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가
― 자기 불투명성과 자유의 재정의
자유의 가장 흔한 정의는 부정적이다. 누가 나를 억압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자유롭다고 말한다. 이 정의는 명료하다는 장점이 있다. 장애물이 사라졌는지 아닌지는 비교적 쉽게 확인된다. 그러나 그 명료함이 곧 충분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무도 나를 막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을 때에도, 그 움직임이 나의 것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약물에 의존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해서 약을 먹는다고 말할 수 있다. 관계에서 반복해서 같은 상처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서술은 어딘가 불완전하게 들린다. 외부적으로 자유로워 보이는 이 장면에서 정작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혹은 자유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이것은 실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자유의 정의를 깊게 하려는 모든 시도가 피해갈 수 없는 장벽이다. 정의를 확장하면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지의 문제가 생기고, 확장하지 않으면 위의 장면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 글은 그 장벽을 따라 움직인다. 자유가 "외부의 방해 없음" 이상의 무언가라면, 그 무언가는 결국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이 곧 드러날 것이다. 여기서 길은 두 번 꺾인다. 한 번은 자유의 자리를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야 한다는 자각에서, 또 한 번은 그 내부가 생각보다 훨씬 불투명하다는 자각에서.
1. 자유의 자리: 방해의 부재에서 의지의 구조로
서두의 장면들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고전적 시도는 이사야 벌린의 이분법이다. 벌린은 자유를 두 방향에서 정의했다.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는 타자의 간섭이 없는 상태이며,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상태이다. 벌린은 이 둘을 구분한 뒤, 적극적 자유가 역사적으로 더 위험했다고 경고했다. "진정한 자아"와 "표면적 자아"를 가르고 후자를 전자의 이름으로 통제하려는 시도가 전체주의적 지배로 흘러간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벌린의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나 그 경고를 받아들인 뒤에도, 소극적 자유만으로는 여전히 서두의 장면이 설명되지 않는다. 외부 간섭이 없어도 그 행위를 자신의 자유라고 부르기 주저되는 경우가 남기 때문이다.
이 공백을 보다 정밀하게 파고든 것이 해리 프랭크퍼트의 분석이다. 프랭크퍼트는 1971년의 논문 「의지의 자유와 인격의 개념」에서 행위의 자유(freedom of action)와 의지의 자유(freedom of the will)를 구분한다. 행위의 자유는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상태이고, 의지의 자유는 자신이 원하기를 원하는 것을 원할 수 있는 상태이다. 이 표현은 반복이 많아 어색하지만, 그 구조는 중요하다. 1차 욕구는 어떤 행위를 향한 욕망이고, 2차 의지는 그 1차 욕구가 자신의 실제 행위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를 원하는 욕망이다. 의지의 자유는 1차 욕구와 2차 의지가 정합할 때 성립한다. 프랭크퍼트는 후자가 결여된 존재를 "무절제자(wanton)"라고 부른다. 무절제자는 자신의 욕구 중 어느 것이 자기를 움직이는지 돌보지 않는다. 가장 강한 욕구가 그때그때 그를 움직일 뿐이다.
이 분석은 서두의 장면에 이름을 준다. 금단의 고통 속에서도 약을 원하는 중독자는 외적 억압을 받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1차 욕구(약을 원함)와 2차 의지(약을 원하기를 원하지 않음)는 어긋나 있다. 그는 행위의 자유는 갖지만 의지의 자유는 갖지 못한다. 프랭크퍼트의 언어를 빌리면, 자유는 선택 가능성의 양이 아니라 자기 의지의 구조적 정합성에 달려 있다. 이 구도는 자유의 자리를 외부에서 내부로 옮긴다. 문제는 장애물이 아니라 의지의 층위이다.
2. 반성의 주체는 신뢰할 수 있는가
앞의 분석은 한 가지를 당연히 전제한다. 주체가 자신의 욕구를 반성적으로 들여다보고, 그중 어느 것을 자기 것으로 승인할지 결정할 수 있다는 전제다. 이 전제가 흔들리면 프랭크퍼트의 구도 자체가 흔들린다. 그리고 바로 그 전제가 심리학적 탐구의 오래된 의심 대상이었다.
프로이트의 오래된 정식은 이 지점에서 다시 불려 나온다. 의식적 자아는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때 의식하는 이유들은, 실제 인과와 일치한다는 보장이 없다. 이 의심은 20세기 후반 실험심리학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재확인되었다. 1977년의 고전적 논문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하기(Telling More Than We Can Know)」에서 니스벳과 윌슨은,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 과정에 대해 진술할 때 실제의 인과 과정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암묵적 인과 이론(implicit causal theory)에 따라 사후에 그럴듯한 설명을 구성한다고 결론지었다. 피험자들은 자극이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다른 요인을 이유로 제시했다.
이후 연구는 이 그림을 강화했다. 요한손과 동료들이 2005년 Science에 발표한 '선택 맹시(choice blindness)' 실험은, 피험자가 두 얼굴 중 하나를 선호 사진으로 선택하게 한 뒤 실험자가 몰래 다른 쪽 사진으로 바꿔 건넸을 때 피험자의 상당수가 이 바꿔치기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애초에 선택하지 않은 그 얼굴을 선호한 이유를 유창하게 설명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더 결정적인 결과는 윌슨과 스쿨러의 1991년 연구다. 피험자에게 딸기잼을 평가하게 하거나 대학 강의를 선택하게 하면서, 한 집단에는 "왜 그렇게 느끼는지 이유를 분석하라"는 지시를 주었다. 이유를 분석한 집단의 판단은 전문가 평가와 더 적게 일치했고, 추후 만족도도 더 낮았다. 연구자들의 결론은 단순하다. 이유를 분석하는 행위 자체가 언어화하기 쉬운 부차적 속성에 주의를 쏠리게 만들어, 실제 선호의 핵심 요인을 가려버린다.
이 경험적 결과들이 말하는 바는 엄중하다. 프랭크퍼트가 자유의 조건으로 요청한 반성적 승인의 주체는, 실제로는 자기 반성의 대상에 대해 그다지 좋은 관찰자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이 필요하다. 이 연구들이 증명한 것은 "내성 보고가 항상 틀린다"는 인과적 결론이 아니라 "내성 보고와 실제 과정 사이에 체계적 괴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상관적 관찰이다. 그러나 이 상관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적이다. 반성이 자유의 보증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더 세련된 자기 서사의 생산 장치일 수 있다는 것. 이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 프랭크퍼트적 자유는 다른 문제 앞에 서게 된다.
3. 자기기만의 구조: 선택지의 확장이 자유가 되지 못하는 이유
반성이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사실은 단지 인지적 한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지의 구조 속에 자기기만의 가능성이 새겨져 있다는 더 깊은 문제의 표면이다. 이 층위를 가장 예리하게 드러낸 것이 사르트르의 악의적 신념(mauvaise foi) 개념이다. 사르트르에게 의식은 늘 "그 자신이 아닌 것"의 가능성 앞에 노출된 존재이며, 바로 그 노출을 견디지 못해 자신을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으로 환원하려는 운동을 반복한다. 그가 든 카페 종업원의 예는 유명하다. 종업원이 "종업원 역할을 연기"하면서 그 역할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자유를 회피한다. 사르트르의 핵심 주장은, 이 회피가 예외적 일탈이 아니라 의식의 기본 유혹이라는 것이다. 내성 보고의 구조적 왜곡은 여기서 단순한 인지적 결함이 아니라 의식이 자신의 불확정성을 감추려는 운동의 표현으로 다시 읽힌다.
에리히 프롬의 분석은 이 구조를 사회적 층위로 확장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주장은, 현대인이 자유를 획득한 바로 그 순간부터 자유가 부과하는 불안에서 도망치기 위해 권위적 동일시, 파괴적 충동, 순응적 자동주의의 세 경로 중 하나로 달아난다는 것이었다. 이 도피는 의식적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자유로운 선택의 언어를 유지한 채로, 선택의 무게를 타자에게 떠넘긴다. 프롬의 통찰은 지금도 유효하다. 현대 소비사회는 역사상 가장 많은 선택지를 제공하지만, 그 선택지의 풍요가 자율의 깊이를 보장하지 않는다. 선택지가 많아진 만큼, 그때그때 가장 강한 자극에 반응하는 무절제자의 삶을 살기도 더 쉬워진다. 프랭크퍼트의 언어로 다시 말하면, 선택지의 확장은 1차 욕구의 공급 증가일 뿐, 2차 의지의 형성에는 기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장면이 단지 경제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르트르적 의미에서, 선택지의 풍요는 자기기만의 기회를 확장한다. 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른다고 믿지만, 실은 가장 고르기 쉬운 것을 골랐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자신의 자율적 결정으로 사후적으로 재서술한다. 앞 장에서 본 실험이 기록한 기제가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한다. 두 개의 계열은 여기서 합류한다. 실험심리학이 기록한 내성 보고의 구조적 왜곡과, 현상학이 진단한 의식의 자기기만은 같은 사태의 두 이름이다.
4. 정직성의 역설: 가장 강한 반론
여기까지의 논증은 자연스러운 귀결을 암시한다. 외부 자유도 내부 반성도 자유를 보증하지 못한다면, 남는 길은 자기기만을 직시하는 정직성이다. 자유는 선택의 외형이 아니라 선택의 동기에 대한 정직한 대면에 있다. 이 결론은 듣기에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결론에 가장 치명적인 반론이 제기된다.
반론의 출발점은 앞에서 이미 확인된 경험적 사실이다. 내성 보고가 실제 인과에 접근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유 분석이 판단의 질을 오히려 떨어뜨린다면, "정직한 자기 대면"은 무엇을 대면한다는 말인가. 대면의 대상인 '나의 실제 동기'가 내게 접근 불가능하다면, 내가 "정직하게" 기술하는 그 동기는 결국 또 다른 사후 서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우 자유의 이름으로 요구된 자기 직면은 자기 서사의 정밀화에 그친다. 더 세련된 이유를, 더 설득력 있는 문체로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일이 늘어날 뿐이다. 이것은 자기기만의 극복이 아니라 자기기만의 문학적 성숙일 수 있다.
이 반론은 단순히 철학적이지 않다. 현대 치료 문화의 현실적 풍경이 이 반론을 뒷받침한다. 심리학적 어휘에 유창한 사람들이 자신의 관계 패턴과 유년기 상처와 애착 유형을 정교하게 설명하면서도 같은 패턴에 반복해서 빠지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자기에 대한 말이 늘어난다고 자기에 대한 자유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이 자기를 고정시키는 새로운 역할이 되기도 한다. 사르트르적 의미에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자기 해석 역시 악의적 신념의 한 형식이 될 수 있다. 2차 의지의 형성 자체가 자기기만의 고도화로 귀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더 급진적인 반론도 가능하다. 불교의 일부 전통이나 스토아주의의 계보는, 자유가 자기 반성의 심화가 아니라 자기 서사로부터의 해방에 있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 "정직한 자기 대면"은 잘못된 문제 설정이다. 대면해야 할 자기 자체가 허구이며, 자유는 그 허구에 매달리지 않는 실천이다. 이 노선은 지금까지의 논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반론의 무게는 쉽게 덜어지지 않는다. 만약 "정직한 자기 대면"이 자유의 본체라면, 그것은 인식적 성취를 요구한다. 그러나 인식적 성취는 앞서 본 경험적·존재론적 이유로 불가능하거나 매우 제한적이다. 따라서 "자유 = 자기 대면"이라는 등식은 유지되기 어렵다. 이 등식을 유지하려면 자기 대면의 의미 자체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
5. 비전지적 자유: 닫힘의 거부로서의 정직성
앞선 반론이 관건적으로 짚은 것은 자기 대면을 인식적 성취로 해석할 때의 난점이다. 그렇다면 자기 대면을 다르게, 즉 실천적 태도로 재정의할 수 있는가. 이것이 이 글의 결정적 전환점이다.
실천적 재정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기 대면은 자기 동기의 정확한 해독이 아니라 자기 서사의 비종결성을 견디는 태도다. 나는 내가 왜 그렇게 선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내가 지금 제시하는 이유를 최종적 진실로 선언하지 않을 수는 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결정적이다. 전자는 주체에게 전지적 내성을 요구하지만, 후자는 주체에게 자기 서사에 대한 유보의 훈련만을 요구한다.
이 재정의는 인접 개념들과의 경계를 분명히 할 때 선명해진다. 그것은 데카르트적 투명성이 아니다. 나는 내 내면을 명석 판명하게 관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속적 내성도 아니다. 윌슨과 스쿨러의 실험이 경고했듯 끊임없는 이유 분석은 오히려 판단의 질을 떨어뜨린다. 그것은 치료적 자기 서술의 양적 확대도 아니다. 자기에 대해 더 많이 말한다고 자기로부터 더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이 재정의가 가리키는 것은 오히려 반대 방향이다. 자기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 말이 자기를 닫지 않도록 하는 훈련이다.
찰스 테일러가 『자아의 원천들』에서 제시한 강한 평가(strong evaluation) 개념이 여기서 유용하다. 테일러에게 인간은 자기 욕구를 단순히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욕구에 대해 평가적 태도를 취하는 존재다. 중요한 것은 그 평가가 완결된 자기 이해에 도달한다는 것이 아니다. 평가 자체가 주체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평가가 잠정적이고 수정 가능하다는 사실은 평가를 무력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가의 살아 있음을 보증한다. 프랭크퍼트의 2차 의지가 "정합의 완성"을 지향한다면, 테일러의 강한 평가는 "정합을 향한 움직임"을 지향한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2장에서 확인한 반성의 신뢰성 문제가 전자에는 치명적이지만 후자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움직임은 도착하지 못해도 움직임으로 성립한다.
미셸 푸코의 후기 사유는 이 방향을 다른 용어로 심화한다. 1981–82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는 고대의 '자기 돌봄(epimeleia heautou)' 전통을 재검토하며, 자기에 대한 진실이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형성의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적 자기 인식이 이후 철학사에서 영혼의 투명한 자기 관조로 이해되어 왔지만, 고대의 실제 실천은 자기를 조각해가는 훈련에 가까웠다. 푸코의 핵심은 이렇다. 자유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답이 아니라, "나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에 대한 지속적 작업이다. 이 관점에서 자기 대면은 자기 해독이 아니라 자기 실천의 한 계기다.
이로써 앞선 반론에 대한 응답의 윤곽이 갖추어진다. 자유가 자기 동기의 정확한 인식을 요구한다면, 자유는 인간에게 가능한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나 자유가 자기 서사의 비종결성을 견디는 실천이라면, 그것은 가능하다. 단지 간단하지 않을 뿐이다. 이 자유는 전지적 주체의 자유가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 형성의 작업을 멈추지 않는, 결함 있는 주체의 자유다. 불교적 "자기 서사로부터의 해방"과의 차이도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이 글이 제안하는 자유는 서사 자체를 버리지 않는다. 서사를 유지하되, 그 서사가 스스로를 최종화하는 순간을 계속 지연시킨다.
결론: 불완전한 주체의 자유
논의를 관통해온 이동을 정리하면 이렇다. 자유를 외부 방해의 부재로 정의하는 순간, 자유로워 보이는 자가 자기 욕구에 끌려다니는 장면이 설명되지 않는다. 자유를 1차 욕구에 대한 2차 의지의 정합으로 정의하는 순간, 그 2차 의지를 구성하는 반성적 주체 자체가 자기 동기의 신뢰할 만한 관찰자가 아니라는 경험적 사실이 문제가 된다. 자유를 정직한 자기 대면으로 정의하는 순간, 정직성이 접근해야 할 그 자기가 충분히 접근 가능하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각 단계는 앞 단계의 결함을 교정하려는 시도였으나, 교정은 늘 새로운 결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연속적 실패가 자유를 부정하는 결론에 이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유의 개념이 자리 잡아야 할 위치를 바꾼다. 자유는 인식의 완성에서 실천의 태도로 이동한다. 정직성은 자기에 대한 진실 선언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어떤 진술도 최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유보의 기율이다. 이 기율은 자기 투명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 불투명성을 전제로 하되, 그 불투명성을 핑계로 삼아 자기를 닫아버리지 않는 태도만을 요구한다.
이런 자유는 드라마틱하지 않다. 해방의 선언도 아니고 주체의 승리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결정적 판결을 유보하는, 작은 규모의 지속적 훈련이다. 계몽적 자아의 자기 장악도 아니고, 낭만적 자아의 자기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자신에게조차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디면서, 그래도 그때그때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자기 것으로 떠안는 태도에 가깝다. 이 태도는 자유를 완성된 소유물로 착각하지 않는다. 자유는 어떤 순간에 획득되고 다음 순간에도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어야만 존재하는 종류의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의 출발점에 있었던 질문 — 외부 간섭이 없는 자의 그 움직임은 왜 자유로 충분히 들리지 않는가 — 의 답은 이렇게 정리된다. 자유가 외부 조건이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며, 그 관계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능력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속일 가능성을 잊지 않는 기율이다. 그것은 바람처럼 가벼운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바로 그 불완전한 자리에서 선택의 책임을 거두지 않겠다는, 조용하고 끈질긴 훈련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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