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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왜 폐허를 필요로 하는가

프롤로그: 아직 쓸 수 있는 것의 폐기

공장이 닫히는 날, 사람들은 이상한 종류의 부당함을 경험한다. 기계가 완전히 망가진 것도 아니다. 노동자가 갑자기 게을러진 것도 아니다. 제품이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쓰레기가 된 것도 아니다. 여전히 만들 수 있고, 여전히 팔릴 수 있고, 여전히 어떤 사람에게는 필요한 물건이다. 그런데도 경제는 말한다. 충분하지 않다.

이 말은 잔인하다. 경제는 자주 도덕의 언어를 쓰지 않는다. 그것은 한 사람의 성실함을 직접 모욕하지 않는다. 대신 더 차가운 방식으로 판정한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이 만들 수 있는 기술이 나타났다고. 같은 품질을 더 낮은 비용으로 생산하는 기업이 생겼다고. 소비자의 욕망이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고. 그러므로 이 설비, 이 숙련, 이 지역, 이 생애의 방식은 더 이상 중심에 놓일 수 없다고.

러다이트(Luddite)들이 부순 것은 단지 기계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 노동의 의미가 바뀌는 순간을 보았다. 디지털카메라가 필름을 밀어냈을 때 사라진 것은 필름이라는 물질만이 아니었다. 현상소, 암실, 기다림의 리듬, 사진을 다루는 손의 감각도 함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플랫폼은 더 빠른 배달과 더 낮은 탐색 비용을 제공했지만, 그 속도 뒤에서 노동은 더 잘게 쪼개지고, 위험은 개인에게 더 쉽게 흘러갔다.

이 장면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하지만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 새것은 낡은 것을 단순히 대체하지 않는다. 새것은 낡은 것의 경제적 정당성을 빼앗는다. 낡은 것은 틀려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충분히 생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더 이상 충분히 빠르지 않다는 이유로, 더 이상 충분히 확장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밀려난다.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는 말이 불편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것은 파괴를 말하면서 동시에 창조를 말한다. 폐허를 말하면서 동시에 성장을 말한다. 경제성장은 모두가 조금씩 더 많이 생산하는 평화로운 상승선이 아니라, 때로는 아직 쓸 수 있는 것들이 경제적으로 폐기되는 과정이다.

이 글은 창조적 파괴를 찬양하려는 글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단순히 고발하려는 글도 아니다. 파괴 없는 성장을 꿈꾸는 마음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것은 자주 미래를 질식시키는 향수로 변한다. 반대로 새것의 이름으로 모든 폐기를 정당화하는 태도는 생산성의 언어로 인간을 지운다.

이 글의 논제는 다음 한 문장이다. 창조적 파괴는 성장의 메커니즘이지만, 그 메커니즘이 윤리적으로 정당해지는 것은 오직 파괴가 인간의 전환 능력을 폐기하지 않는 조건 위에서만이며, 이 조건은 시장이 자동으로 충족시키지 않는다. 이 문장은 두 가지 거절을 포함한다. 첫째, 파괴를 모두 막자는 향수의 거절. 둘째, 파괴를 모두 정당화하는 효율주의의 거절. 그 사이에서 이 글은 파괴의 성격을 묻는다. 어떤 조건에서 파괴는 창조로 이어지고, 어떤 조건에서 그것은 단지 비용을 약자에게 떠넘기는가.


제1부. 원리: 창조적 파괴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두 층위의 구분

먼저 한 가지 구분을 박아두어야 한다. 이 글에서 “창조적 파괴”는 두 층위에서 사용된다. 하나는 기술경제적 메커니즘으로서의 창조적 파괴다. 새 기술이 옛 기술의 시장 가치를 무너뜨리며 성장이 일어난다는, 슘페터(Joseph A. Schumpeter) 이후 아기옹·호위트(Philippe Aghion, Peter Howitt) 모형으로 정식화된 작동 원리를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윤리적 은유로서의 창조적 파괴다. 그 메커니즘이 실제 인간의 생애에 닿을 때 발생하는 폐기, 탈락, 자기이해의 붕괴를 가리킨다.

두 층위는 같은 단어를 쓰지만 같은 것이 아니다. 메커니즘으로서의 창조적 파괴는 가치중립적 분석 대상이다. 그것이 일어나는가, 어떤 조건에서 효율적인가, 어떤 모형으로 설명되는가가 문제다. 은유로서의 창조적 파괴는 가치 판단의 영역이다. 누가 폐기되었는가, 그 폐기는 정당한가, 그 비용은 누구에게 흘러갔는가가 문제다.

이 구분을 흐리면 두 가지 오류가 발생한다. 첫째, 메커니즘이 작동했다는 사실로 윤리적 정당성을 자동 도출하는 오류. 즉 “시장이 그렇게 판정했으므로 그것이 옳다”는 추론이다. 둘째, 윤리적 거부감으로 메커니즘 자체를 부정하는 오류. 즉 “인간이 다치므로 파괴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추론이다. 이 글은 메커니즘의 작동을 인정하면서, 그 작동의 윤리적 정당성을 별도로 묻는다.

더하기에서 교체로

층위 구분을 박아둔 채 메커니즘으로 들어간다. 성장은 단순한 덧셈이 아니다. 더 많은 자본, 더 많은 노동,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가 성장을 설명하는 전부라면, 경제는 창고에 곡물을 더 쌓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많고,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은 상태. 그러나 창조적 파괴가 보여주는 성장은 그런 평온한 누적이 아니다.

슘페터가 보았던 자본주의는 정지한 균형 체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부에서 계속 자신을 뒤집는 체계였다. 새로운 상품, 새로운 생산방법, 새로운 시장, 새로운 원료, 새로운 조직이 등장할 때 경제는 단지 넓어지지 않는다. 구조가 바뀐다. 이전의 중심이 주변으로 밀려나고, 주변의 가능성이 중심을 위협한다.

이 관점에서 성장은 하나의 불편한 판정을 포함한다. 아직 쓸 수 있는 기술도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숙련된 노동도 더 이상 높은 가치를 보장하지 않을 수 있다. 오래 버틴 기업도 앞으로의 생존권을 자동으로 갖지 않는다. 창조적 파괴의 관점에서 경제성장은 누적이면서 동시에 폐기다. 무언가가 더해지는 동안, 다른 무언가는 조용히 경제적 의미를 잃는다.

이 명제는 냉혹하지만 완전히 틀리지는 않다. 장기적 생활수준의 상승은 많은 경우 낡은 생산 방식이 더 나은 생산 방식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가 너무 빨리 잔인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폐기가 생산성 향상의 조건일 수 있다는 말은, 폐기되는 인간이 아무 의미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할 때 경제학은 해부학이 아니라 처형장이 된다.

새 지식은 낡은 지식의 의자를 빼앗는다

성장이 누적이 아니라 교체라면, 다음 질문은 무엇이 무엇을 교체하는가이다. 즉 지식이 시장에서 어떻게 평가되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지식은 보통 축적의 이미지로 이해된다. 하나의 논문 위에 다른 논문이 놓이고, 하나의 발견 위에 다른 발견이 쌓인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새로운 물리학이 등장했다고 해서 폐기되지 않는다. 뉴턴 역학은 상대성이론 이후에도 낮은 속도와 일상적 규모의 세계에서 여전히 작동한다. 과학적 지식은 수정되고 제한되고 재해석될 수 있지만, 반드시 시장에서처럼 퇴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경제 안으로 들어온 지식은 그렇게 온순하지 않다. 시장에서 지식은 참과 거짓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비용, 품질, 속도, 확장성, 편의성, 그리고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의 저울 위에 올라간다. 네트워크 효과란 사용자가 늘어날수록 같은 서비스의 가치가 더 커지는 구조를 말한다. 전화는 가입자가 둘일 때보다 백만일 때 더 가치 있고, 검색엔진은 사용자가 많을수록 검색 품질이 좋아진다. 이런 구조 위에서는 한 기술이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아도, 더 빠르게 복제되고 더 많은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기술이 등장하면 그것의 경제적 자리는 좁아진다.

인쇄술이 필경사를 대체한 것은 손으로 쓴 글자가 가독성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속도와 복제 비용이었다. 자동차는 말이 생물학적으로 틀렸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디지털 음원은 레코드의 물리적 원리가 거짓이어서 이긴 것이 아니다. 검색엔진은 도서관의 분류법을 철학적으로 반박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더 빠르고, 더 싸고, 더 넓게 복제 가능했으며, 더 많은 사용자의 일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경제적 지식의 잔인함은 여기에 있다. 낡은 지식은 오류가 아니라 열등한 생산성 때문에 밀려난다. 틀리지 않았는데도 진다. 아직 아름다운데도 중심에서 내려온다. 바로 이 지점에서 메커니즘으로서의 창조적 파괴는 윤리적 은유로서의 창조적 파괴와 마주친다. 사람은 자기가 틀렸다는 말보다, 자기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더 견디기 어렵다.

물론 낡은 기술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수공예, 아날로그 매체, 전통 제조방식은 때로 고급화되거나 틈새시장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하지만 그것은 대개 중심 생산체계에서 밀려난 뒤 다른 이름으로 재배치되는 과정이다. 낡은 것은 살아남을 수 있다. 다만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다.

성장모형 안으로 들어온 죽음

낡은 지식이 시장에서 떠밀린다는 사실까지가 인정된다면, 그 떠밀림이 경제성장의 모형 안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가 다음 문제다.

아기옹과 호위트의 창조적 파괴 성장모형은 이 떠밀림을 이론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기술진보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연구개발, 기대이윤, 경쟁, 시장구조 속에서 생긴다. 혁신자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일시적 독점이윤을 얻는다. 그러나 그 이윤은 영원하지 않다.

다음 혁신자는 단순히 새 기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전 혁신자의 이윤을 빼앗는다. 경제학은 이것을 사업탈취 효과(business stealing effect)라고 부른다. 이름이 주는 인상과 달리 이것은 일탈이 아니다. 이 모형에서 성장은 빼앗음을 통해 일어난다. 오늘의 혁신이 어제의 혁신을 밀어내고, 그 밀어냄이 다시 내일의 연구개발 유인을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체가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는 점이다. 창조적 파괴 모형에서 누군가의 이윤이 무너지는 일은 성장의 외부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모형 안에 들어온 장치다. 죽음은 방정식 바깥의 비극이 아니라 방정식 안의 조건이다.

이것은 경제학적으로 세련된 설명이지만, 철학적으로는 차갑다. 어떤 이윤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장례일을 기다린다. 오늘의 혁신자는 내일의 기득권이 된다. 오늘의 파괴자는 내일 다른 파괴자의 표적이 된다. 자본주의의 약속은 영원한 승리가 아니라 다음 패배 이전까지의 잠정적 우위다.

그러나 이 모형을 방임의 논리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혁신은 제도 없이 자연적으로 선해지지 않는다. 특허가 너무 강하면 다음 혁신의 진입이 막힌다. 보호가 너무 약하면 연구개발의 유인이 줄어든다. 금융이 막히면 후발기업은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교육과 노동법이 부실하면 파괴의 비용은 특정 계층과 지역에 고정된다. 창조적 파괴는 시장의 야생성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상과 진입, 보호와 개방, 독점과 경쟁의 경계 위에서 작동한다.

혁신자는 영웅이 아니라 불안의 운반자다

모형이 성립한다고 해서 그 모형 안에 사는 사람의 표정까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모형이 죽음을 방정식 안에 넣는다면, 그 죽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자가 누구인지도 따져야 한다.

슘페터의 기업가는 오랫동안 영웅이기를 요구받아 왔다. 그는 낡은 질서를 깨고 새 시장을 열며, 아무도 보지 못한 가능성을 현실로 만든다. 이 서사는 절반만 맞다. 기업가는 새로운 결합을 만든다. 하지만 새로운 결합은 기존 결합을 무력화한다. 그는 미래를 여는 사람인 동시에 타인의 현재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 불안은 부차적 감정이 아니다. 창조적 파괴의 내부에 있는 정서다. 소비자는 더 싸고 좋은 물건을 얻는다. 투자자는 새로운 수익을 기대한다. 도시는 새로운 산업을 유치하려 한다. 그러나 같은 순간 기존 생산자는 자기 기술의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본다. 노동자는 자기 경력이 더 이상 충분한 신호가 되지 않는 것을 본다. 지역은 젊은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본다.

기업가를 악마화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낭만화할 이유도 없다. 어떤 파괴자는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만든다. 어떤 파괴자는 규제의 허점, 독점력, 금융공학(financial engineering), 노동비용 전가를 이용해 기존 질서를 약화시킨다. 여기서 금융공학이란 부채구조 재배열, 조세 차익, 회계상 위험 이전, 인수합병의 레버리지 활용을 통해 실제 생산성 개선 없이 기업가치를 끌어올리는 기법을 가리킨다. 전자는 창조적 파괴일 수 있다. 후자는 파괴의 사유화다. 이름이 같다고 구조가 같은 것은 아니다.


제2부. 역설: 안정이라는 환상과 탈락의 회계

파괴가 멈춘 방

파괴는 두렵다. 이 두려움은 무지에서만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 생계가 추상적 효율의 실험대 위에 올라가는 순간을 본능적으로 안다. 어떤 사람에게 혁신은 새로운 선택지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혁신은 자기 생애가 더 이상 읽히지 않는다는 통보다. 그러므로 파괴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파괴가 멈춘 곳에 곧바로 인간적인 안정이 오는 것도 아니다. 기업 진입이 줄고, 퇴출이 줄고, 고용 재배치가 약해지는 경제는 겉으로는 조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이 늘 평화는 아니다. 낮은 생산성의 기업이 계속 자원을 묶어두고, 젊은 기업이 들어올 통로가 좁아지고, 선도기업과 후발기업의 격차가 굳어지면 경제는 서서히 움직임을 잃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낡은 지대”라는 표현을 한 번 정의해두는 편이 좋다. 이 글에서 낡은 지대(old rents)는 단순히 오래된 산업이나 오래된 기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술적·경제적 정당성을 잃은 뒤에도 정치적 영향력, 규제 유리, 진입장벽, 보조금, 관행적 거래 관계로 자기 위치를 유지하는 경제적 자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낡은 지대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정당성의 문제다. 오래된 산업도 새로운 가치를 만들면 낡은 지대가 아니다. 새로운 산업도 규제 포획(regulatory capture)에 기대 후발자의 진입을 막는다면 이미 낡은 지대다. 규제 포획이란 본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설계된 규제기관이 점차 피규제 산업의 이해관계를 따라가게 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아무도 밀려나지 않는 듯 보이는 방은 안전해 보인다. 그러나 그 방은 때로 새로 들어올 사람을 막는 방이다. 문이 닫힌 안정은 내부자를 보호할 수 있지만, 미래의 가능성을 밖에 세워둘 수도 있다. 낡은 지대를 보호하는 안정은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나타나지만, 그 이면에서 후발자의 시간을 빼앗는다.

그렇다고 “비효율은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는 말로 달려가면 안 된다. 그런 문장은 빠르고 무책임하다. 기업의 퇴출은 회계장부의 한 줄이 아니라 가족, 부채, 지역, 학교, 병원, 상권, 자존감의 문제다. 낡은 지대를 보호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낡은 산업에 묶인 인간까지 버려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 글이 견뎌야 하는 긴장은 바로 여기에 있다. 파괴를 막을 때 어떤 조건에서 미래의 통로가 좁아질 수 있고, 파괴를 방치할 때 어떤 조건에서 인간의 생애가 부서질 수 있는지를 같이 본다. 이것은 필연 명제가 아니다. 파괴를 막아도 미래가 열리는 사례가 있고, 파괴를 방치해도 인간이 회복되는 사례가 있다. 그러나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두 결과는 자주 함께 일어난다. 그러므로 다음 질문은 파괴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파괴가 지나간 뒤 무엇이 계산되고 무엇이 버려지는가이다.

평균 성장률이 감추는 시간

성장률은 깨끗하다. 숫자는 피로하지 않다. 소수점 아래의 증감은 울지 않는다. 그러나 평균은 언제나 분포를 숨긴다. 경제 전체가 성장했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기업은 시장을 넓히고, 어떤 기업은 사라진다. 어떤 노동자는 재교육을 통해 이동하고, 어떤 노동자는 나이, 건강, 돌봄 부담, 주거, 지역, 부채 때문에 이동하지 못한다.

이 문제는 추상적 우려가 아니다. 자동화의 노동시장 효과를 분석한 연구들은 기술진보가 노동수요를 자동으로 늘리지 않는다는 점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새 기술이 노동을 보완하기보다 대체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때, 임금 분포는 양극화되고, 특정 직업군의 일자리가 빠르게 줄어들 수 있다. 또한 무역 충격이 지역 노동시장에 미친 장기 효과를 추적한 연구들은 충격이 일회성이 아니라 십수 년에 걸쳐 지역의 고용률, 임금, 노동참여율, 사망률에까지 영향을 남긴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즉 경제 전체의 평균 성장률은 회복되어도, 특정 지역과 특정 세대는 회복되지 않는 시간을 산다.

창조적 파괴의 윤리적 위험은 여기에 있다. 모형은 전환을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전환 비용을 몸으로 지불한다. 경제학의 언어에서 노동자는 부문 사이를 이동한다. 현실에서 사람은 집을 팔아야 할지 고민하고, 아이의 학교를 옮길지 망설이며, 자기가 가진 숙련이 늦은 나이에 다시 가격을 얻을 수 있는지 묻는다.

어떤 사람에게 전환은 재교육이다. 어떤 사람에게 전환은 자기 생애가 더 이상 시장에서 읽히지 않는다는 통보다. 이 차이를 지우는 순간, 창조적 파괴는 성장론이 아니라 탈락의 제도화가 된다. 제도화란 특별한 악의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의가 없어도 반복되는 구조를 뜻한다. 매번 생산성이라는 이름으로 특정 직업, 특정 지역, 특정 연령, 특정 숙련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과정. 그것이 충분히 반복되면 사람들은 자기 탈락을 개인의 실패로 내면화한다.

이 지점에서 냉소는 쉬운 길이다. “세상이 변했으니 적응해야 한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문장은 너무 많은 것을 지운다. 누구에게 적응할 시간과 자원이 있었는가. 누가 이동할 수 있었고, 누가 가족과 지역에 묶여 있었는가. 누가 실패를 몇 번 시도할 수 있는 자산을 가졌고, 누가 한 번의 실패로 생애 전체가 기울었는가. 적응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의 문제이기도 하다.

측정되지 않는 이익과 측정되지 않는 비용

창조적 파괴는 통계에도 곤란한 문제를 남긴다. 새 제품, 품질 개선, 디지털 서비스, 무형자산은 기존 지표가 충분히 포착하기 어렵다. 여기서 무형자산(intangible assets)이란 소프트웨어, 데이터, 브랜드 가치, 조직 자본, 연구개발 축적처럼 물리적 형태가 없지만 기업의 생산성과 시장 가치에 기여하는 자산을 가리킨다. 사라진 제품과 등장한 제품 사이의 품질 차이를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 무료 혹은 저가 디지털 서비스가 주는 후생을 어느 정도로 볼 것인가. 새 기술이 만든 편리함은 가격표에 항상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기옹·베르조·보파르·클레나우·리(Aghion·Bergeaud·Boppart·Klenow·Li)의 「창조적 파괴로부터의 누락 성장」은 이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다. 통계기관이 사라진 제품의 가격 변화를 살아남은 제품의 가격 변화로 대체해 추정할 때, 새 제품이 낡은 제품을 밀어내며 만든 품질 개선과 후생 증가가 충분히 잡히지 않을 수 있다. 창조적 파괴는 실제보다 덜 측정될 수 있다. 성장의 빛이 통계의 렌즈 바깥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측정되지 않는 것은 이익만이 아니다. 비용도 자주 측정되지 않는다. 지역 공동체의 붕괴, 숙련의 무가치화, 생애경로의 상실, 직업적 자존감의 훼손은 국내총생산(GDP)에 직접 적히지 않는다. 어떤 도시는 숫자로 보면 천천히 쇠퇴하지만, 그곳에서 사는 사람에게 쇠퇴는 매일 보이는 문 닫힌 가게와 줄어든 버스 노선과 떠난 친구의 이름으로 온다.

따라서 통계의 한계를 말하는 것은 통계를 버리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더 엄격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측정되지 않는 성장의 이익을 인정하려면, 측정되지 않는 파괴의 비용도 함께 보아야 한다. 한쪽 눈으로 미래의 품질 개선만 보고, 다른 한쪽 눈으로 무너진 것들의 시간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장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믿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파괴 자체가 문제라면 우리는 혁신을 포기해야 하는가. 파괴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어떤 파괴를 견딜 것인가. 여기서부터 창조적 파괴의 진짜 질문은 파괴의 성격으로 옮겨간다.


제3부. 경계: 어떤 파괴가 창조인가

이름은 증명이 아니다

파괴는 스스로를 창조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름은 증명이 아니다. 어떤 파괴는 낡은 것을 치우고 새 길을 낸다. 어떤 파괴는 약한 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더 높은 담장을 세운다. 창조적 파괴라는 말은 유용하지만 위험하다. 그것은 혁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약탈적 구조조정과 독점적 지배를 미화하는 수사로 쓰일 수 있다.

따라서 질문은 “파괴를 허용할 것인가”가 아니다. 질문은 “어떤 조건에서 파괴는 창조가 되는가”이다. 이 조건을 묻지 않으면 우리는 성장의 이름을 가진 모든 폭력을 정당화하게 된다.

판별 기준은 건조하다. 그러나 실제 심판은 건조하지 않다. 어느 중년 노동자가 새벽에 일어나 경력서를 다시 고쳐 쓰는 모습은 표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산업단지의 식당이 하나씩 문을 닫고, 버스 노선이 줄고, 아이들이 떠난 도시에 남은 노인이 병원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하는 일도 표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도 기준은 필요하다. 기준이 없으면 감정은 쉽게 원한이 되고, 효율은 쉽게 폭력이 된다.

판별 기준 물어야 할 질문 실패할 때의 모습 짧은 사례
실질적 생산성 비용·품질·접근성·효용이 실제로 개선되는가 임금 삭감과 위험 외주화가 혁신으로 포장됨 배달 플랫폼의 낮은 가격이 소비자 편익인지, 라이더의 위험 이전인지 물어야 한다
개방성 혁신의 이익이 확산되고 다음 도전자가 진입할 수 있는가 승자가 시장을 닫고 데이터·네트워크·자본으로 성벽을 세움 검색·전자상거래 플랫폼이 편의를 제공하면서도 후발자의 통로를 막는 경우가 있다
전환 비용의 분배 탈락 비용이 특정 지역·연령·숙련·계층에 집중되지 않는가 성장의 이익은 넓게 말해지고 비용은 특정 집단의 개인 실패로 환원됨 공장 이전 뒤 지역 상권과 중년 노동자의 경력 손실이 함께 발생한다
제도적 정당성 파괴가 공정한 경쟁 규칙 위에서 일어나는가 규제 포획, 조세 회피, 노동권 약화, 금융공학이 효율로 둔갑함 기존 법의 빈틈을 이용한 비용 회피가 기술혁신처럼 포장될 수 있다

이 네 기준은 완벽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무디게 만들지 않게 해준다. 창조적 파괴를 말할 때 필요한 것은 신앙이 아니라 판별이다. 파괴의 칼날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그 칼날 뒤에 실제로 무엇이 자라는지 확인해야 한다.

실질적 생산성 기준은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다. 새 기업이 더 싸게 공급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곧바로 혁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비용이 낮아진 이유가 기술, 조직, 규모, 지식의 개선이라면 그것은 창조적 파괴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나 비용이 낮아진 이유가 위험의 외주화, 임금의 압박, 사회보험의 회피, 규제 공백의 이용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생산성이 아니라 비용의 이동일 수 있다.

개방성 기준은 승리 이후를 묻는다. 혁신자는 처음에는 도전자다. 그러나 성공한 도전자는 곧 문지기가 된다. 그가 다음 도전자의 길을 열어두는가, 아니면 데이터와 네트워크 효과와 자본력으로 문턱을 높이는가. 창조적 파괴가 한 번의 혁신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오늘의 승자가 내일의 도전을 완전히 봉쇄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전환 비용의 분배 기준은 폐허의 위치를 묻는다. 성장의 이익은 사회 전체의 이름으로 말해지는데, 비용은 왜 특정한 사람의 생애에 집중되는가. 공장 하나가 문을 닫으면 경제 전체의 생산성은 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지역의 식당, 학원, 병원, 주택가격, 통근시간, 가족관계는 함께 흔들린다. 비용은 숫자보다 넓게 번진다.

제도적 정당성 기준은 파괴의 방식에 관한 질문이다. 시장에서 이겼다고 해서 모든 승리가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규칙을 개선해서 이긴 것과 규칙의 빈틈을 이용해 비용을 떠넘긴 것은 다르다. 혁신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노동권 약화, 조세 회피, 데이터 독점, 규제 포획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름은 증명이 아니다.

경쟁은 약도 독도 아니다

경쟁은 자주 좋은 것으로 말해진다. 경쟁이 있어야 기업이 혁신하고, 독점이 깨지고, 소비자가 이익을 얻는다는 말은 상당 부분 타당하다. 그러나 경쟁은 단순한 약이 아니다. 그것은 용량을 요구하는 물질에 가깝다. 너무 적으면 몸은 게을러지고, 너무 많으면 몸은 회복할 시간을 잃는다.

아기옹·블룸·블런델·그리피스·호위트(Aghion·Bloom·Blundell·Griffith·Howitt)가 제시한 경쟁과 혁신의 역U자 관계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경쟁이 전혀 없으면 기존 기업은 혁신할 압력을 느끼지 않는다. 이미 가진 시장과 지대가 충분히 안전하다면, 위험한 연구개발에 나설 이유가 줄어든다. 그러나 경쟁이 지나치게 강하거나 기술 격차가 너무 크면 후발기업은 혁신을 포기할 수 있다. 따라잡을 가능성이 없다고 느끼는 기업은 사다리를 오르지 않는다. 사다리가 너무 멀리 있으면, 인간은 점프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쟁과 혁신의 관계는 단순한 직선이 아니다. 가까운 기술 수준에서 서로 추격하는 기업들에게 경쟁은 탈출의 압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크게 뒤처진 기업에게 같은 경쟁은 포기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이 차이를 지우고 “경쟁을 늘리면 혁신이 증가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분석이 아니라 구호가 된다.

반대로 “국가가 보호해야 혁신한다”는 말도 위험하다. 보호는 학습을 만들 수 있지만 지대도 만든다. 산업정책은 미래의 역량을 키우는 장치가 될 수 있지만, 실패한 기업을 영구히 살리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시장이냐 국가냐가 아니다. 문제는 경쟁 강도다. 어떤 조건에서 압력이 혁신을 만들고, 어떤 조건에서 압력이 포기를 만들며, 어떤 조건에서 보호가 학습을 만들고, 어떤 조건에서 보호가 부패를 만드는가이다.

창조적 파괴는 여기서 다시 어려워진다. 우리는 파괴를 허용해야 하지만, 아무 파괴나 허용해서는 안 된다. 경쟁을 강화해야 하지만, 경쟁을 신앙으로 만들면 안 된다. 보호가 필요하지만, 보호가 지대의 성벽이 되는 순간 그것은 미래의 적이 된다. 이 불편한 조건문들을 견디는 것이 제도의 일이다.

더 강한 반론: 성장 자체를 의심한다

지금까지 이 글은 창조적 파괴를 받아들이되 그 조건을 까다롭게 따지는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이 자세는 한 가지 전제 위에 서 있다. 즉 성장은 그 자체로 정당한 목표라는 전제다. 이 전제를 부정하는 두 가지 반론이 있다. 글의 정직함을 위해 이 둘을 외면한 채 결론으로 갈 수는 없다.

첫째 반론은 탈성장(degrowth)의 입장이다. 이 입장은 묻는다. 성장 자체가 문제라면, 창조적 파괴를 잘 관리한다는 기획이 결국 더 정교한 파괴를 만들지 않는가. 생태적 한계가 분명한 행성에서 끝없는 생산성 추구는 결국 다른 형태의 폐허를 누적할 뿐이며, 그 폐허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의존하는 자연 자체에 대한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 입장에서 보면 “지속가능한 창조적 파괴”라는 말은 형용 모순에 가깝다. 자원 추출, 탄소 배출, 폐기물 흐름이 계속 늘어나는 한, 어떤 윤리적 조정도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반론에 정직하게 답하자면, 이 글은 그것을 완전히 반박하지 못한다. 다만 두 가지를 구분할 수는 있다. 모든 성장이 자원 소비의 누적인지, 아니면 무엇을 어떻게 더 잘하는가의 질적 변화인지는 경험적으로 갈리는 문제다. 어떤 영역에서는 같은 자원으로 더 많은 후생이 가능했고, 어떤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성장은 곧 폐허의 누적”이라는 명제는 강한 형태로는 입증되지 않았으나, “어떤 종류의 성장은 회복 불가능한 폐허를 만든다”는 명제는 충분히 입증되어 있다. 이 글이 다루는 창조적 파괴는 후자의 위험을 인정한 채로만 옹호될 수 있다. 즉 이 글의 입장은 성장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인간의 전환 능력과 자연의 회복 능력이라는 두 경계 안에 묶어두는 것이다. 그 경계 바깥에서 일어나는 파괴는 창조라는 이름을 자격으로 갖지 않는다.

둘째 반론은 더 근본적이다. 생산성이라는 기준 자체가 이미 인간을 도구화한다는 비판이다. 어떤 사람이 “더 이상 충분히 생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밀려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할 때, 우리가 정말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더 정의로운 기준에 의해 평가받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인간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든 평가되어 ‘충분함’과 ‘충분하지 않음’으로 나뉘는 그 행위 자체에 폭력이 있어서인가. 이 반론이 진지해지면, 더 좋은 전환 제도를 설계하자는 이 글의 제안조차 도구화의 더 세련된 형식으로 보이게 된다.

이 반론에 대해서는 더 솔직해야 한다. 이 글은 이 반론을 무력화하지 못한다. 생산성을 기준 삼는 사회 안에 있는 한, 어떤 인간도 어느 순간 ‘충분하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될 가능성을 끌어안고 산다. 다만 이 글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이다. 우리가 그 분류를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적어도 그 분류가 인간의 존엄과 재출발 가능성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그을 수는 있다. 이것은 도구화의 종식이 아니라 도구화의 한계 설정이다. 더 큰 약속은 이 글의 능력 밖이다. 글은 자기가 풀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침묵하기보다, 풀 수 없음을 정확히 표시한 채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편이 정직하다.


제4부. 응답: 폐기하지 않는 파괴는 가능한가

보호의 대상을 다시 정의한다

제3부에서 판별 기준과 강한 반론을 통과시켰다면, 다음 단계는 그 기준을 제도의 형태로 어떻게 옮기는가이다. 이 부의 첫 절은 무엇을 보호할 것인가라는 원리적 질문에 답하고, 두 번째 절은 그 원리를 실제 장치로 어떻게 풀 것인가에 답한다. 두 절은 같은 결론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첫 절은 대상을 정의하고, 두 번째 절은 그 대상이 처음 의도와 다른 곳으로 어떻게 미끄러지는지를 본다.

창조적 파괴를 인정하는 사회는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낡은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시장이 알아서 정리하게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둘 다 부분적으로 맞고, 둘 다 쉽게 틀릴 수 있다.

모든 직업을 영원히 보호할 수는 없다. 직업은 역사적 산물이다. 어떤 직업은 기술 변화 속에서 사라지고, 어떤 직업은 이름을 바꾸며, 어떤 직업은 전혀 다른 능력을 요구하게 된다. 기업도 영원할 수 없다. 어떤 기업은 사라질 때 다른 기업의 진입을 가능케 한다. 다만 이것을 “기업이 죽어야 새 기업이 들어온다”라는 일반 명제로 굳혀서는 안 된다. 기업의 퇴출이 진입을 동반하는 것은 자본 재배치, 인력 흡수 능력, 진입 장벽, 신용 가용성이 일정 조건을 충족할 때이고, 그 조건이 무너진 사회에서는 퇴출이 그대로 빈자리로 남는다. 따라서 좀 더 정확한 표현은 다음에 가깝다.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실패한 기업의 퇴출은 새 기업의 진입을 위한 자리를 연다. 그리고 그 조건은 자동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직업과 기업이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의 생애 전체가 함께 폐기되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보호해야 할 것은 모든 직무의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보호해야 할 것은 인간의 전환 능력이다. 한 사람이 낡은 기술과 함께 늙어버렸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존엄까지 낡은 것으로 처리되어서는 안 된다.

이 원리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 적용에서는 까다롭다. 전환 능력을 보호한다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보호한다는 뜻인가. 첫째, 시간이다. 다음 자리를 찾기 전까지 견딜 수 있는 시간. 둘째, 학습 가능성이다.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익힐 수 있는 통로. 셋째, 이동 가능성이다. 지역, 업종, 직무 사이를 넘을 수 있는 자원과 정보. 넷째, 회복 가능성이다. 한 번의 실패가 생애 전체를 결정짓지 않도록 하는 안전망. 이 네 요소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전환 능력이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게 된다.

원리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원리가 좋다고 해서 그것을 옮긴 제도가 자동으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음 절은 같은 원리가 제도 설계 단계에서 어떻게 미끄러질 수 있는지를 본다.

제도는 자기 반례를 품고 설계되어야 한다

전환 능력의 네 요소를 실제 장치로 옮기면 몇 가지 익숙한 이름이 등장한다. 임금보험, 평생학습, 지역 협약, 사회보험의 이동성. 각각은 그럴듯하지만, 각각은 자기 반례를 품고 있다.

임금보험은 한 가지 장치가 될 수 있다. 쇠퇴 산업에서 새 일자리로 이동할 때 소득 하락의 일부를 일정 기간 보전한다면, 전환은 조금 덜 파괴적일 수 있다. 그러나 임금보험은 저임금 일자리로의 이동을 더 매끄럽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저임금 구조를 고착시킬 위험이 있다. 보험금이 낮은 임금을 견딜 만한 것으로 바꿔 놓으면, 고용주는 임금을 올릴 유인을 약하게 느낄 수 있다. 즉 같은 장치가 인간의 이동을 돕는 동시에 임금 구조를 누를 수 있다.

평생학습계좌는 또 다른 장치가 될 수 있다. 교육을 학교 시절의 일회성 자산으로 보지 않고, 생애 전체에 걸친 갱신 능력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학습은 평등한 자원이 아니다. 시간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학습 환경이 갖추어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인지적 피로의 여유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같은 계좌가 같은 결과를 만들지 않는다. 평생학습은 기회를 넓히는 동시에, 기존의 학습 격차를 더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지역협약은 또 어떻게 작동하는가. 산업이 사라진 지역에 개인의 이동만 요구하는 것은 공동체의 붕괴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역 단위의 재교육, 인프라, 산업 재배치가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역 재생 정책은 자주 정치적 압력에 휘둘린다. 사라져야 할 산업이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무한 연장될 수 있다. 즉 같은 정책이 한쪽에서는 공동체를 살리고, 다른 쪽에서는 낡은 지대를 보존한다.

사회보험의 이동성도 마찬가지다. 직장이 자주 바뀌고 고용 형태가 다변화되는 시대에, 보험과 연금이 특정 고용주에 묶여 있는 구조는 위험하다. 그러므로 보험을 개인 단위로 휴대 가능하게 만드는 설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휴대 가능한 보험은 동시에 고용주의 책임을 약화시키는 정당화 수단이 될 수 있다. “어차피 보험은 따라다니니까”라는 말은 사용자의 의무를 줄이는 논리로 미끄러질 수 있다.

이 모든 사례에서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어떤 제도도 완전한 면죄부가 아니다. 좋은 의도는 충분조건이 아니다. 따라서 제도는 늘 자기 반례를 품고 설계되어야 한다. 이 말은 제도를 만들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제도가 자기 반례를 품지 않으면, 제도가 실패할 때 그 실패는 다시 개인의 결함으로 돌아간다. 자기 반례를 품은 제도는 실패하더라도 실패를 자기 안에서 인지할 수 있다. 그것이 제도의 지능이다.

낡은 지대와 인간의 분리

원리(첫 절)와 장치(둘째 절)를 거쳤다면, 마지막 매듭은 단호한 분리다. 창조적 파괴에 대한 응답에서 가장 자주 흐려지는 경계는 다음이다. 낡은 지대와 그 지대 안에 묶인 인간. 이 둘은 자주 함께 묶이지만, 정책의 차원에서는 분리되어야 한다.

낡은 지대는 보호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생산성을 잃은 기업이 정치적 영향력으로 자원을 붙잡고 있다면, 그것은 안정이 아니라 미래의 약탈이다. 경쟁을 막고 진입을 막고 보조금을 사유화하는 기업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보호는 인간적 정책이 아니라 기득권의 연장이다.

하지만 그 지대 안에 묶인 인간은 다른 문제다. 한 노동자가 낡은 산업에 30년을 바쳤다는 사실은 그 산업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30년은 그 사람의 생애에서 무로 처리될 수 없다. 산업의 정당성과 인간의 생애는 같은 회계장에 있지 않다. 이 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두 가지 잘못이 발생한다. 첫째, 인간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낡은 지대를 영구화하는 잘못. 둘째, 낡은 지대를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인간까지 정리해버리는 잘못.

생계가 무너진 사람에게 “시장이 그렇게 판단했다”고 말하는 것은 설명일 수는 있어도 응답은 아니다. 설명은 원인을 밝히지만, 응답은 책임의 구조를 묻는다. 창조적 파괴를 받아들이는 사회라면, 파괴가 남기는 비용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감당할지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은 경제학 안에만 머물 수 없다. 그것은 정치의 문제이고, 연대의 문제이며, 사회가 자기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할 것인지의 문제다. 생산성이 높아졌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전환 비용을 개인에게 넘기는 사회는 결국 혁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잃는다. 사람들은 혁신을 미래의 약속으로 듣지 않고, 자기 삶을 위협하는 통보로 듣게 된다.

창조적 파괴가 지속되려면 사람들은 패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패배가 곧 생애의 폐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패한 기업은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패한 전환을 겪은 인간이 사회 바깥으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 이 경계가 무너지면 파괴는 더 이상 창조를 낳지 않는다. 그것은 원한을 낳는다.


에필로그: 질문으로 남는 것, 혹은 멈춤의 이유

이 글은 창조적 파괴를 두 층위에서 다루어 왔다. 메커니즘으로서의 창조적 파괴는 경제성장의 비밀이 아니라, 경제성장이 숨기고 싶어 하는 얼굴이다. 그것은 생활수준을 높였고, 낡은 지대를 흔들었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윤리적 은유로서의 창조적 파괴는 그 다른 얼굴이다. 그것은 직업을 무너뜨렸고, 지역을 비웠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생애가 더 이상 시장에서 읽히지 않는다는 통보를 남겼다.

우리는 이 두 얼굴을 분리해 보아야 한다. 메커니즘은 미워하기만 할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많은 빈곤을 줄였고, 인간의 능력을 확장했으며, 이전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선택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메커니즘이 작동했다는 사실로 은유의 폭력이 자동으로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숭배하는 순간 폐허는 보이지 않는다. 생산성의 빛이 너무 강하면 탈락의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

이 글이 끝까지 답하지 못한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성장 자체의 정당성이다. 탈성장의 반론은 이 글의 틀 안에서 완전히 무력화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생산성 기준 자체의 도구주의다. 더 좋은 전환 제도가 더 세련된 도구화일 수 있다는 의심은 이 글의 처방을 통과한 뒤에도 남는다. 이 두 잔여물을 봉합하지 않은 채 이 글을 끝내는 것은 무능이 아니라 정직함이다. 글은 자기가 풀 수 있는 문제와 풀 수 없는 문제를 같은 톤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파괴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때로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문제는 파괴가 어떤 조건에서 창조가 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을 어떻게 폐기하지 않을 수 있는지다. 이 질문은 성장모형만으로 닫히지 않는다. 모형은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구조를 견딜 제도와 책임을 만드는 것은 사회의 몫이다.

우리는 낡은 지대를 보호하지 않으면서도, 낡은 기술과 함께 늙어버린 인간을 버리지 않는 제도를 만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경제학의 과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과제다. 경제학은 폐허의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폐허를 함께 견딜 것인지, 약자에게 떠넘길 것인지는 우리가 만드는 규칙과 연대의 밀도에 달려 있다.

이 질문 앞에서 에세이는 멈춘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다. 너무 빠른 답이 늘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제 적어도 문제는 더 정확한 이름을 얻었다. 창조적 파괴라는 단어는 두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메커니즘으로서 그것은 성장의 조건이다. 은유로서 그것은 인간 폐기의 위험이다. 두 층위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 이 글이 자기 능력 안에서 해낼 수 있는 마지막 작업이다.

남은 것은 잔여물이다. 잔여물은 결론이 아니다. 그것은 문제가 아직 닫히지 않았다는 표시다. 다만 이제 우리는 그것을 더 정확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탈락의 제도화. 그리고 그 제도화에 맞서, 인간의 전환 능력을 폐기하지 않는 한계 설정. 이 두 문장을 같은 표 위에 올려두는 것이, 이 에세이가 도달한 자리다.


참고자료

본문에서 직접 작동하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 Joseph A.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1942. — 창조적 파괴 개념의 원전.
  • Philippe Aghion and Peter Howitt, “A Model of Growth Through Creative Destruction,” Econometrica, 1992. — 본문에서 다룬 내생적 성장모형의 정식화.
  • Philippe Aghion, Nick Bloom, Richard Blundell, Rachel Griffith, and Peter Howitt, “Competition and Innovation: An Inverted-U Relationship,”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2005. — 경쟁과 혁신의 역U자 관계.
  • Philippe Aghion, Antonin Bergeaud, Timo Boppart, Peter J. Klenow, and Huiyu Li, “Missing Growth from Creative Destruction,” American Economic Review, 2019. — 본문 제2부의 누락 성장 논의.
  • Philippe Aghion, Céline Antonin, and Simon Bunel, The Power of Creative Destruction: Economic Upheaval and the Wealth of Nations, Harvard University Press, 2021. — 창조적 파괴의 제도적 조건에 관한 종합.

본문이 흡수한 외부 반론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Daron Acemoglu and Pascual Restrepo, “Automation and New Tasks: How Technology Displaces and Reinstates Labor,”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 2019. — 자동화의 노동 대체효과에 관한 정식화. 본문 제2부의 평균 성장률 분석에 흡수.
  • David H. Autor, David Dorn, and Gordon H. Hanson, “The China Syndrome: Local Labor Market Effects of Import Competition in the United States,” American Economic Review, 2013. — 무역 충격의 지역 노동시장 장기 효과에 관한 실증. 본문 제2부에 흡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