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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불빛 아래에서


나는 한국에서 석 달을 살았다.
석 달은 한 나라를 이해하기에는 짧고, 한 나라를 오해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처음 서울에 도착한 밤, 가장 먼저 나를 맞은 것은 궁궐도 산도 아니었다. 길모퉁이마다 켜져 있던 편의점의 불빛이었다. 그것은 따뜻하다기보다 정확했고, 환하다기보다 깨어 있었다. 새벽 두 시에도 그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나는 그 앞을 지나며, 이 도시가 잠들지 않는 것인지 잠드는 법을 미루고 있는 것인지 생각했다.

아침의 지하철에서 나는 사람들이 서로를 보지 않는 법을 보았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몸들이 조금씩 앞으로 기울었다. 손잡이는 수많은 손의 무게를 받아 흔들렸고, 사람들은 한 손으로 균형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그것을 차가움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뒤에는 그 침묵이 무관심이 아니라,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려는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내 오해일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골목은 갑자기 살아났다. 건물에서 나온 사람들이 밥집 앞에 줄을 섰고, 식당 안에서는 국물 냄새와 젖은 앞치마와 쇠숟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섞였다. 누군가는 급히 먹었고, 누군가는 말없이 국을 떠먹었다. 밥은 그들에게 잠깐의 중지처럼 보였다. 하루가 멈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숟가락을 드는 동안에는 아무도 서두르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느 저녁, 비가 온 뒤의 골목을 걸었다. 간판들은 물웅덩이 속에서 한 번 더 켜져 있었고, 편의점 불빛은 젖은 아스팔트 위에 납작하게 번져 있었다. 한 남자가 문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삼각김밥을 먹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씹었고, 아무 데도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순간 그에게서 가난을 보았다고 생각했다가, 곧 그 생각을 부끄러워했다. 어쩌면 그는 단지 혼자 있고 싶었을 뿐이다. 이방인의 눈은 자주 타인의 삶을 너무 빨리 해석한다.

밤이 되면 술집의 창문마다 웃음소리가 묻어 나왔다. 그 웃음이 늘 기쁨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잔을 들기 전에 오래 숨을 내쉬었고, 어떤 사람은 “괜찮아”라고 말한 뒤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위로인지 체념인지, 혹은 그 둘 사이의 무엇인지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내게는 그저 하루를 무사히 통과한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주말에는 산에 올랐다. 도시의 뒤편에는 산이 있었다. 빌딩 사이에서 보일 때는 배경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가면 오히려 도시가 산 아래 잠시 놓인 물건처럼 보였다. 등산로에서 사람들은 조금 덜 급했다. 숨이 차면 멈추었고,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비켜주었고, 정상에 올라서는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보았다. 사람들은 다시 내려갈 것을 알면서도 올라가고 있었다.

석 달 동안 나는 한국을 여러 번 잘못 읽었다. 빠름을 야망으로, 침묵을 냉정함으로, 예의를 거리감으로, 피로를 성격으로 오해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오해가 모두 풀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것들은 더 알 수 없게 되었다.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것도 있지만, 가까워져서 흐려지는 것도 있었다.

떠나기 전날 밤, 나는 다시 편의점 앞에 섰다. 유리문 안에서는 학생이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었고, 계산대 옆에서는 누군가 택배 상자를 내려놓고 있었다. 냉장고의 낮은 기계음, 비닐봉지의 바스락거림, 전자레인지가 끝났음을 알리는 짧은 소리. 그 모든 것이 사소해서, 오히려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한국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왕궁의 처마도, 산의 능선도, 지하철의 침묵도 보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새벽에도 꺼지지 않던 편의점 불빛이었다. 누군가는 그 아래에서 밥을 먹고, 누군가는 택배를 부치고, 누군가는 잠시 비를 피했다.

나는 그것이 희망인지, 피로인지, 사랑인지, 습관인지 끝내 구분하지 못했다.
다만 문이 열릴 때마다 작은 종소리가 났고, 그때마다 누군가 잠깐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