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왜 여전히 번성하는가

우리는 대체로 악이 무지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교육이 보급되고 법이 정교해지고 윤리적 감수성이 높아지면 악은 줄어들 것이라고—적어도 그 방향으로 수렴할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인류 역사상 문해율이 가장 높고, 인권 담론이 가장 정밀하며, 잔혹 행위에 대한 정보 접근성이 가장 높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럼에도 악은 줄어든 기색이 별로 없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어쩌면 악이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전제 자체가 우리가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할 통념일지 모른다.
악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악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흔히 극단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대량 학살, 연쇄살인, 의도적 잔혹 행위—이런 것들이 '악'이라는 단어가 호출하는 표상이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악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악을 괴물의 영역에 가두는 순간, 우리는 자신과 악 사이에 안전거리를 확보하게 되고, 바로 그 안전거리가 악이 번성하는 토양이 된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관찰하며 내놓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이 점을 정확히 겨냥한다. 아이히만은 광기 어린 사디스트가 아니었다. 그는 서류를 정리하고, 일정을 조율하고, 상관의 지시를 성실히 이행한 관료였다. 악은 여기서 드라마틱한 의지가 아니라 사유의 부재로 나타난다. 생각하지 않는 것, 자기 행위의 의미를 묻지 않는 것,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위치만 확인하는 것—이것이 악이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양식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말하는 '악'은 괴물적 의도보다는 구조적 해악에 가깝다. 누군가의 고통을 야기하거나 방치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식하지 않는 상태. 혹은 인식하더라도 그 인식이 행동으로 전환되지 않는 상태. 이렇게 재정의하면, 악이 왜 번성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상당히 다른 풍경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악은 선보다 적응력이 좋다
악이 번성하는 첫 번째 이유는 불쾌하지만 단순하다. 악은 선보다 제약이 적다. 선은 수단을 가린다. 정의로운 목적이라도 부당한 수단을 쓰면 정의가 훼손된다. 그러나 악은 그런 제약에 묶이지 않는다. 거짓말, 기만, 착취, 폭력—악은 도구 상자가 넓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구조적 관찰이다. 규칙을 지키는 쪽은 규칙을 무시하는 쪽보다 선택지가 좁을 수밖에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반 카라마조프가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무신론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도덕적 제약이 비대칭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에 대한 정직한 진술이기도 했다. 선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규범 때문에 느리고, 악은 그 규범의 부재 때문에 빠르다. 이 속도 차이는 단기적으로 거의 항상 악에게 유리하다.
여기에 더해, 악은 적응력이 뛰어나다. 우리가 특정 형태의 악을 식별하고 방어 체계를 세우면, 악은 형태를 바꾼다. 노골적 차별이 법으로 금지되면 구조적 차별로 변모한다. 직접적 폭력이 제재를 받으면 제도적 폭력으로 우회한다. 이것은 악에 의지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도덕적 제약을 받지 않는 행위는 환경 변화에 더 유연하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선의 자기모순이 악을 돕는다
악이 번성하는 두 번째 이유는 다소 역설적이다. 선 자체가 악의 번성을 돕는 경우가 있다.
가장 흔한 경로는 도덕적 자기확신이다. 자신이 선한 편에 서 있다는 확신은 성찰을 면제해준다. "나는 좋은 사람이므로 내 행위도 좋을 것이다"라는 추론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지만, 심리적으로는 대단히 자연스럽다. 이 면제가 누적되면, 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해악에 대한 감수성이 둔해진다. 종교적 박해, 문명화 사명, 이념적 숙청—역사상 가장 조직적인 악 중 상당수는 선의 이름 아래서 수행되었다. 니체가 도덕 자체를 의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가 경계한 것은 악이 아니라, 자신의 선함을 의심하지 않는 태도, 그 태도가 행사하는 은밀한 권력이었다.
또 다른 경로는 선의 소비화이다. 현대 사회에서 '선한 행위'는 점점 더 정체성의 표지가 되어간다.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고, 올바른 해시태그를 공유하고, 적절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런 행위들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지 않지만, 구조적 문제에 대한 실질적 개입을 대체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장자(莊子)는 인위적 덕(德)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선함을 방해한다고 보았는데, 과시되는 선함이 실질적 선함의 자리를 차지하는 현상은 그의 직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몇 가지 반론을 보자
이 논의에 대해 몇 가지 강력한 반론이 가능하다.
첫째, 악이 정말로 번성하고 있는가? 스티븐 핑커 같은 학자는 장기적 통계를 근거로, 폭력은 감소하고 있으며 인류는 도덕적으로 진보해왔다고 주장한다. 전쟁 사망률, 살인율, 노예 인구 비율 등 여러 지표에서 이 주장은 상당한 경험적 뒷받침을 가지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악이 번성한다"는 전제 자체가 과장이거나, 가용성 편향—미디어가 부정적 사건을 과도하게 보도하는 데서 오는 왜곡—의 산물일 수 있다.
이 반론은 부분적으로 타당하다. 특정 형태의 악—특히 직접적, 물리적 폭력—은 확실히 감소했다. 법치의 확대와 국제 규범의 발전이 이 감소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 반론이 놓치는 것이 있다. 가시적 폭력의 감소가 곧 해악 전체의 감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환경 파괴, 알고리즘적 조작, 구조적 불평등 같은 형태의 해악은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측정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악의 총량이 줄었는지 형태만 변했는지를 판단하기는, 솔직히 어렵다.
둘째, 악을 구조적으로 재정의하면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 희석되지 않는가? 만약 악이 시스템의 문제라면, 개인은 면죄부를 받는 셈이 된다. "나쁜 사람은 없고 나쁜 구조만 있다"는 주장은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이 역시 진지하게 받아들일 반론이다. 구조적 설명은 개인적 책임을 대체해서는 안 되며, 보완해야 한다. 아렌트 자신도 아이히만의 '사유 불능'을 그의 면죄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죄책의 핵심으로 제시했다. 구조 안에서도 사유할 수 있고, 거부할 수 있고, 최소한 불편해할 수 있다. 다만 구조를 무시하고 개인의 의지만으로 악을 설명하려 하면, 우리는 악이 반복되는 패턴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개인적 책임과 구조적 조건은 대립항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분석 층위에 속한다.
여기에 대해 몇 가지 답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악이 번성하는 구조를 알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불행의 상당 부분이 잘못된 세계관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이 관찰을 확장하면, 악에 대한 잘못된 세계관—악은 괴물적이며, 선한 사람에게는 관계없는 것이라는 세계관—이 악의 번성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답은 소극적이지만 실질적이다. 악을 외부에서만 찾는 습관을 경계하는 것. 악이 '저쪽'에만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자기 행위에 대한 비판적 점검을 중단한다. 이것은 자기혐오와 다르다. 자기 안에 해악을 야기할 수 있는 구조적 조건이 내장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두 번째 답은 제도적이다. 악의 적응력에 대응하려면, 선 역시 적응해야 한다. 한 번 세운 규범이 영원히 유효하리라는 기대를 버리고, 규범 자체를 지속적으로 수정하고 갱신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것은 상대주의가 아니다. 핵심 원칙—불필요한 고통의 최소화—을 유지하면서, 그 원칙을 실현하는 방식을 환경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다.
가치의 전도를 시도하며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이런 것이다. 우리는 '순수한 선'을 칭찬하고 '냉소'를 비판한다. 그러나 순수한 선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악이 가장 편하게 기생하는 숙주일 수 있다. 반면, 우리가 냉소라고 부르는 것—자기 동기를 의심하고, 선언된 가치와 실행된 현실 사이의 간극을 집요하게 물으며, 자신이 선한 편에 서 있다는 확신을 유보하는 태도—이것은 어쩌면 악에 대한 가장 실질적인 저항일 수 있다.
'도덕적 확신'이라는 칭찬을 '도덕적 둔감'이라는 비판으로, '냉소적 회의'라는 비판을 '윤리적 경계'라는 칭찬으로 바꿔 읽어보면, 악이 왜 번성하는지, 그리고 그것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에 대한 풍경이 조금 달라진다. 물론, 이것이 충분한 답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기존의 답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은, 악의 현재 성적표가 꽤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성일: 2026년 4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