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순한 존재의 조건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과 인간 본성에 관하여
인간을 한 문장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한다. 그러나 그 실패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역설적으로 인간에 가까워진다. 그 흔적 위에 남는 하나의 명제는 이렇다. 인간은 선하거나 악한 존재가 아니라, 선과 악이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 그 자체다.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Il Visconte Dimezzato, 1952)은 이 명제를 문자 그대로 몸으로 구현한다. 메다르도 자작은 전쟁터에서 포탄에 맞아 몸이 정확히 둘로 갈라지고, 각각의 반쪽이 살아남아 동일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겪는다. 악한 반쪽은 잔혹하고, 선한 반쪽은 과도하게 자비롭다. 두 존재는 결국 결투를 벌이고, 봉합 수술 끝에 하나로 합쳐진다. 이 설정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분열을 신체의 언어로 번역한 알레고리다.
소설이 제기하는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선과 악을 분리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리고 그 대답은 명확하다. 양쪽 모두 괴물이 된다.
순수의 폭력: 선과 악이 분리될 때
악한 반쪽은 예상대로 행동한다. 사소한 잘못에도 사형을 선고하고, 마을을 공포로 지배하며, 타인을 소유와 파괴의 대상으로만 인식한다. 그의 악은 맥락을 잃은 권력이며, 감정이 제거된 지배욕이다.
그러나 선한 반쪽의 행동도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그는 목적도 의도도 없이 선행을 베풀고, 자연의 질서를 무시한 채 무분별하게 생명을 구하려 하며, 필요 이상으로 타인의 삶에 개입한다. 선한 반쪽의 문제는 그가 악하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데 있다.
칼비노가 그려내는 이 장면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통찰을 품고 있다. 순수한 선은 타인을 수단으로 삼지 않지만, 동시에 타인을 주체로 보지도 못한다. 선한 반쪽이 병자를 돌보고 약자를 돕는 행위는 진정한 의미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선이라는 이념의 자기실현이며, 타인은 그 과정에서 대상으로 기능할 뿐이다. 선과 악이 공존할 때 인간은 갈등하고 타협하고 실수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비로소 타인의 현실에 접촉한다. 분리된 선은 그 접촉 가능성 자체를 차단한다.
소설 속의 한 장면이 이를 압축한다. 선한 반쪽은 거미에 물린 손을 바라보며 말한다. "이건 반쪽짜리 인간의 선이야. 세상 모든 사람들과 사물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야. 사람이든 사물이든 각각 그들 나름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이지." 이 자기 고백은 소설 전체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반쪽짜리 선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며, 그 불완전함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에 가까워진다.
악의 구조: 심층에서 표층으로
악한 반쪽의 악을 단순히 타고난 본성이나 도덕적 결함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한나 아렌트의 관찰은 이 지점에서 더 정밀한 언어를 제공한다.
아렌트는 1961년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직접 취재하며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수백만 명의 학살을 조직적으로 실행한 나치 관료는 악마가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관료였으며, 명령에 따르는 능력 외에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부른 이 개념은, 악이 특별한 악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태도, 즉 무사유(thoughtlessness)에서 발생한다는 통찰이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그가 악한 마음을 품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문제는 그가 자신의 행위를 타인의 관점에서 한 번도 검토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규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옳다는 얄팍함, 타인의 현실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 그것이 악을 가능하게 했다.
칼비노의 악한 반쪽도 이 구조와 공명한다. 그의 잔혹성은 쾌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쪽이라는 상태에서 오는 결핍, 타자를 전체로 인식할 수 없는 구조적 제한에서 온다. 몸이 반으로 나뉜 존재는 세계도 반으로만 볼 수 있다. 그의 악은 악의(惡意)라기보다 시야의 협착이다. 아렌트가 말하듯, 악은 종종 깊이가 없다. 그것은 표층에서, 생각하지 않는 자리에서 자란다.
그림자를 안는다는 것: 융의 개성화와 통합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은 이 문제를 다른 언어로 접근한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그림자(Shadow)'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림자는 개인이 사회화 과정에서 억압하거나 부정한 내면의 어두운 측면이다. 분노, 욕망, 이기심, 파괴 충동 같은 것들이 그림자를 구성한다.
융에 따르면, 그림자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식하고 통합해야 할 자아의 일부다. 그림자를 부정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강력한 힘으로 삶에 영향을 미친다. 억압된 그림자는 외부 세계에 투사되어 타인을 향한 강렬한 혐오나 공격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반면 그림자를 의식화하고 수용할 때, 인간은 자기(Self)의 전일성을 향해 나아간다. 융은 이 과정을 '개성화(Individuation)'라 불렀다.
메다르도의 두 반쪽은 융의 틀에서 보면 의식(선한 반쪽)과 그림자(악한 반쪽)의 극단적 분리다. 선한 반쪽은 밝은 면만을, 악한 반쪽은 어두운 면만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분리는 두 존재 모두를 불완전하게 만든다. 선은 어둠을 모르기 때문에 현실과 접촉하지 못하고, 악은 밝음을 잃었기 때문에 파괴 외의 방향을 찾지 못한다.
소설의 봉합 수술은 개성화의 알레고리다. 의사가 두 반쪽을 다시 이어붙이는 행위는 의식과 그림자가 마침내 한 인격 안에서 만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재결합된 메다르도는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된다. 그는 극단적인 선이나 악에 치우치지 않고, 더 지혜로워진다. 융이 말한 것처럼, 자기실현은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온전해지는 것이다. 메다르도의 변화는 도덕적 완성이 아니라 인격적 통합의 결과다.
불완전함이 가능성이 될 때
우리는 흔히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려 한다. 이 구분은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는 유용하다. 그러나 존재론적 수준에서 보면, 이 구분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어떤 인간도 완전히 선하지 않으며, 동시에 완전히 악하지도 않다. 오히려 인간은 상황, 관계, 욕망, 두려움이라는 복잡한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존재다. 선과 악은 인간 안에서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조건으로 삼으며 공존한다.
칼비노의 소설에서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선한 반쪽에게 환호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오히려 악한 반쪽이 더 낫다고까지 말하게 된다. 이 아이러니는 순수한 선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를 드러낸다. 악한 반쪽의 잔혹함은 적어도 세계와의 어떤 실질적 접촉을 전제한다. 반면 선한 반쪽의 선함은 관념적이고 일방적이어서, 오히려 타인의 삶을 피로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순수한 선'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추상, 혹은 이상화된 개념에 가깝다. 완전히 이타적이고, 자기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고, 언제나 도덕적으로 일관된 존재를 상상해보자. 그 존재는 감탄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공감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의 실제 삶은 항상 갈등과 모순, 타협과 후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순수한 선은 인간이 도달해야 할 목표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결코 완전히 구현할 수 없는 상태이기도 하다.
반대로 '순수한 악' 또한 비인간적이다. 완전히 공감 능력이 없고, 타인의 고통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용하며, 일관되게 파괴만을 선택하는 존재는 인간이라기보다 하나의 개념적 극단에 가깝다. 실제 인간의 악은 훨씬 더 복잡하다. 그것은 종종 두려움에서 비롯되고, 자기 보존의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며, 때로는 선의와 결합된 채 발현되기도 한다. 인간의 악은 언제나 어떤 맥락 속에 놓여 있으며, 그 맥락을 제거한 '순수한 악'은 현실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다움은 한쪽으로의 완결이 아니라, 불완전한 균형에 있다. 이 균형은 안정된 상태라기보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과정이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구성하지만, 그 선택은 항상 완전하지 않다. 후회는 이 불완전성의 증거이며,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의 표현이기도 하다.
분열과 통합, 그리고 책임의 문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열된 자아'와 '통합된 자아'의 문제다. 인간 내부에는 서로 다른 욕망과 가치가 공존한다. 타인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과 자기 이익을 우선하려는 충동, 정직함과 회피, 용기와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 요소들이 서로를 부정하고 억압할 때, 자아는 분열된다. 분열된 자아는 자신을 하나의 일관된 존재로 경험하지 못하며, 그 결과로 불안과 고통이 발생한다.
칼비노의 소설에서 분열은 문자 그대로 신체적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 분열은 더 조용하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의를 선택하고,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중심적으로 반응하며, 이 간극을 합리화하거나 외면한다. 이 분열을 다루는 방식이 바로 자아의 형태를 결정한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보면, 분열된 자아의 위험은 무사유와 연결된다. 자신의 내면적 분열을 직면하지 않고 외부의 규범이나 명령에 일관되게 복종할 때, 인간은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 능력을 잃는다. 아이히만이 보여준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 존재는 거대한 악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분열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는 것, 그것이 도덕적 주체성의 조건이다.
반면 통합된 자아는 선과 악, 이상과 현실, 욕망과 규범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인정하고, 서로 긴장 관계 속에서 조율한다. 통합은 제거가 아니라 포섭이다. 자신 안의 어두운 면을 부정하지 않되, 그것에 완전히 지배되지도 않는 상태. 이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가 된다.
칼비노가 소설 말미에서 제시하는 재결합된 메다르도의 삶은 이상화된 완성이 아니다. 소설은 이렇게 쓴다. "그는 사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사악하면서도 선한 온전한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덧붙인다. 세상이 아주 복잡해져서 온전한 자작 혼자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온전해진 이후에도 세계는 여전히 복잡하다. 통합이 문제를 해소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은 문제를 직면할 수 있는 인격의 조건을 제공한다.
불순한 존재의 가능성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순하다. 이 불순함이 삶을 가능하게 한다. 앎에만 몰두하는 존재는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 순수하게 도덕만을 추구하는 존재는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다. 선과 악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인간은 갈등하고, 갈등하기 때문에 선택하며, 선택하기 때문에 책임의 주체가 된다.
결국 인간다움은 완벽함이 아니라,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 속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결코 완전히 선해질 수 없고, 동시에 완전히 악해지지도 않는다. 그 사이에서 흔들리며, 때로는 무너지고, 다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인간의 삶이다.
그래서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조정되는 존재다. 선과 악이 서로를 지우지 못한 채 함께 남아 있는 그 불완전한 상태. 바로 그 틈에서 인간은 고통을 경험하고, 동시에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칼비노는 이 진실을 환상의 언어로 썼다. 그러나 환상은 종종 현실보다 더 명확하게 현실을 보여준다. 메다르도의 봉합된 몸은 우리 모두의 몸이다. 우리는 이미 두 개의 반쪽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부정하느냐, 아니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느냐다.
참고 자료
-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 이현경 옮김, 민음사, 2010 (원작: *Il Visconte Dimezzato*, 1952)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원작: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
- C.G. 융, 『인간과 상징』, F.L. 프란츠 외, 열린책들, 2006 (원작: *Man and His Symbols*, 1964)
- 조정자·이종연, 「Jung의 분석심리학에서 그림자 인식의 중요성과 그림자 통합 방법」, 『상담학연구』 10(3), 한국상담학회, 2009
- 한길석, 「사유함과 도덕: '악의 평범성'을 중심으로」, 『사회와 철학』,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