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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되지 않음의 존재론

미완결성, 실존, 그리고 열린 체계로서의 삶

1. 해결이라는 환상

인간은 문제를 만나면 해결을 기대한다. 이 기대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거의 반성되지 않는다. 고장 난 기계는 수리되고, 알 수 없는 질병은 진단되며, 사회적 갈등은 협상되거나 제도화된다. 이러한 경험들이 누적되면 하나의 암묵적 형이상학이 형성된다. 세계는 원칙적으로 파악 가능하며, 모든 문제는 적절한 수단만 있으면 해소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근대적 합리성은 이 믿음 위에 서 있다. 데카르트 이래 근대 철학의 주류는 세계를 사유하는 주체 앞에 놓인 대상으로 설정했고, 베이컨 이래 근대 과학은 자연을 통제 가능한 메커니즘으로 다루었다. 이 틀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것은 원리상의 불가능이 아니라 아직 도달하지 못한 잠정적 한계로 간주된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실제로 중요한 문제들, 이를테면 죽음의 의미, 타자와의 화해 불가능한 간극, 자기 자신에 대한 불투명성, 자유와 책임 사이의 긴장, 되풀이되는 죄책과 후회 같은 것들은 이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다. 이 문제들은 정보가 더 축적되거나 기술이 더 발전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해결하려는 시도 자체가 문제를 변형하거나 증식시키며, 하나의 답은 곧 다른 질문의 출발점이 된다.

이 글은 그러한 미해결성이 인간의 인지적 한계나 의지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우연적 결함이 아니라, 인식과 존재와 실존의 구조 자체에 내장된 조건임을 논증한다. 논의는 세 층위로 전개된다. 인식론적 층위에서는 앎의 체계가 왜 자기 완결에 도달할 수 없는지를, 존재론적 층위에서는 존재 자체가 왜 닫힌 전체로 포착될 수 없는지를, 심리·실존적 층위에서는 문제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시도가 왜 구조적으로 문제를 재생산하는지를 각각 검토한다.

2. 인식의 재귀성, 혹은 해결이 해결을 잠식하는 구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가장 표층적인 이유는 해결이 새로운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기술이 삶의 물리적 제약을 줄이면, 그 기술에 대한 의존과 통제의 문제가 뒤따른다. 제도가 불확실성을 축소하면, 제도 자체의 경직성과 배제의 논리가 부상한다. 이 현상은 어디에서나 관찰되지만, 그 자체로는 아직 철학적 논증이 되지 못한다. 관찰이 논증이 되려면, 이 반복이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불가피하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형식적 체계의 내적 한계를 살펴볼 수 있다. 괴델(Kurt Gödel)의 불완전성 정리는, 산술을 포함할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형식 체계는 자기 자신의 무모순성을 체계 안에서 증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수학 기초론의 기술적 결과이지만, 그 함의는 훨씬 넓다. 어떤 인식 체계가 충분히 풍부해지면, 그 체계 안에서 참이지만 그 체계의 규칙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진술이 반드시 존재한다. 체계를 확장하여 그 진술을 포괄할 수 있지만, 확장된 체계는 다시 자신의 불완전성을 품는다. 해결은 더 넓은 미해결의 지평을 여는 것이지, 미해결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괴델의 정리를 인간의 실존적 문제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범주 혼동의 위험이 있다. 형식 체계의 불완전성이 곧 삶의 미해결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정리가 보여주는 구조적 원리, 즉 충분히 풍부한 체계는 자기 완결에 도달할 수 없다는 원리는, 인식 일반의 조건에 대한 강력한 유비를 제공한다. 인간의 인식 체계 역시 충분히 복잡해지면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괄하는 관점을 확보할 수 없다.

토머스 쿤(Thomas Kuhn)의 패러다임 이론은 이 논점을 과학사의 차원에서 보강한다. 쿤에 따르면 과학은 단선적 축적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진행된다. 정상과학의 축적은 어느 시점에서 변칙 사례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혁명이 일어나면 문제의 정의 자체가 바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 패러다임이 이전 패러다임의 모든 문제를 해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쿤 자신이 지적했듯이, 패러다임 전환은 일부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이전에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을 문제로 만들며, 이전에 풀렸던 것을 다시 미해결로 되돌리기도 한다. 해결은 문제의 소멸이 아니라 문제 공간의 재배치이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이 문제를 언어와 삶의 형식이라는 차원에서 더 근본적으로 제기했다. 『논리철학논고』에서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이는 단순한 금기가 아니라 언어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진단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규칙 체계 안에서 원리상 포착될 수 없는 것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언어 게임'과 '삶의 형식' 개념으로 확장했다. 모든 이해는 특정한 삶의 형식 안에서만 가능하며, 그 형식의 경계는 내부에서 완전히 주제화될 수 없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철학적 해석학은 이 통찰을 이해의 역사성이라는 차원으로 번역한다. 이해란 대상을 중립적으로 관찰하여 소유하는 행위가 아니라, 해석자의 선이해(Vorverständnis)와 텍스트의 지평이 만나 융합하는 사건이다. 이 융합은 완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융합의 결과로 해석자의 지평 자체가 변하며, 변화된 지평은 다시 새로운 이해의 조건이자 한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해는 도착이 아니라 여정이며, 그 여정에는 종착점이 없다.

따라서 인식론적 층위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해결되지 않음은 정보의 부족이나 방법론의 미숙함에서 오는 잠정적 지체가 아니라, 인식 자체가 조건적이고 역사적이며 재귀적이라는 사실의 필연적 표현이다. 인간은 문제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층위를 이동시키며 살아간다.

3. 존재의 열림, 혹은 닫히지 않는 세계

인식론적 분석은 인간이 왜 완전한 앎에 도달할 수 없는지를 보여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해결 불가능성이 단지 인식 주체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이론적으로는 더 완전한 인식 주체를 상정함으로써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뿌리는 인식 주체에만 있지 않다. 존재 자체가 닫힌 전체로 환원될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면, 미해결은 주체의 결함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존재 방식이 된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불안(Angst) 분석은 이 존재론적 차원을 열어준다. 그는 불안을 특정 대상에 대한 공포(Furcht)와 구별한다. 공포는 세계 내부의 특정한 위협에 대한 반응이며, 따라서 그 위협이 제거되면 공포도 사라진다. 반면 불안은 대상이 없다. 불안 속에서 세계 전체가 낯설어지며, 일상에서 자명했던 의미들의 연관이 미끄러진다. 하이데거에게 이 경험은 병리가 아니라 현존재(Dasein)의 존재 구조를 드러내는 근본 기분(Grundstimmung)이다. 불안은 현존재가 본래 근거 없음(Abgrund) 속에서 자기를 기투하는 존재임을 폭로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이 근거 없음이 제거되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라는 점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일상적 현존재는 이 근거 없음을 '세인(das Man)'의 해석에 의탁함으로써 은폐한다. 그러나 은폐는 제거가 아니다. 불안은 반복적으로 귀환하며, 그때마다 현존재는 자기 존재의 완결 불가능성과 대면한다.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인 죽음은,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서, 존재가 결코 완성된 전체로 닫힐 수 없음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이데거의 분석이 자기 존재의 열림에 초점을 맞춘다면,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자의 초과성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미해결의 존재론적 근거를 제시한다. 두 사상가의 차이는 중요하다. 하이데거에게 존재 물음의 중심은 현존재 자신이며, 타자는 공동현존재(Mitdasein)로서 존재 분석의 파생적 계기에 머문다. 반면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나의 존재 이해 바깥에서, 나의 개념 체계를 초과하는 방식으로 현전하며, 바로 그 초과성이 윤리적 관계의 근거가 된다.

레비나스의 핵심 통찰은 타자의 얼굴(visage)이 나의 전체화(totalisation) 시도를 깨뜨린다는 것이다. 나는 타자를 나의 범주 안에 포섭하려 하지만, 타자는 언제나 그 포섭을 초과하는 잔여를 남긴다. 만약 타자를 완전히 이해하고 분류하고 예측할 수 있다면, 타자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라 나의 표상일 뿐이다. 진정한 타자성은 나의 인식 능력에 대한 본질적 저항이며, 이 저항이 윤리의 조건이다. 타자가 환원 불가능하기 때문에 책임이 가능하고, 책임이 가능하기 때문에 윤리가 존재한다.

이 두 존재론적 분석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같은 결론을 향한다. 하이데거로부터 우리는 자기 존재가 근거 없음 속에 열려 있으며 닫힌 전체로 완성될 수 없음을 배운다. 레비나스로부터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환원 불가능한 잔여가 남으며, 이 잔여가 제거되는 순간 윤리가 관리로 전락함을 배운다. 미해결은 자기 존재의 차원에서든 타자와의 관계 차원에서든, 존재가 열린 체계라는 사실의 증거이다.

여기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살(chair) 개념을 경유하면, 존재의 열림은 더 구체적인 양상을 띤다. 메를로-퐁티에게 주체와 세계는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상호 얽힘(entrelacement)의 관계에 있다. 지각하는 몸은 동시에 지각되는 것이며, 보는 자는 동시에 보이는 자이다. 이 가역성(réversibilité)은 결코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는다. 만지는 손과 만져지는 손이 동시에 합치하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으며, 이 영원한 불일치가 지각과 의미의 끊임없는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 세계가 완전히 투명해지는 순간, 지각은 멈추고 의미는 사라진다.

따라서 존재론적 결론은 이렇다. 미해결은 인식 주체의 유한함 때문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자기 완결적 전체로 닫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자기 존재의 근거 없음, 타자의 환원 불가능성, 주체와 세계의 영원한 불일치, 이 모든 것이 삶을 열린 체계로 유지하며, 이 열림이야말로 의미와 윤리와 지각이 가능한 조건이다.

4. 도피의 불가능성, 혹은 해결 욕망이 문제를 재생산하는 역설

인식론적, 존재론적 분석이 미해결의 구조적 불가피성을 보여주었다면, 남은 물음은 왜 인간이 그 미해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이다. 이것은 단순히 "미해결이 필연적이므로 벗어날 수 없다"는 동어반복이 아니다. 더 깊은 역설이 있다. 인간은 미해결에서 벗어나려는 바로 그 시도를 통해 미해결을 재생산한다.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의 절망 분석은 이 역설의 가장 정밀한 해부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일치로 정의한다. 자기(self)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는 관계이며, 절망은 이 관계가 뒤틀리는 사태이다. 결정적인 것은 절망의 구조적 이중성이다.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절망과 자기 자신이고자 하지 않는 절망, 이 두 형식은 표면적으로 반대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자신을 완전히 규정하려는 시도는 자기를 고정된 대상으로 환원하며, 자신을 완전히 벗어나려는 시도는 벗어나려는 자기 자신을 제거할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자기와의 불일치는 심화된다.

이 구조에서 핵심은 절망으로부터의 도피가 절망의 다른 형식이라는 점이다. 절망을 모르는 척하는 것, 절망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바쁜 일상에 자기를 매몰시키는 것, 이 모든 것이 키르케고르에게는 절망의 양태이다. 도피의 불가능성은 의지의 나약함이 아니라, 자기 관계라는 구조 자체에 내장된 특성이다. 자기를 의식하는 존재는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이 관계 안에서의 불일치 역시 제거될 수 없다.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반복강박(Wiederholungszwang) 개념은 이 역설을 무의식의 차원에서 조명한다.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회피한다는 단순한 모델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에 주목한다. 외상을 경험한 환자들은 고통스러운 장면을 꿈에서 반복하며, 분석 과정에서 동일한 갈등의 구조를 전이를 통해 재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억의 고착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것이 의식 바깥에서 끊임없이 장면을 재구성하는 능동적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복이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는 점이다. 반복되는 것은 동일한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구조이며, 그 구조는 매번 다른 대상과 상황 속에서 변주된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은 사라지지 않고, 더 조용하게, 더 우회적으로, 더 익숙한 형태로 귀환한다. 프로이트가 이 현상에서 쾌락 원칙을 넘어서는 충동, 즉 죽음 충동(Todestrieb)의 작용을 읽어낸 것은, 해결되지 않음이 심리적 차원에서도 단순한 미숙이 아니라 정신 구조 자체의 특성임을 시사한다.

이 지점에서 불교의 고(苦, dukkha) 개념과의 비교가 유의미해진다. 다만 이 비교는 주의를 요한다. 키르케고르의 절망은 자기의식적 자기(self)를 전제하며, 프로이트의 반복강박은 무의식적 주체를 상정한다. 반면 불교는 무아(無我, anattā)를 핵심 교리로 삼는다. 고정된 자아가 없다면, 절망하는 주체나 반복하는 무의식은 이미 허구적 구성이다. 이 존재론적 전제의 차이는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전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수렴하는 구조적 통찰이 있다. 불교에서 고의 핵심 기제는 집착(執着, upādāna)이며, 집착의 대상은 영속적이지 않다.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의 관점에서 모든 현상은 조건에 의해 생기하고 조건의 변화와 함께 소멸한다. 고통은 이 무상한 것에 영속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에서, 즉 조건지어진 것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취급하려는 전도에서 비롯된다. 결정적으로, 고를 제거하겠다는 집착 자체가 또 하나의 집착이며, 따라서 또 하나의 고를 낳는다. 이것은 키르케고르의 구조와 형식적으로 동형이다.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절망의 다른 형식이듯, 고에서 벗어나려는 집착이 고의 다른 형식이다.

물론 불교의 해법은 키르케고르의 것과 다르다. 키르케고르가 신 앞에서의 자기 수용이라는 종교적 도약을 제시하는 반면, 불교는 자아 구성 자체의 해체를 통한 해방을 말한다. 그러나 양자가 공유하는 구조적 진단, 즉 문제를 대상적으로 제거하려는 태도 자체가 문제의 일부라는 통찰은 본 에세이의 논제를 강력하게 지지한다.

따라서 심리·실존적 층위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이 미해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의지가 부족하거나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가, 자기 관계의 구조 안에서, 무의식적 반복의 역학 안에서, 집착의 논리 안에서, 미해결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외부의 장애물이 아니라, 주체가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방식 속에 이미 직조되어 있다.

5. 미완결성의 수용, 혹은 열림 속에 머무는 능력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하나의 결론이 수렴한다. 인식론적으로, 앎의 체계는 자기 완결에 도달할 수 없으며 해결은 문제의 소멸이 아니라 문제 공간의 재배치이다. 존재론적으로, 자기 존재의 근거 없음과 타자의 환원 불가능성과 주체-세계의 불일치는 존재를 열린 체계로 유지하며, 이 열림은 의미와 윤리의 조건이다. 심리·실존적으로, 해결 욕망 자체가 문제의 재생산 기제로 작동하며, 도피의 시도는 도피해야 할 것을 공고히 한다. 세 층위는 각기 다른 언어로 같은 구조를 말한다. 미해결은 실패가 아니라 조건이다.

그러나 이 결론이 모든 노력의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들, 제도적 부정의, 기술적 결함, 사회적 불평등은 분명 개선되어야 하고 실제로 개선될 수 있다. 본 에세이의 논제는 이러한 실천적 해결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해결의 도식으로 환원하는 태도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봉합하고 완료하려는 충동이 세계에 대한 유일한 태도가 될 때, 그것은 오히려 세계를 닫는 폭력이 된다. 남아 있어야 할 타자의 여분, 삶의 우발성, 자기 존재의 불투명성을 강제로 제거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해결과 함께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키츠(John Keats)가 1817년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시한 소극적 능력(Negative Capability) 개념이 유용하다. 키츠는 "불확실성, 신비, 의심 속에 머물 수 있는 능력, 사실과 이성을 향해 성급하게 손을 뻗지 않는 능력"을 위대한 성취의 조건으로 보았다. 이것은 무지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대상의 복잡성 앞에서 조급한 환원을 자제하는 인식적 태도이다. 해결되지 않는 것을 해결된 것처럼 꾸미지 않겠다는 절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성급히 이해했다고 선언하지 않겠다는 정직이 여기에 담겨 있다.

카뮈(Albert Camus)의 부조리 개념은 이 태도를 실존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카뮈에게 부조리는 세계 자체에 있지도, 인간 자체에 있지도 않다. 부조리는 의미를 요구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카뮈가 자살과 도약(종교적·철학적 체계를 통한 부조리의 해소)을 모두 거부하고 부조리 속에 머물기를 택한 것은 체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조리를 직시하면서도 행위하겠다는 결단이었다. 시시포스가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는 것은 해결이 가능해서가 아니라, 해결 불가능성에 대한 의식적 수용이 새로운 자유의 형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극적 능력과 부조리의 수용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키츠의 개념은 인식적 태도에 가깝고, 카뮈의 개념은 형이상학적 조건에 대한 응답이다. 이 두 가지를 관통하면서 더 넓은 실존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본 에세이에서 말하는 실존적 성실성이다.

실존적 성실성은 세 가지 계기로 구성된다. 첫째, 인식적 정직이다. 해결되지 않는 것을 해결된 것처럼 위장하지 않으며, 이해의 한계를 은폐하지 않는다. 이것은 키츠의 소극적 능력에 대응한다. 둘째, 존재론적 수용이다. 존재의 열림, 타자의 초과성, 자기의 불투명성을 삶의 결함이 아니라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본래성(Eigentlichkeit), 레비나스의 윤리적 응답 가능성에 대응한다. 셋째, 실천적 지속이다. 미해결을 인정하면서도 행위와 관계를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카뮈의 부조리적 영웅에 대응한다.

이 세 계기가 통합될 때, 미해결 상태의 수용은 체념과 명확히 구별된다. 체념은 가능성을 닫는다. 체념하는 자는 세계가 더 이상 응답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행위를 중단한다. 반면 실존적 성실성은 세계가 닫히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바로 그 열림 때문에 행위와 관계와 이해가 계속될 수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다. 체념이 포기라면, 수용은 더 높은 차원의 정확성이다.

인간다운 삶은 모든 문제를 끝내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 것과 함께 있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삶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끝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에 삶이 아직 열려 있다는 것을 아는 삶이다. 해결되지 않음은 삶의 결함이 아니라, 삶이 아직 닫히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참고문헌

Camus, Albert. Le Mythe de Sisyphe. Paris: Gallimard,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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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ödel, Kurt. "Über formal unentscheidbare Sätze der Principia Mathematica und verwandter Systeme I." Monatshefte für Mathematik und Physik 38 (1931): 173–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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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ats, John. Letter to George and Tom Keats, 21 December 1817. In The Letters of John Keats, edited by Hyder Edward Rollin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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