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은 누구의 이름으로 비정상이 되는가
1. 안정성은 왜 필요한가
조직은 인간의 약함에서 태어난다. 한 사람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고, 매번 정확히 판단할 수 없으며, 자신의 기분과 피로와 이해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다. 그래서 조직은 규칙을 만들고, 절차를 세우며, 기록을 남긴다. 규칙은 처음부터 억압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변덕이 전체를 흔들지 못하게 하는 장치이고, 실수를 개인의 수치가 아니라 공동의 학습 대상으로 바꾸는 기술이다.
이 점을 놓치면 안정성 비판은 쉽게 가벼워진다. 규칙을 부정하는 사람은 대개 자신이 규칙 없이도 공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규칙 없는 조직은 자유로운 조직이라기보다 강자의 기분이 법이 되는 조직에 가깝다. 절차가 없을 때 남는 것은 자율이 아니라 즉흥이고, 즉흥이 반복되면 약한 사람부터 침묵한다. 안정성은 인간을 작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작음을 견디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같은 안정성이 어느 순간 다른 일을 시작한다. 작은 예외를 싫어하고, 불편한 보고를 밀어내며, 위험 신호를 분위기 파괴로 취급한다. 그러고도 스스로를 안정적이라고 부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불러야만 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안정성은 더 이상 상태가 아니라 신분이 된다. 그 조직은 안정적인 조직이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까지 쌓아온 규칙, 위계, 평가, 보상, 권위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신분이 된 안정성은 곧 분류의 권한을 동반한다. 어떤 사건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어떤 발언이 책임감인지 부정성인지, 어떤 균열이 위험 신호인지 단순한 불만인지를 결정할 권한이 시스템에 집중되기 시작한다. 안정성을 지킨다는 말은 자주 이 분류의 권한을 지킨다는 말과 같아진다. 이 글이 끝까지 따라갈 질문은 그래서 안정성이 필요한가가 아니다. 안정성은 필요하다. 더 어려운 질문은 다른 곳에 있다. 왜 안정성을 추구하는 시스템은 자기 안정성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안정성을 지키려 하는가. 그리고 그 파괴는 어떤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부르는가.
2. 정지된 안정성과 살아 있는 안정성
이 글에서 말하는 안정성은 단순히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안정성은 외부 충격과 내부 오류가 발생해도 그것을 감지하고, 말하고, 수정하며, 다시 작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즉 안정성은 정지가 아니라 회복 능력이다. 살아 있는 몸이 균형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미세하게 흔들리듯, 살아 있는 조직도 안정되기 위해 흔들림을 감지해야 한다.
통념적 의미의 안정성은 흔들리지 않음에 가깝다. 숫자가 고르고, 보고서가 정돈되어 있으며, 회의실이 조용하고, 모두가 예정된 문장 안에서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조직이 안정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살아 있는 시스템에서 지나친 고요는 안정의 증거가 아니라 감각의 정지일 수 있다. 통증을 느끼지 않는 몸이 반드시 건강한 몸은 아니다. 오히려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늦은 경고일 수 있다.
그러므로 안정성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흔들림을 제거하려는 안정성이고, 다른 하나는 흔들림을 처리하려는 안정성이다. 전자는 예외를 지우고, 후자는 예외를 기록한다. 전자는 불편한 정보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후자는 그것을 조기 경보로 다룬다. 전자는 질서를 보존하려 하지만, 후자는 질서가 현실과 다시 접속하도록 만든다. 두 안정성을 가르는 진짜 분기점은 흔들림의 양이 아니다. 흔들림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가다. 같은 균열이 한 조직에서는 “초기 신호”라 불리고 다른 조직에서는 “예외”로 불리며 또 다른 조직에서는 아예 “불평”으로 불린다. 그 이름의 차이가 곧 그 조직이 어떤 종류의 안정성을 살고 있는지를 결정한다.
이 글이 비판하는 것은 안정성 그 자체가 아니다. 흔들림을 비정상으로 분류함으로써 자기 감각을 잃어버리는 안정성이다. 그리고 그 분류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행위, 더 정확히는 권한 있는 인간의 행위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스템이 흔들림을 비정상으로 분류한다는 말은 사실은 시스템 안의 누군가가 흔들림을 비정상으로 부른다는 말이다. 안정성의 문제는 이 지점에서 권력의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3. 규칙은 실패의 기억이다
시스템은 예외를 다루기 위해 규칙을 만든다. 어떤 승인 단계는 과거의 손실에서 생겼고, 어떤 보고 양식은 반복된 혼란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어떤 권한 분리는 한 사람의 독단을 막기 위해 도입되었다. 이런 점에서 규칙은 추상적 명령이 아니라 실패의 압축된 기억이다. 조직은 실패를 겪고, 그 실패를 잊지 않기 위해 절차를 만든다.
문제는 규칙이 자기 기원을 잊을 때 시작된다. 규칙은 원래 현실을 더 잘 다루기 위한 도구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현실을 자기 형식에 맞추어 자르기 시작한다. 새 문제가 발생했을 때 조직은 “이 사건은 기존 규칙의 한계를 드러내는가”라고 묻기보다 “누가 절차를 어겼는가”라고 묻는다. 질문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 원인 분석은 책임 추궁으로 축소된다.
책임 추궁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규칙 위반이 실제 손상을 낳았다면 책임은 필요하다. 그러나 책임을 묻는 방식이 원인을 덮을 때, 시스템은 배운 것이 아니라 정리한 것이다. 책상 위는 깨끗해졌지만 균열은 아래로 내려갔다. 문서상으로는 문제가 종결되었지만, 현실에서는 같은 문제가 다른 얼굴로 되돌아올 준비를 한다.
이때 규칙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의 장치가 된다. 실패를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절차가 실패의 의미를 지우는 데 사용된다. 조직은 절차대로 했다는 문장으로 안심하고, 절차를 벗어난 말은 아직 절차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밀어낸다. 그러나 현실의 균열은 언제나 기존 양식보다 먼저 온다. 모든 중요한 위험은 처음 등장할 때 아직 적절한 칸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시스템이 새로운 균열에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가 문제의 실체를 결정한다. 칸이 없는 사건은 그 자체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의 호명을 통해 어딘가로 분류된다. 그리고 가장 흔한 호명은 그것이 사건이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의 태도라는 호명이다.
4. 예외를 지우는 언어
한 직원이 분기 회의에서 말한다. “이 지표는 실제 현장 상황과 맞지 않습니다. 본사 보고서가 보여주는 추세와 우리가 매장에서 받는 신호가 다릅니다.” 회의실은 잠깐 조용해진다. 누구도 그 말을 직접 반박하지 않는다. 의장은 짧게 끄덕인 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그 다음 주, 그 직원의 부서장은 1대1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난 회의 발언은 좋은 지적이었지만,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톤을 조절했으면 좋겠다.” 며칠 뒤 인사 평가의 비공식 코멘트에는 “협업 태도 점검 필요”라는 문구가 추가된다.
이 장면에는 거짓말이 없다. 의장은 그를 모욕하지 않았고, 부서장은 정중했으며, 평가자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한 가지 일이 일어났다. 그가 말한 “지표와 현장의 불일치”는 어느 순간 “톤”의 문제가 되었고, 그다음에는 “협업 태도”의 문제가 되었다. 사건의 성격이 인격의 성격으로 옮겨가는 동안, 정작 그 지표 자체는 더 이상 회의의 의제가 아니다.
명명은 권력이다. 누가 위험 신호를 불평이라고 부르는가. 누가 반복되는 반례를 특수 사례라고 부르는가. 누가 구조적 문제를 개인 역량 부족으로 번역하는가. 시스템은 사실을 처리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실에 이름을 붙이는 장치다. 따라서 안정성의 문제는 기술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권력의 문제다. 어떤 사건이 문제인지 아닌지는 사건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을 어떤 언어로 분류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가 함께 작동한다.
위험한 조직은 실패를 숨기기만 하지 않는다. 실패가 실패로 보이지 않도록 언어를 조정한다. “문제”는 “개선 과제”가 되고, “붕괴 가능성”은 “관리 가능한 리스크”가 되며, “말할 수 없는 분위기”는 “조직 문화의 안정성”이 된다. 이런 언어가 언제나 거짓말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강하다. 반쯤 맞는 말은 스스로를 변명할 수 있다. 개선 과제라는 말은 틀리지 않다. 관리 가능한 리스크라는 말도 완전히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 말들이 공포를 제거하는 대신 감각을 제거할 때, 언어는 진단 도구가 아니라 마취제가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반복적으로 의심한 것은 인간이 진실을 단순히 모르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특정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점이었다. 이 의심은 조직 차원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 조직은 자신이 안정적이라는 이미지를 필요로 한다. 그 이미지는 구성원에게 소속감을 주고, 리더에게 권위를 주며, 외부 이해관계자에게 신뢰를 제공한다. 균열을 인정하는 일은 단순한 수정 작업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손상이다. 따라서 시스템은 균열을 부정하기보다 재명명한다. 그것을 균열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부른다. 회의실에서 말한 직원의 발언이 한 주 만에 “톤”과 “태도”의 문제로 번역되는 과정은, 시스템이 자기 보존을 위해 현실에 새 이름을 붙이는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5. 성공의 기억이 위험 감각을 마비시킬 때
안정이 오래 지속될수록 위험 감각은 잠들기 쉽다. 처음 위기를 겪은 조직은 조심한다. 작은 오류에도 민감하고, 현장의 보고를 무겁게 들으며, 실패의 기억을 반복해서 확인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큰 사고가 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다.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을 “문제가 없다”는 증거로 읽기 시작한다.
이 추론은 일상에서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 매일 다리를 건널 때마다 붕괴를 의심할 수는 없다. 반복된 무사함은 삶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시스템의 세계에서 이 추론은 쉽게 독이 된다. 사고가 없었던 이유가 실제 안전성 때문인지, 감시와 조율이 작동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아직 충분한 충격이 오지 않았기 때문인지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측되지 않은 실패는 실패 가능성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관측되지 않은 사건일 수 있다.
금융 시스템, 안전 산업, 관료 조직, 기술 플랫폼은 모두 이 함정에 노출된다. 위험 관리가 일정 기간 성공하면 사람들은 위험이 줄었다고 믿고, 위험이 줄었다고 믿으면 더 큰 위험을 감당하려 한다. 손실이 드물수록 레버리지는 커지고, 사고가 없을수록 점검은 줄어든다. 그러나 점검이 줄어든 사실은 다시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결과 속에 묻힌다. 위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측정되지 않는 곳으로 이동했을 수 있다.
이것이 성공의 역설이다. 실패의 기억은 규칙을 낳지만, 성공의 기억은 규칙의 의미를 잠들게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해왔다”는 문장은 때로 조직의 자산이지만, 때로는 가장 위험한 자기최면이다. 그 문장은 과거의 성취를 현재의 감각으로 바꾸지 못할 때, 미래의 실패를 부르는 주문이 된다. 그리고 그 주문이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 순간은 누군가가 지표와 현장의 불일치 같은 작은 균열을 들고 왔을 때다. 잘해왔다는 기억은 그 균열을 새 신호로 듣기보다 익숙한 잡음으로 듣는다. 흔들림을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가장 손쉬운 근거는 언제나 어제의 무사함이다.
6. 통제는 어떻게 보고서를 부드럽게 만드는가
다음 분기 보고서를 그 직원이 작성한다. 그는 책상 앞에서 같은 지표를 다시 본다. 추세는 지난 분기보다 더 분명해졌다. 현장에서 받는 신호와 본사 수치 사이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그는 처음 한 줄을 이렇게 써본다. “해당 지표는 현장 상황과 구조적으로 어긋나고 있어 재정의가 필요하다.” 화면을 한참 본 뒤 그 문장을 지운다. 두 번째 시도는 이렇다. “해당 지표는 일부 현장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추가 분석이 필요하다.” 이 문장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세 번째 문장은 비교적 빠르게 자리 잡는다. “해당 지표는 주의 깊게 관찰 중인 항목으로, 향후 보완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이 세 문장은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첫 번째 문장은 시스템에 책임을 묻고, 두 번째 문장은 사실의 무게를 분산시키며, 세 번째 문장은 문제 자체를 “관찰”과 “검토”의 미래형 동사 안으로 포장한다.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지난 분기 경험에서 학습했을 뿐이다. 처음 했던 직설이 어떻게 “톤”과 “태도”로 재명명되었는지 그는 기억한다. 보고서의 어휘는 그 기억의 산물이다.
회의실에는 늘 보이지 않는 계산이 있다. 이 말을 해도 되는가. 지금 이 문제를 제기하면 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는가, 아니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는가. 이 숫자를 있는 그대로 올리면 문제 해결이 시작되는가, 아니면 내 팀의 평가가 내려가는가. 인간은 순수한 정보 전달자가 아니다. 그는 평가받는 몸이고, 보상과 처벌의 구조 안에서 말하는 존재다.
따라서 통제 체계가 처벌과 보상에 과도하게 묶이면 보고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된다. 상층부는 이상한 평온을 얻는다. 모든 보고서는 정돈되어 있고, 모든 위험은 관리 가능하며, 모든 문제는 일정 안에 있다. 그러나 이 평온은 현실의 평온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필터링된 평온이다. 피부가 마비된 몸은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통증이 없다는 사실은 건강의 증거가 아니다.
에이미 에드먼슨(Amy C. Edmondson)이 말한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은 여기서 단순한 호의나 따뜻한 분위기가 아니다. 이 글의 맥락에서 심리적 안전감은 구성원이 처벌과 조롱의 위험 없이 오류, 의심, 반례를 말할 수 있는 조건이다. 이것은 조직을 느슨하게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정보의 정확도를 높이는 장치다. 말할 수 없는 조직은 조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눈이 멀어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이 부드러워지는 단계가 먼저 온다. 보고서의 세 번째 문장이 작성되는 그 순간이 시스템이 자기 시야를 잃기 시작하는 첫 장면이다.
7. 책임은 어떻게 분산되고 증발하는가
세 번째 분기가 되자 그는 그 지표를 더 이상 회의에 올리지 않는다. 누군가 묻는다면 “해당 사안은 본사 데이터팀에서 검토 중”이라고 답한다. 본사 데이터팀에 묻는다면 “현장 운영 부서의 입력 정합성을 점검 중”이라고 답할 것이다. 현장 운영 부서에 묻는다면 “지표 정의 자체가 본사 차원의 결정이라 우리 권한 밖”이라고 답할 것이다. 어느 부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모두 자기 자리에서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그 지표는 누구의 의제도 아니게 된다.
좋은 시스템은 개인의 실수를 줄인다. 매번 처음부터 판단하지 않아도 되게 하고, 한 사람의 변덕이 전체를 흔들지 못하게 하며, 복잡한 일을 여러 역할로 나누어 처리한다. 이것은 문명의 성취다. 그러나 절차가 너무 강해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도 묻지 않는다. “이것이 옳은가?” 대신 “내 역할은 어디까지인가?”라고 묻는다.
이 질문 자체는 필요하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조직은 폭력적이다. 역할의 경계는 인간을 보호한다. 그러나 그 경계가 도덕적 감각까지 대체하면 인간은 작아진다. 절차대로 했다는 말은 때때로 가장 위험한 면책의 문장이 된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사람은 틀린 말보다, 충분히 방어 가능한 말 뒤에 더 오래 숨는다.
조직적 실패는 대개 악한 개인 몇 명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개인의 무능, 비겁, 탐욕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하면 시스템의 책임은 사라진다. 더 위험한 장면은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부분적으로 합리적이었는데 전체적으로는 어리석은 결과가 만들어지는 경우다. 한 사람은 절차를 따랐고, 다른 사람은 보고 라인을 지켰으며,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권한 밖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각자는 방어 가능한 결정을 내렸지만, 전체는 방어 불가능한 방향으로 이동한다.
이것이 책임의 증발이다. 책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무 잘게 나뉘어 아무도 손에 쥐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시스템은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책임을 분산시켰지만, 어느 순간 그 분산은 책임의 부재처럼 작동한다. 그 직원은 처음 한 발언이 자신을 “부정적인 사람”으로 분류시켰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그는 두 번째 단계에서 보고서의 어휘를 부드럽게 했고, 세 번째 단계에서 그 사안을 자신의 책임선 밖으로 밀어냈다. 그 모든 단계에서 그는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시스템도 합리적이었다. 단지 그 합리성의 합이 현실의 균열을 듣는 능력의 소멸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결국 조직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규정대로 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은 남는다. 규정대로 했는데 왜 현실은 무너졌는가.
8. 정상 사고와 정상성의 신화
찰스 페로(Charles Perrow)의 정상 사고(normal accidents) 논의는 복잡하고 단단히 결합된 시스템에서 사고가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정상”이라는 말은 바람직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사고가 괴물 같은 돌발 사건만이 아니라, 시스템의 복잡한 상호작용과 빠른 결합 속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생겨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관점은 안정성의 신화를 흔든다. 조직은 사고를 개인의 실수나 단일 원인으로 환원하려 한다. 그렇게 해야 사고를 특정 지점에 봉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시스템에서는 작은 오류가 다른 오류와 결합하고, 각각의 방어막에 난 작은 구멍들이 우연히 한 줄로 맞물리며, 누구도 전체를 완전히 조망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제임스 리즌(James Reason)의 이른바 스위스 치즈 모델(Swiss cheese model)은 이 점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방어막은 존재하지만, 방어막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위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이앤 본(Diane Vaughan)이 챌린저호 발사 결정 분석에서 제시한 일탈의 정상화(normalization of deviance)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처음에는 비정상으로 여겨졌던 징후가 반복적으로 큰 사고 없이 지나가면, 조직은 그것을 점차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재분류한다. 위험은 갑자기 정상으로 변하지 않는다. 조금씩 정상처럼 보이게 된다. 어제 견딘 예외는 오늘의 허용 범위가 되고, 오늘의 허용 범위는 내일의 표준이 된다. 그리고 이 재분류의 핵심에는 다시 명명의 권한이 있다. 무엇이 “견딜 만한 일탈”이고 무엇이 “용납할 수 없는 일탈”인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시스템의 가장 권위 있는 자리에서 말하는 사람이다. 일탈의 정상화는 데이터의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분류의 점진적 이동이다.
이 지점에서 시스템의 불안정성은 단순한 취약성이 아니다. 그것은 정상성의 과잉이다. 조직은 너무 자주 “정상”이라는 말을 통해 자신을 안심시킨다. 정상 범위, 정상 절차, 정상 보고, 정상 운영. 그러나 정상이라는 말이 현실을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현실을 진정시키는 언어가 될 때, 시스템은 이미 위험한 평온 안에 들어서 있다.
앞 장들에서 시스템이 균열을 호명하고, 호명을 통해 분류하고, 분류를 통해 책임을 옮기는 과정이 드러났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이 과정을 멈추기 위해 어떤 종류의 균형이 필요한가이다. 안정성을 부정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면, 어떤 안정성이 자기 분류의 권한을 스스로 의심할 수 있는가.
9. 중용: 타협이 아니라 조율
안정성 비판은 쉽게 유연성의 찬양으로 흐른다. 그러나 무한한 유연성은 안정성의 반대가 아니라 또 다른 붕괴다. 모든 규칙을 의심하고, 모든 절차를 임시화하며, 모든 정체성을 열어두는 조직은 창조적인 것이 아니라 피로한 조직일 수 있다. 사람은 영구적인 변화 속에서 살 수 없다. 변화가 계속되면 인간은 자유로워지기 전에 먼저 지친다.
따라서 문제는 안정이냐 변화냐가 아니다. 그 구도는 너무 둔하다. 문제는 어떤 안정성이 살아 있는가이다. 살아 있는 안정성은 흔들림을 없애지 않는다. 흔들림과 함께 산다. 그것은 흔들림을 정상의 반대편으로 분류하는 대신, 정상이라는 말 자체를 흔들림 안에서 다시 정의한다.
여기서 『중용』의 통찰이 작동한다. 다만 중용은 중간값이 아니다. 과잉 통제와 과잉 유동성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라는 말도 아니다. 중용은 상황 속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을 조율하는 능력이다.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은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의 안정은 흔들림의 부재가 아니라 흔들림의 정확한 처리에서 나온다. 저울의 중심도 마찬가지다. 무게가 바뀌면 중심도 다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중용은 안온한 처세가 아니라 고도의 긴장이다. 흔들리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형태를 잃지 않는 능력이다.
이 긴장이 사라지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흔들림을 제거하려는 시도다. 회의실을 조용하게 만들고, 보고서를 매끄럽게 만들고, 반례를 “관찰 항목”으로 부드럽게 만든다. 이 시도는 표면의 평온을 얻는 대신 감각을 잃는다.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흔드는 시도다. 모든 규칙을 의심하고, 모든 합의를 임시화한다. 이 시도는 형태를 잃는다. 두 시도 모두 시스템을 무너뜨린다. 다만 무너지는 속도와 표정이 다를 뿐이다. 경직된 시스템은 조용히 굳어지고, 유동적인 시스템은 시끄럽게 흩어진다.
살아 있는 안정성은 이 둘의 산술적 중간이 아니다. 그것은 흔들림을 제거하지도 방치하지도 않는 능동적 자세다. 흔들림을 듣고, 그 흔들림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자기 갱신의 자료로 삼는다. 분류의 권한을 가진 자가 자기 분류의 한계 또한 의심할 때, 그 시스템은 비로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0. 작은 균열은 어디서 말해지는가
조건의 목록을 만들기는 쉽다. 그러나 조건의 목록은 조직을 바꾸지 못한다. 조직을 결정하는 것은 회의실의 공기다. 같은 산업, 같은 규모, 같은 매뉴얼을 공유하는 두 조직이 있다고 해보자. 두 조직의 차이는 어떤 절차를 보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다. 작은 실패가 어디서 말해지는가, 누구의 입에서 어떤 어휘로 말해지는가, 그리고 그 말이 다음 회의에서 어떤 자리를 얻는가다.
한 조직의 회의실에서는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지난 분기 그 지표 말입니다, 다시 보면 우리가 측정하는 방식 자체가 현장과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끝나면 사회자는 다음 안건으로 가지 않는다. 그는 잠시 멈추고 묻는다.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에서 어긋난다고 보십니까.” 그 질문은 그 발언자를 추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발언을 정보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회의록에는 그 발언이 “재검토 필요 사항”으로 남는다. 다음 회의의 어젠다에는 그 항목이 들어 있다. 누군가는 그 사이에 자료를 더 모으고, 누군가는 다른 부서와 조율한다. 발언자는 자신의 발언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이 무시되었다면 무시된 이유를 들을 수 있고, 받아들여졌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볼 수 있다.
다른 조직의 회의실에서는 같은 말이 나오면 다른 일이 일어난다. 사회자는 끄덕이고 빠르게 다음 안건으로 넘어간다. 회의록은 그 발언을 “기타 의견”으로 처리하거나 아예 기록하지 않는다. 며칠 뒤 발언자는 비공식 자리에서 “톤”에 관한 충고를 듣는다. 다음 분기에 그는 같은 사안을 다른 어휘로 보고서에 적는다. 그다음 분기에는 그 사안을 다른 부서로 넘긴다. 마침내 그는 그 사안을 더 이상 자기 입에서 꺼내지 않는다. 그 침묵은 합의의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학습된 침묵이다.
두 회의실의 차이는 매뉴얼의 차이가 아니다. 어휘의 차이도 아니다. 누가 분류의 권한을 가지고 있고, 그 권한이 자신을 의심할 줄 아는가의 차이다. 첫 번째 회의실에서 사회자는 자기 권위의 일부를 발언자에게 넘긴다. 그는 자신의 분류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회의실의 공기로 인정한다. 두 번째 회의실에서 사회자는 자기 분류의 권위를 끝까지 보존한다. 그는 친절하다. 그러나 그 친절은 분류 권한의 비대칭을 부드럽게 감싸는 친절이다.
말해지는 조직과 말해지지 못하는 조직의 차이는 결국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전자에서는 균열이 사건으로 다뤄지고, 후자에서는 균열이 인격으로 다뤄진다. 전자는 “이 지표가 어긋난다”라는 문장을 받지만, 후자는 “이 지표가 어긋난다고 말하는 사람”을 처리한다. 같은 말을 하는데 한쪽에서는 정보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평가가 된다. 그 차이는 절차의 양이 아니라 분류 권한의 자기 의심에서 나온다. 살아 있는 안정성이란 끝내 그 자기 의심을 제도화한 안정성이다.
11. 결론: 흔들림을 말할 권리
연말 평가서가 작성된다. 그 직원에 관한 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업무 수행 성실. 다만 일부 사안에 대해 협조적이지 않은 태도가 관찰됨. 향후 팀 협업 능력 강화 권고.” 그는 그 평가서를 읽는다. 한 줄이 그를 한 사람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 한 줄에는 그가 처음 회의에서 했던 말이 어디에도 없다. 지표와 현장의 불일치는 거기 없다. 그가 첫 보고서를 세 번 고쳐 쓴 사실도 거기 없다. 그가 그 사안을 다른 부서로 넘긴 사실도, 더 이상 회의에 올리지 않게 된 과정도 거기 없다. 평가서가 기록한 것은 단 하나, 그가 “협조적이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진짜 기록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그가 처음 했던 말이 아무 곳에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시스템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그 부재마저 그의 이름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 글이 처음부터 따라온 것은 바로 이 운동이다. 시스템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흔들림을 분류하고, 분류를 통해 책임을 옮기고, 책임을 옮긴 자리에 한 사람의 이름을 남긴다. 안정성을 추구하는 시스템이 스스로 불안정해지는 이유는 안정성을 원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안정성을 정지로 오해했고, 규칙을 현실보다 앞세웠으며, 위험 감각을 성공의 기억 속에 묻었고, 통제를 정보보다 사랑했으며, 책임을 절차 속에 흩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균열에 붙일 이름을 스스로 독점했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예외다. 이것은 불평이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다. 이것은 충성심의 부족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 이름들은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가. 현실을 보호하는가, 아니면 시스템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싶은 이미지를 보호하는가. 니체가 의심했듯이, 해석은 진실의 도구이기 전에 자기 보존의 도구다. 조직의 어휘 또한 그렇다. “관리 가능한 리스크”도, “주의 깊게 관찰 중인 항목”도, “협조적이지 않은 태도”도, 모두 같은 운동의 다른 얼굴이다.
완전히 흔들리지 않는 조직은 없다. 흔들림을 부정하는 조직만 있을 뿐이다. 흔들림을 부정하는 조직은 흔들림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이 말해질 수 있는 통로를 없앤다. 그때 안정성은 방패가 아니라 벽이 된다. 처음에는 바람을 막아주지만, 오래 지나면 빛도 막는다.
우리는 안정성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나 안정성에 너무 오래 기대면 감각을 잃는다. 시스템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인간은 시스템을 통해 자기기만을 조직화한다. 이 모순은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조금 더 정확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회의에서 처음 말을 꺼낸 한 사람이 “부정적인 사람”으로 기록되었을 때 손상된 것은 그 사람의 평판이 아니다. 그 회의실의 청력이다. 그리고 그 청력의 손상을 우리는 오랫동안 안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안정성의 실패는 흔들림의 실패가 아니다. 흔들림을 비정상으로 분류한 권력의 실패다.
12. 참고자료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도덕의 계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중용(中庸)』.
- Charles Perrow, Normal Accidents: Living with High-Risk Technologies.
- Diane Vaughan, The Challenger Launch Decision: Risky Technology, Culture, and Deviance at NASA.
- James Reason, Managing the Risks of Organizational Accidents.
- Amy C. Edmondson, “Psychological Safety and Learning Behavior in Work T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