 캐럴의 선율과 따뜻한 코코아의 향기가 그 문법을 가려줄 수는 있다. 그러나 가림은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산타클로스라는 허구의 진정한 독성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데 있지 않다. 진정한 독성은 그것이 스스로를 허구로 제시하기를 거부한다는 데 있다. 자기 자신을 해석으로 제시하는 허구와, 자기 자신을 사실로 위장하는 허구 사이에는 심연이 있다. 전자는 놀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언제나 통치가 된다. 아이에게 “우리 함께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고 말하는 것과, “산타클로스는 정말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교육적 차이가 아니라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 전자에서 아이는 허구의 공동 창조자이다. 후자에서 아이는 허구의 소비자이자 피지배자이다.

가장 위험한 거짓말은 거짓말로 인식되지 않는 거짓말이다. 가장 완벽한 감옥은 수감자가 자유롭다고 믿는 감옥이다.

III. 순수성이라는 이름의 폭력

산타클로스를 옹호하는 자들의 최후의 방어선은 순수성이다.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보존해야 한다. 이 명제 앞에서 대부분의 비판은 머뭇거린다. 순수성이라는 단어가 방출하는 도덕적 광채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망치질이 가장 절실하다. 순수성만큼 폭력적인 관념도 드물다.

순수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동시에 아직 의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직 자기 해석의 힘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직 세계의 다의성 앞에서 자신의 관점을 세우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순수성이란 미완의 가능성이라기보다 지연된 자율성이다. 순수성을 보호한다는 것은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 아니라, 자율성의 발현을 늦추는 것이다. 아이를 보호한다는 어른은 도대체 아이를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는가. 세계의 복잡성으로부터? 해석의 고통으로부터? 자유의 무게로부터? 그가 실제로 보호하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해석 독점권이다. 순수한 아이란 아직 질문하지 않는 아이이며, 아직 질문하지 않는 아이란 아직 복종하고 있는 아이이다.

이 구조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순수성의 보호라는 담론은 보호의 주체와 보호의 대상 사이에 비대칭적 권력 관계를 전제한다. 보호하는 자는 해석의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보호받는 자는 아직 해석의 권한을 행사하지 못한다. 이 비대칭성을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기제가 바로 순수성의 이념이다. 순수성은 피보호자의 무력함을 미덕으로 전환시킨다. 모르는 것이 아름답다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 고결하다고, 질문하지 않는 것이 사랑스럽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약자의 무력함을 약자의 덕으로 재정의하는 오래된 전략이다. 계보학은 이 전략의 이름을 알고 있다. 르상티망이다. 다만 이 경우 르상티망은 약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에게 이식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교활하다.

순수한 정신이란 아직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지 못한 정신이다. 순수성의 찬미는 미성숙의 축복이다.

IV. 진실의 도덕을 의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 자신의 비판도 시험대에 올려야 한다. 산타클로스를 비판한다고 해서 곧장 진실의 사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이 글에서 가장 위험한 대목이다. 왜냐하면 진실의 숭배야말로 또 하나의 형이상학이며, 어쩌면 가장 집요한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선하다.” 이 명제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도대체 왜 그렇게 믿는가. 진실이 항상 인간을 강하게 만들었는가. 진실이 항상 생을 증대시켰는가. 역사는 그 반대의 증거로 가득하다. 진실에 대한 무조건적 의지가 때로는 생의 부정이 되고, 세계를 견딜 수 없는 자의 복수가 되며,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는 반동적 충동이 되었던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금욕주의적 이상의 핵심에는 진실에의 의지가 있다. 그리고 그 의지의 뿌리에는 삶에 대한 원한이 숨어 있다.

예술을 보라. 위대한 예술은 얼마나 많은 왜곡을 통하여 사물의 힘을 가시화하는가. 비극은 얼마나 정교한 허구를 통하여 인간 실존의 심연을 열어 보이는가. 양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택적 왜곡이며, 강조와 생략의 규율이며, 세계를 특정한 원근법 안에서 재구성하는 힘이다. 삶은 생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가공과 선택 없이 지속될 수 없다. 해석 없는 삶은 없다. 가면 없는 정신도 없다. 진실을 맨얼굴이라 믿는 자는, 자신의 가면이 너무 오래되어 피부와 구별되지 않게 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거짓말의 폐기가 아니다. 거짓말을 전면적으로 폐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가장 순진한 거짓말이다. 문제는 허구의 질이다. 어떤 허구가 생을 증대시키는가. 어떤 허구가 힘의 감각을 고양하는가. 어떤 허구가 세계를 더 다양하고 더 풍요로우며 더 위험하게 경험하도록 자극하는가. 그리고 반대로, 어떤 허구가 생을 위축시키는가. 어떤 허구가 인간을 더 순종적이고 더 예측 가능하며 더 계산 가능한 존재로 축소하는가. 이것이 유일하게 정직한 물음이다. 그리고 이 물음 앞에서 산타클로스는 결코 무해하지 않다.

진리를 향한 무조건적 의지를 가진 자여, 그대는 왜 진리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아직 묻지 않았다.

V. 환멸의 문턱, 혹은 자기초극의 첫 번째 기회

아이가 어느 날 묻는다. “산타클로스는 정말 존재하는 거야?” 성인들은 이 순간을 유년기의 종말이라 부르며 아쉬워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종말이 아니다. 이것은 정신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향하여 돌아서는 순간이다. 해석적 동물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해석을 의심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의 진정한 내용은 산타클로스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들이 나를 속였다”는 발견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세계는 내게 가공된 형태로 넘겨져 왔다”는 인식이다.

이 인식은 양가적이다. 어떤 정신은 여기에서 냉소를 배운다. 모든 숭고한 것은 결국 가면이며, 모든 가치는 결국 사기이며, 모든 권위는 결국 허구라는 결론에 안주한다. 이것은 쉬운 길이다. 냉소는 정신의 게으름이다. 세계의 가면을 벗기는 데는 성공하지만, 새로운 가면을 창조할 힘이 없는 정신, 파괴에는 능하지만 창조에는 무능한 정신, 이것이 냉소주의자이다. 그는 환멸의 전반부에만 머무른다.

그러나 더 드문 종류의 정신이 있다. 환멸을 통과하면서 더 높은 감각에 도달하는 정신. 세계가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그 사실 앞에서 절망하는 대신, 해석의 창조자가 되기를 결심하는 정신. 이 정신은 허구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지만, 동시에 모든 허구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는 가면 뒤에 맨얼굴이 있다는 환상을 버린다. 그러나 동시에 가면을 선택하고, 가면을 창조하며, 가면의 책임을 지는 자가 된다. 이것이 자기초극이다. 산타클로스의 환멸은 이 자기초극의 최초의 문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그것이 새로운 안일함으로 봉합되지 않을 때에만 그러하다.

환상을 깨뜨릴 줄 아는 자는 많다. 그러나 환상을 깨뜨린 뒤에도 의미를 창조할 줄 아는 자는 드물다.

VI. 산타클로스 이후, 혹은 우리 시대의 붉은 외투들

그러므로 산타클로스를 단순히 폐기하자는 것은 이 글의 결론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 쉬운 결론이며, 쉬운 결론은 대개 거짓이다. 폐기되어야 할 것은 산타클로스라는 개별적 허구가 아니라, 허구를 진실로 위장하는 방식, 지배를 사랑으로 포장하는 방식, 감시를 선의로 변환하는 방식 그 자체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내딛지 않으면 이 모든 논의는 성인의 자기만족에 불과해진다. 더 가혹한 질문이 남아 있다.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게 된 성인은 과연 성숙한가. 나는 그렇게 낙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의심한다. 성인은 유년기의 허구 하나를 벗어던지고서, 보다 거대하고 보다 추상적이며 보다 강력한 허구들 속으로 진입했을 뿐이라고. 국가라는 허구. 민족이라는 허구. 시장의 합리성이라는 허구. 순수한 양심이라는 허구. 객관적 도덕이라는 허구. 투명한 주체라는 허구. 무죄한 사랑이라는 허구. 붉은 옷만 벗었을 뿐, 그 구조는 동일하다. 보이지 않는 심급이 존재하고, 그 심급은 행위를 감시하며, 순종에는 보상이 따르고, 불순종에는 처벌이 따른다. 산타클로스는 죽지 않았다. 그는 개념이 되어 살아남았고, 제도가 되어 살아남았으며, 상식이 되어 살아남았다.

가장 성숙한 인간은 산타클로스를 넘어선 인간이 아니다. 가장 성숙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산타클로스를 식별할 수 있는 인간이다. 자기 가치의 계보를 추적할 수 있는 인간이다. 자기 확신의 뿌리에 어떤 권력이, 어떤 공포가, 어떤 나태가, 어떤 르상티망이 숨어 있는지를 직시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인간이 가장 드물다. 인간은 자기 바깥의 우상은 즐겨 깨뜨리지만, 자기 안의 우상에게는 끝까지 제물을 바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언젠가 산타클로스를 잃는다. 그러나 성인은 거의 결코 자신의 산타클로스를 잃지 않는다.

그는 진실보다 위안을 더 오래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안을 진리라고 부르는 순간, 타락은 이미 완료된다.

망치는 우상을 부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때로 그것은 우리의 웃음이 얼마나 오래된 복종의 형식이었는지를 시험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일은 이것이다. 망치를 우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겨누는 것. 자기 가치의 토대가 울리는 소리를 듣고서도 서 있을 수 있는 것. 이것이 자기초극의 시작이며, 모든 정직성의 전제이다.

자기 자신의 산타클로스를 의심할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성인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가 얼마나 되는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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