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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을 넘어서는 법

내적 자유와 책임 있는 사유의 조건

1. 정보가 많아도 판단은 사라질 수 있다

어리석음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은 정보 부족론이다. 사람들은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 판단하고, 더 많은 정보와 더 나은 교육을 제공하면 어리석음은 줄어든다는 설명이다. 이 설명은 일정 부분 타당하다. 무지는 실제로 위험하고, 교육은 판단 능력을 키우는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정보 부족론은 한계가 있다. 사람은 정보를 몰라서만 잘못 판단하지 않는다. 충분한 자료를 접하고도 그것을 외면하거나, 불편한 사실을 사소한 것으로 밀어내거나, 자기 판단의 책임을 권위와 집단에 넘길 수 있다.

이때 무너지는 것은 정보 접근성이 아니다.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자기 판단으로 연결하는 능력이다. 어떤 사실을 접했는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그는 그 사실을 검토했는가. 반론을 들었는가. 자기 편에 불리한 정보도 같은 기준으로 다루었는가. 그 판단의 결과를 자기 이름으로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들이 사라질 때, 정보는 판단을 돕지 못한다. 오히려 이미 정해진 결론을 꾸미는 재료가 된다.

어리석음은 여기서 발생한다. 그것은 단순한 무식함보다 더 위험하다. 무식한 사람은 배울 수 있다. 그러나 판단의 소유권을 넘겨버린 사람은 배워도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정보를 자기 생각을 수정하는 계기로 삼지 않고, 기존 소속과 확신을 방어하는 재료로 사용한다. 같은 자료도 판단하려는 사람에게는 검토의 대상이 되고, 판단을 피하려는 사람에게는 변명의 도구가 된다.

따라서 이 글이 묻는 것은 지식량이 아니다. 판단의 주체가 살아 있는가다. 내가 어떤 판단을 어떤 경로로 받아들였는지 알고 있는가. 내가 의존하는 권위의 조건을 검토했는가. 내 판단을 가장 강한 반론 앞에 세울 수 있는가. 그 판단이 낳을 수 있는 결과의 범위를 생각했는가. 틀렸을 때 돌아올 절차를 마련했는가. 이 질문들 속에서 어리석음의 반대편이 보인다. 내적 자유와 책임 있는 사유는 판단의 소유권을 회복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2. 판단이 사라지는 장면

한 조직의 회의실을 생각해보자. 새 사업을 추진할지 결정하는 자리다. 상부는 이미 긍정적인 방향을 잡았다. 보고서에는 유리한 지표가 앞에 놓이고, 불리한 지표는 “추후 보완 가능”이라는 말로 뒤로 밀린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 수요 예측은 표본이 너무 작지 않습니까? 지금의 반응을 실제 구매 의사로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 순간 질문은 검토가 아니라 분위기를 깨는 행위가 된다. “지금은 속도가 중요합니다.” “너무 부정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이미 위에서 검토한 사안입니다.” “팀워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장면에서 반드시 악인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거짓말을 의도한 사람도 없을 수 있다. 그래도 중요한 변화는 이미 일어났다. 판단의 기준이 사실에서 분위기로, 논증에서 충성으로, 책임에서 절차로 이동했다. 반론은 틀렸다는 이유로 배제되지 않는다. 불편하기 때문에 밀려난다. 의심은 검토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조직에 대한 불신으로 처리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음에도 판단하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배운다.

온라인 공론장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어떤 사람은 기사를 읽기 전에 매체를 확인하고, 주장보다 발화자의 진영을 먼저 확인하며, 사실보다 자기 집단에 유리한 해석을 먼저 선택한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이미 주어진 반응 양식을 수행하고 있다. 분노는 판단의 신호가 되고, 소속감은 근거의 자리를 차지하며, 공유 횟수는 진실성의 느낌을 만든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구분이 있다. 모든 권위 의존을 판단 포기로 볼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지식을 타인의 증언과 전문가의 판단을 통해 얻는다. 과학, 의학, 법, 역사, 경제, 기술의 문제를 모두 직접 검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전문가를 믿는 행위 자체를 어리석음으로 몰아가면 글은 반지성주의로 기울어진다. 문제는 의존의 존재가 아니라 의존의 방식이다. 정당한 신뢰는 판단을 확장하고, 무책임한 위임은 판단을 중단시킨다.

의존과 위임은 다른 구조를 갖는다. 정당한 신뢰는 출처의 전문성, 방법의 공개성, 반대 증거의 존재, 검증 가능한 절차, 오류 수정의 통로를 함께 본다. 무책임한 위임은 “전문가가 말했다”, “조직이 결정했다”, “우리 편이 그렇다”,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로 검토를 끝낸다. 전자는 제한된 인간이 공동으로 지식을 형성하는 방식이고, 후자는 자기 책임을 외부에 맡기는 방식이다.

3. 본회퍼의 불편한 통찰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어리석음 논의는 이 지점에서 힘을 갖는다. 그는 어리석음을 낮은 지능이나 부족한 학식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매우 영리한 사람도 어리석을 수 있고, 지적으로 둔한 사람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구분은 어리석음의 위치를 머리에서 자유와 책임의 자리로 옮긴다.

본회퍼의 통찰이 나온 역사적 배경은 나치 독일이다. 그는 지성인, 시민, 교회, 관료가 어떻게 거대한 악의 체제에 순응했는지를 물었다. 그가 본 것은 공포만이 아니었다. 권력은 사람을 억압하는 동시에 판단하지 않아도 되는 안락함을 제공한다. 명령은 책임의 부담을 덜어주고, 구호는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며, 집단은 고립의 두려움을 줄여준다. 사람은 강제로만 복종하지 않는다. 때로는 복종이 주는 편안함 때문에 자기 판단을 내려놓는다.

본회퍼가 「10년 후」에서 말한 자유로운 책임 행위는 이 맥락에서 중요해진다. 그는 추상적 원칙만 붙드는 태도와 성공 앞에 순응하는 태도 모두를 경계했다. 책임은 실제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기 행동이 다음 세대와 공동 세계에 어떤 결과를 남길지 묻는 태도다. 책임 있는 사유는 내면의 순수함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 안에서 자기 판단이 낳는 결과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어리석음이 특히 위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악한 의도는 폭로될 수 있고, 이해관계는 추적될 수 있으며, 폭력은 고발될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음은 자신을 악으로 느끼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충성스럽고 현실적이며 공동체를 위해 행동한다고 믿는다. 반박은 그의 판단에 대한 비판으로 들리지 않는다. 자기 정체성과 소속에 대한 공격으로 들린다. 사실이 제시되어도 그는 그것을 검토하기보다 자신의 소속을 방어한다.

이 통찰은 타인을 조롱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더 불편한 질문을 요구한다. 나는 언제 판단을 넘기는가. 나는 어떤 권위 앞에서 편안함을 느끼는가. 나는 어떤 집단의 언어를 내 생각처럼 반복하는가. 나는 어떤 사실을 알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밀어내는가. 본회퍼를 읽는 일이 의미 있으려면, 이 질문은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야 한다.

4. 내적 자유의 작동 방식

인간은 혼자서 세계를 발명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언어, 교육, 가족, 계급, 직업, 미디어, 종교, 정치적 소속, 시대 분위기의 영향을 받는다. “오직 스스로 생각하라”는 구호가 쉽게 공허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이미 주어진 말과 개념과 제도 속에서 생각한다. 완전히 독립된 사고라는 이상은 현실의 인간 조건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그래도 자유의 자리는 남아 있다. 내적 자유는 자신이 어떤 영향 아래에서 생각하는지 의식하고, 그 영향 중 무엇을 자기 판단으로 승인할지 결정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절대적 자율성이 아니라 반성적 자율성이다. 자기 안에 들어온 목소리를 구별하고, 그 목소리가 어디서 왔는지 묻고, 그것을 반복할지 수정할지 거부할지 결정하는 힘이다.

이 정의는 두 가지 오해를 막는다. 첫째, 정당한 신뢰를 어리석음으로 오해하지 않게 한다. 우리는 전문가와 타인의 증언에 의존해야 한다. 내적 자유를 가진 사람은 의존을 부정하지 않고, 위임의 조건을 묻는다. 둘째, 책임을 무한 책임으로 오해하지 않게 한다. 인간은 모든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모든 조건을 통제할 수 없다. 책임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떠안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알 수 있었고, 물을 수 있었고, 멈출 수 있었고, 수정할 수 있었던 범위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제 판단 회복의 절차가 나온다. 빌려온 판단을 반복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첫 작업은 출처 추적이다. 반론을 정체성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필요한 둘째 작업은 반론 통과다. 책임을 권위와 절차에 넘기는 사람에게 필요한 셋째 작업은 책임 범위의 설정이다. 오류 수정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넷째 작업은 복구 절차다. 이 순서는 생활 조언의 배열이 아니다. 판단이 다시 자기 것이 되는 과정이다.

5. 첫 번째 절차: 출처를 추적하라

책임 있는 사유의 첫 단계는 자기 생각의 출처를 묻는 것이다. 나는 왜 이 말을 하고 있는가. 이 판단은 내가 검토해서 얻은 결론인가, 내가 속한 집단에서 반복되는 언어인가. 내가 분노하는 이유는 사실 때문인가, 내 편이 공격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인가. 내가 확신하는 이유는 근거가 강해서인가, 의심하면 소속이 흔들리기 때문인가.

출처 추적은 자기 생각을 무조건 의심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정말로 지킬 만한 판단과 단순히 물려받은 반응을 구별하기 위한 절차다. 어떤 믿음은 검토의 결과보다 반복 노출의 결과에 가깝다. 어떤 확신은 논증보다 분위기에서 온다. 어떤 분노는 윤리적 감각보다 집단 감정의 전염에서 온다. 출처를 추적하지 않으면 우리는 빌려온 말을 자기 생각으로 착각한다.

감정 전염은 집단 안에서 특정 감정이 판단의 신호처럼 작동하는 현상이다. 모두가 분노하면 나도 분노해야 할 것 같고, 모두가 조롱하면 나도 조롱해야 할 것 같으며, 모두가 침묵하면 나도 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출처 추적은 감정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감정과 판단의 관계를 분리해보는 작업이다. 나는 분노할 수 있다. 다만 그 분노가 무엇을 보게 하고 무엇을 가리게 하는지는 물어야 한다.

출처를 추적하는 사람은 권위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권위를 최종 판단의 대체물로 삼지 않는다. “누가 말했는가”와 “왜 참인가”를 구분한다. 신뢰할 만한 사람이 말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단서가 곧 결론은 아니다. 싫어하는 사람이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다. 출처는 판단의 출발점이지 종착지가 아니다.

6. 두 번째 절차: 가장 강한 반론을 통과시켜라

두 번째 단계는 자기 판단을 반론 앞에 세우는 것이다. 생각은 자기 안에서 반복될 때 단단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가장 강한 반론을 통과할 때 책임질 수 있는 형태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반론은 아무 반대 의견이나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내 주장에 실제로 부담을 주는 반론, 특히 내 전제 자체를 흔드는 반론을 피하지 않는 일이다.

이 글이 통과해야 할 가장 강한 반론은 전문가 의존의 문제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전문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과학, 의학, 법, 경제, 기술의 문제를 일반 시민이 모두 직접 검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많은 지식은 타인의 증언과 전문가 집단의 검증 절차를 통해 형성된다. 전문가에게 기대는 행위 자체를 판단 포기로 간주하면, 내적 자유의 주장은 쉽게 반전문가주의나 지적 오만으로 변한다.

이 반론은 받아들여야 한다. 문제는 전문가 의존의 여부가 아니라 의존의 조건이다. 내가 직접 검증할 수 없는 영역에서 더 나은 판단을 하기 위해 신뢰할 만한 지식 생산 절차에 기대는 것은 합리적이다. 의존은 인간 인식의 약점을 보완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위험은 권위자의 말이 검토의 끝이 될 때 생긴다. “전문가가 말했다”는 문장이 책임을 중단시키는 순간, 의존은 합리적 위임에서 판단의 외주화로 바뀐다.

더 어려운 상황은 전문가들이 서로 충돌할 때다. 비전문가는 어느 쪽이 맞는지 직접 판정할 능력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아무 쪽이나 고르거나 자기 취향에 맞는 전문가만 선택할 수도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은 결론의 직접 판정이 아니라 신뢰 조건의 비교다. 해당 전문가가 실제로 그 세부 영역의 전문성을 갖고 있는가. 주장의 근거와 방법이 공개되어 있는가. 같은 분야의 동료 검토나 반론 절차를 통과했는가. 이해관계나 정치적·경제적 유인이 판단을 왜곡할 가능성은 없는가. 오류가 드러났을 때 수정하는 제도와 태도가 있는가.

이 기준은 비전문가를 전문가로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 권위에나 끌려가지 않게 한다. 전문가 간 불일치 상황에서 시민이 해야 할 일은 최종 진리의 직접 판정이 아니다. 더 공개적이고, 반박 가능하며, 수정 가능한 지식 생산 절차를 가려내는 일이다. 내적 자유의 현실적 형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전문가에게 기대면서도 판단의 최종 책임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책임 있는 사유는 좋은 권위와 나쁜 권위를 구분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권위를 무조건 부정하는 사람도 어리석어질 수 있고,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도 어리석어질 수 있다. 문제는 권위의 존재가 아니다. 권위와 맺는 관계다. 정당한 권위는 판단을 돕고, 절대화된 권위는 판단을 대신한다.

7. 세 번째 절차: 책임의 범위를 정하라

세 번째 단계는 판단의 결과를 감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감당한다는 말은 무한 책임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든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없으며,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 결과가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체 책임을 한 사람에게 돌리면 책임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희생양 만들기가 된다.

책임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첫째, 예측 가능성이다. 그 결과가 당시의 정보와 맥락에서 합리적으로 예상 가능한 범위였는가. 둘째, 통제 가능성이다. 그 사람이 실제로 멈추거나 질문하거나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가. 셋째, 인식 가능성이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알 수 있었거나 알아야 했던 사실을 외면했는가.

이 기준은 책임을 약화하지 않는다. 책임을 더 정확하게 만든다.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고 알 수도 없었던 결과까지 모두 개인에게 돌리는 태도는 부당하다. 반대로 충분히 물을 수 있었고, 위험 신호가 있었고,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데도 “몰랐다”고 말하는 태도는 책임 회피다. 책임 있는 사유는 이 둘을 구분한다.

조직의 예를 다시 보자. 어떤 실무자가 모든 자료에 접근할 수 없었고, 결정권도 없었으며, 위험을 예측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면 그에게 최종 결과 전체를 떠넘기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나 그가 명백한 조작 가능성을 보았고, 질문할 수 있었고, 기록을 남길 수 있었고, 위험을 축소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도 침묵했다면 책임은 발생한다. 책임은 직급의 크기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인식 가능성과 개입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본회퍼의 책임 개념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방관자의 순수한 비판과 기회주의적 순응을 모두 충분한 태도로 보지 않았다. 책임은 세계 밖에서 깨끗하게 서 있는 일이 아니라, 불완전한 조건 속에서도 내가 무엇을 알 수 있었고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 묻는 태도다. 내적 자유는 자기 말과 행동이 세계에 남기는 흔적을 감당하는 자유다. 그 감당은 무한한 죄책감보다 구체적 기준을 가진 응답 가능성에 가깝다.

8. 네 번째 절차: 오류 이후의 복구를 설계하라

네 번째 단계는 오류 이후의 복구다. 책임 있는 사유를 가진 사람도 틀린다. 더 중요한 차이는 틀린 뒤에 드러난다. 어떤 사람은 오류를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방어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통해 판단의 경로를 다시 점검한다. 어리석음은 오류 자체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오류를 수정할 가능성을 닫을 때 굳어진다.

수정 가능성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절차의 문제다. “나는 열린 사람이다”라는 자기 이미지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증거가 나오면 입장을 바꿀 것인지, 누구의 반론을 신뢰할 것인지, 어떤 기록을 남길 것인지, 자기 집단이 틀렸을 때 어떤 방식으로 거리를 둘 것인지가 필요하다. 절차 없는 개방성은 기분에 따라 쉽게 닫힌다.

오류를 인정하는 일은 단순한 논리 수정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이미지 일부를 내려놓는 일이다. 많은 사람은 틀렸다는 사실보다 틀렸음을 인정하는 사회적 비용을 더 두려워한다. 어리석음은 이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책임 있는 사유는 오류 인정의 비용을 낮추는 습관과 환경을 필요로 한다.

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사과와 수정의 문법이다. “그때의 내 판단은 이 근거에 기대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 부분이 틀렸다고 본다.” “내가 놓친 사실은 이것이다.” “그 판단으로 인해 이런 결과가 생겼다면, 이 방식으로 수정하겠다.” 이런 문장은 약함의 표시가 아니다. 자기 판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다. 자기 생각을 소유한 사람만이 자기 생각을 수정할 수 있다.

9. 공론장과 제도적 조건

내적 자유를 말한다고 해서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개인은 사회적 조건 속에서 생각한다. 공론장은 단순히 사람들이 의견을 말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말할 가치가 있는지, 어떤 반론이 정당한지, 어떤 오류가 수정 가능한지, 누가 신뢰받고 누가 조롱당하는지를 정하는 의사소통의 구조다. 이 구조가 망가지면 개인의 판단 능력도 약해진다.

제도적 조건은 개인의 용기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게 만드는 장치다. 반론을 말한 사람이 불이익을 받지 않는 절차, 중요한 결정의 근거가 기록되는 방식, 이해관계 충돌을 공개하는 규칙, 전문가 판단을 검증하는 동료 평가, 오류를 수정해도 영구 낙인이 되지 않는 문화가 여기에 속한다. 이런 조건이 없으면 사람들은 옳은 판단을 몰라서 침묵하지 않는다. 판단을 말한 뒤의 비용이 너무 커서 침묵한다.

모든 결정에 끝없는 반론을 요구할 수는 없다. 일상적이고 사소한 결정에는 속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대한 위험이 걸린 결정, 되돌리기 어려운 결정, 약자에게 큰 부담을 주는 결정, 공적 자원이 투입되는 결정에서는 반론의 부재가 위험을 키울 수 있다. 이때 반론은 비효율이 아니다. 실패를 미리 드러내는 안전장치다.

권위도 마찬가지다. 권위는 지식 전달과 조정의 조건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권위가 이유 제시와 책임 경로를 차단할 때 생긴다. 권위가 “왜 그런가”라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고, 실패했을 때 “누가 어떤 근거로 판단했는가”를 추적하지 못하게 만들면, 권위는 판단을 돕는 장치에서 면책을 제공하는 장치로 변한다.

책임 있는 사회는 개인에게 용기만 요구하지 않는다. 개인이 용기를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반론이 배신으로 처리되는 곳에서 내적 자유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오류 수정이 조롱이 되는 곳에서 사람들은 끝까지 틀리지 않은 척한다. 이유가 기록되지 않는 곳에서 실패는 반복된다. 어리석음을 넘어서는 일은 개인 윤리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공적 제도의 문제다.

10. 어리석음을 넘어선다는 것

어리석음을 넘어서는 일은 지식량을 늘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정보, 교육, 전문가의 조언은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판단하는 주체가 살아 있을 때만 힘을 갖는다. 판단의 주체는 네 가지 절차를 통해 회복된다. 내 생각의 출처를 추적한다. 가장 강한 반론을 통과시킨다. 예측 가능성·통제 가능성·인식 가능성의 기준 안에서 결과를 감당한다. 틀렸을 때 돌아올 수 있는 복구 절차를 마련한다.

본회퍼의 통찰이 여전히 불편한 이유는 그가 어리석음을 타인에 대한 조롱으로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논의는 “저들은 멍청하다”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는 언제 판단을 넘기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이 질문을 피하면 본회퍼를 읽는 일조차 또 하나의 진영 언어가 된다. 어리석음 비판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될 때만 유효하다.

현대적 어리석음은 정보 과잉 속에서도 자란다. 더 많은 자료를 소비하면서 더 깊이 의존하고, 더 많은 의견을 말하면서 더 적게 판단하며, 더 많은 전문가를 인용하면서 더 적게 책임질 수 있다. 이때 지식은 해방의 재료가 되지 못한다. 복종의 장식이 된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판단이 깊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판단의 소유권이 사라지면 정보는 오히려 더 정교한 회피를 가능하게 한다.

내적 자유는 의존의 조건을 알고, 권위의 범위를 묻고, 반론을 견디며, 자기 판단의 결과를 구체적으로 감당하는 능력이다. 책임 있는 사유는 그 자유가 세계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어리석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천재가 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빌려 쓰는 판단의 출처와 결과를 자기 이름으로 감당하는 일이다.

참고자료

  • Dietrich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Dietrich Bonhoeffer Works, Vol. 8, Fortress Press. 특히 「After Ten Years」.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pistemological Problems of Testimony.”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The Epistemic Condition for Moral Responsibi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