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의 진단에서 계시의 독점으로
《팡세》를 비판적으로 읽기
《팡세》를 펼치는 일은 하나의 완결된 논증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다. 파스칼이 남긴 것은 기독교 변증을 위한 단상과 초고들의 더미였고, 사후 편집자들은 이 조각들에 순서를 부여하며 서로 다른 구성을 제안해 왔다. 이 물질적 조건은 사소한 기원의 문제가 아니다. 《팡세》를 읽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편집자의 배열과 저자의 의도 사이, 기독교 변증이라는 목적과 그 안에 담긴 철학적 관찰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모든 독해는 이미 해석의 선택이다. 이 글이 택한 선택은 파스칼의 진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되, 그 진단이 어떤 경로로 계시의 독점권이라는 결론으로 수렴되는지 그 수렴의 메커니즘 자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 작업은 파스칼의 통찰을 보존하면서도, 그 통찰이 어떻게 특정한 결론을 향해 기울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이중의 작업이다.
첫 번째로 인정해야 할 점은 파스칼의 인간 진단이 지금도 여전히 날카롭다는 사실이다.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은 우주 앞에서 미미하지만 자신의 미미함을 안다는 점에서 위대하고, 자신의 위대함을 알면서도 그 위대함이 곧 비참의 조건임을 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복잡하다. 이 이중 구속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과 단둘이 있기를 견디지 못한다. 공놀이, 사냥, 궁정의 소란, 일과 명예, 파스칼은 이 모든 것을 자기 회피의 장치로 읽었다. 방 안에 혼자 조용히 있지 못하는 데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온다는 그의 진술은 단순한 금욕주의가 아니라 특정한 인간학이다. 더구나 그의 divertissement 분석은 17세기 멜랑콜리 담론과 얀센주의적 타락 인간학의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기에 그 자체로 역사적 깊이를 가진다. 이것은 그의 진단이 시대 구속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감수성을 통과해 보편적 구조를 길어 올렸다는 의미이다. 진단은 정확하다. 문제는 진단 다음에 온다.
두 번째로 먼저 해야 할 일은 파스칼 자신의 인식론적 지형을 오해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 파스칼이 인간의 비참에서 기독교의 진리로 논리적 비약을 했다고 비판하지만, 파스칼 자신은 그 이행이 논증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에게는 세 가지 질서가 있다. 몸의 질서, 정신의 질서, 그리고 사랑의 질서이다. 세 질서는 서로 환원되지 않으며, 각 질서의 진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된다. 특히 그는 마음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이 있다고 썼다. 신앙은 이성적 증명의 결론이 아니라 마음의 질서에서만 현전하는 진리이다. 이 프레임을 인정해 두어야 비판이 허수아비 논증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파스칼은 비약을 한 것이 아니라 질서의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 따라서 비판의 과제는 단순히 비약을 지적하는 일이 아니라, 그 질서 전환의 요청이 어떤 조건에서 정당하며 어떤 조건에서 부당한지를 묻는 일이다. 이 물음을 놓치면 비판은 표적을 잃고, 이 물음을 붙들면 비판은 파스칼 자신의 언어 안으로 들어가 그 내부의 긴장을 건드릴 수 있다.
그 물음을 던지는 첫 번째 자리가 divertissement 비판이다. 파스칼에게 오락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자기 회피의 구조이다. 왕조차 홀로 두면 비참해진다는 유명한 관찰은 외부 활동 전부를 죽음 공포의 마취제로 환원하는 강력한 해석이다. 그러나 이 해석의 난점은 그것이 총체적이라는 데 있기보다, 인간 동기의 일원성을 전제한다는 데 있다. 인간의 활동 전부가 불안의 회피라는 단일 축 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주장은, 우정과 노동의 윤리, 예술적 몰입, 정치적 책임이 때로는 자기 발견과 자기 형성의 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배제한다. 파스칼은 외부 활동의 허위를 폭로하는 데 탁월한 대신, 외부와의 관계가 단순히 도피가 아니라 구성일 수 있다는 사실에 거의 무감각하다. 그의 진단이 자기 회피의 구조를 드러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드러냄의 렌즈 자체가 이미 신 앞의 단독자라는 특정한 인간상에서 출발해 있다. 이 점에서 파스칼의 해석학은 탁월하면서도 방향적이다. 탁월하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의 통찰로부터 배우고, 방향적이기에 우리는 그 통찰이 이미 어떤 결론을 향해 기울어져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세 번째로 이 비판은 《팡세》의 가장 유명한 대목인 내기에서 한층 선명해진다. 내기 논증은 종종 신 존재 증명으로 오해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증명이 아니라 결단의 논리이다. 구조는 단순하다. 신이 존재할 가능성과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을 두고, 신이 존재하고 믿는 경우의 무한한 이득과 존재하지 않고 믿는 경우의 유한한 손실을 비교하면, 믿음에 거는 것이 기대효용상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대효용 이론의 초기 형태에 속하며, 불확실성 아래 결단의 모델로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기여이다. 그러나 이 논증에는 잘 알려진 반론들이 있다. 첫째는 이른바 많은 신들 반론이다. 파스칼은 선택지를 기독교의 신과 무신론으로만 제시하지만, 실제 종교사의 장면에서는 여러 신과 여러 구원 체계가 경쟁하며 각각 무한한 이득과 손실을 약속한다. 이 순간 계산표는 단일한 지배 전략을 산출하지 못한다. 둘째 반론은 더 근본적이다. 어떤 믿음이 걸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과 그 믿음이 참이라는 사실은 다르다. 내기는 진리의 문제를 유용성의 문제로 치환하며, 이 치환이야말로 내기의 매력이자 취약성이다. 파스칼 자신은 참된 신앙이 결국 신의 선물이라고 보았기에 내기를 신앙 자체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팡세》의 수사적 구조는 회의하는 독자에게 먼저 내기의 문턱을 넘어오게 하는 데 집중한다. 여기서 유용성과 진리 사이의 경계는 일단 흐려지고, 이후 단계에서 그 경계가 다시 복원되리라는 기대만 남는다.
네 번째로 내기의 바로 다음 단계가 가장 예리한 내재적 비판을 허용한다. 파스칼은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수에 손을 대고 미사에 참여하며 외적 실천을 반복함으로써 신앙으로 나아가라고 권한다. 이 권고에는 인간이 단순히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습관과 몸의 자동성에 의해 형성되는 존재라는 통찰이 깔려 있다. 현대의 습관 이론이나 체화된 인지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 통찰은 상당히 정교하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파스칼 자신의 체계 내부에 심각한 긴장이 발생한다. 앞서 divertissement 분석에서 그는 외적 활동의 반복이 인간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떼어놓는다고 진단했다. 방 안에 혼자 있지 못하는 사람이 세계의 소란 속으로 흩어지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가장 근본적 증상이라면,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성수에 손을 대며 같은 예배를 반복하는 실천은 어떻게 그 구조의 예외가 될 수 있는가. 파스칼의 대답은 실천이 향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다. 세속적 오락은 자기를 잃게 만들지만 종교적 실천은 자기를 발견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방향성의 차이는 체계 외부에서 보증되지 않는다. 체계 안에서 방향은 이미 전제되어 있고, 체계 밖에서 보면 자기 회피와 자기 길들이기는 구조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파스칼이 인간에게서 발견한 회피의 자동성은 그의 치료법 안에서 다시 작동할 수 있다. 이것이 《팡세》의 가장 날카로운 역설이다. 진단의 도구가 처방 자체에 적용될 때, 처방의 신뢰성은 스스로 흔들린다.
다섯 번째로 이 역설을 확대하는 것이 숨은 신 교리이다. 파스칼에게 신의 감추어짐은 결함이 아니라 구조이다. 신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교만을 꺾고, 충분히 감추지 않음으로써 진지하게 찾는 자에게만 응답한다. 이 구도는 종교 체험의 섬세함을 포착하지만 윤리적으로는 심각한 비대칭을 발생시킨다. 현대 종교철학에서 쉘렌베르크가 정식화한 신적 숨음 논증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만약 완전히 사랑하는 신이 존재한다면, 진실하게 찾지만 믿지 못하는 비신앙자의 존재 자체가 그 신의 부재에 대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파스칼적 체계는 이 반론을 흡수하기 위해 한 가지 장치를 요구한다. 즉 진실하게 찾지만 믿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 충분히 진실하게 찾지 않았거나 교만에 사로잡혔다고 재해석되어야 한다. 이 순간 숨은 신 교리는 반증 불가능성을 확보하는 대신, 믿지 못하는 자의 성실성에 대한 전면적 의심으로 대가를 치른다. 파스칼은 회의를 흔드는 데 탁월하지만 회의하는 자를 공정하게 대우하는 데까지 탁월하지는 않다. 그의 체계 안에서 비신앙은 단순한 인식적 상태가 아니라 언제나 이미 도덕적 결함의 후보이다.
여섯 번째로 이 모든 비판은 《팡세》의 결론, 즉 예수 그리스도로의 수렴에서 응축된다. 파스칼에게 그리스도는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동시에 해명하는 중심이며, 숨은 신과 드러난 구원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보면 이 결론은 《팡세》가 수행한 가장 정교한 수사적 이행이다. 앞의 인간학적 관찰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공감 가능한 방식으로 서술된다. 자기 회피, 권태, 불안, 비참은 특정 종교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나 결론 단계에서는 같은 불안이 갑자기 특정한 신학적 문법 안으로만 닫힌다. 《팡세》가 처음부터 기독교 변증서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그 이행이 얼마나 매끄럽게 일어나는가이다. 독자는 보편적 불안의 인식을 통해 텍스트에 동의하다가, 어느 순간 그 동의의 힘이 특정한 교의로의 귀속을 요청하는 데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파스칼은 이 수사적 운동을 가장 높은 기술로 수행하는데, 바로 그 기술 때문에 그는 철학자이자 변증가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독자의 유혹자이다. 위험함은 기만에 있지 않고, 그가 스스로 설득되어 있다는 진정성에 있다.
일곱 번째로 이제 앞서 짚은 내재적 역설을 다시 불러와야 한다. 파스칼의 체계에서 신앙은 궁극적으로 신의 선물이고, 인간은 습관과 외적 실천을 통해 그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준비가 divertissement의 구조와 형식적으로 유사하다면, 《팡세》의 독자는 한 가지 불안한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파스칼이 제안하는 신앙에의 길이 그의 자기 진단 안에서 가장 정교한 형태의 자기 회피가 될 가능성이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파스칼의 도구가 그의 결론에까지 일관되게 적용될 때 나타나는 귀결이다. 진정한 신앙과 세련된 자기 길들이기를 체계 외부에서 구분할 기준이 없다는 점에서, 《팡세》는 그 자신이 가장 경계한 회피의 가능성을 자기 안에 내장하고 있다. 이 자기 반성의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전개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파스칼의 가장 큰 맹점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외적 활동에 의심의 시선을 던졌지만, 그 시선을 자신의 처방 안으로 돌려 비추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논리적 결함이 아니라, 변증적 텍스트가 자기 검토를 수행할 때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난점이다.
그렇다면 《팡세》를 오늘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흔히 제안되는 독법은 파스칼의 질문과 답을 분리하여, 질문의 보편성은 살리고 답의 특수성은 판단 보류에 맡기는 것이다. 이 독법은 온건하고 실용적이지만 《팡세》의 구조를 너무 낙관적으로 다룬다. 파스칼의 질문은 이미 특정한 답을 향해 조율되어 있고, 그 질문에서 답으로의 이행은 분리 가능한 논리적 단계가 아니라 텍스트의 수사적 운동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정직한 독법은 《팡세》가 독자를 유인하는 이 수사적 운동 자체를 의식하는 독법, 이른바 역결독법이다. 인간 조건에 대한 파스칼의 관찰을 받아들이되, 그 관찰이 기독교적 결론으로 수렴하는 경사를 거슬러 읽기. 텍스트가 설정한 질문의 공간 안에 머물되, 텍스트가 제시한 답의 독점성에는 동의하지 않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파스칼의 진단이 그의 처방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놓치지 않기. 이때 《팡세》는 한 시대의 변증서로 소비되지 않고,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방식을 가장 잔인하게 기록한 책으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그 기록은 기록자 자신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파스칼이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더 깊은 진실을 말한다. 비판적 독자가 《팡세》로부터 배울 수 있는 마지막 교훈은 어쩌면 이것이다. 가장 날카로운 진단일수록 그것을 휘두르는 자 자신을 피해 가기 어렵다는 사실.
참고자료
Pascal, Blaise. Pensées. Project Gutenberg 전자본 및 Brunschvicg·Lafuma 편집본 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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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William. “The Will to Believe.” 1896. (내기 논증의 실용주의적 재해석 맥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