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자기 세계를 닫고 그 안에서 타인을 소모하는가
질서, 불안, 대상화, 제도, 그리고 윤리적 균열에 관한 철학적 고찰
문제 제기
인간은 어디에 있든 자기 세계를 하나의 폐쇄적 질서로 만들고, 그 내부에서 타인을 소모하는 경향이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비관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악함을 단정하는 명제가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삶이 어떤 방식으로 안정과 의미를 획득하는지, 그리고 그 안정과 의미가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이 글의 핵심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혼란 앞에서 질서를 구성하려 하며, 그 질서는 경계와 위계를 낳고, 그 위계는 타인을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기능적 요소로 환원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최종 본질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 질서의 폭력성을 자각하고, 그 폐쇄를 흔들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제는 질서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 질서의 절대화에 있다.
이 명제를 논증하기 위해 먼저 인간이 왜 폐쇄적 질서를 만들어내는지 살피고, 다음으로 그러한 질서가 어떻게 타인을 소모하는 구조로 변하는지 분석한다. 이어서 그 구조가 개인의 심리를 넘어 집단과 제도의 차원에서 어떻게 증폭되는지, 그리고 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지 검토한 뒤, 마지막으로 이 구조를 넘어설 가능성의 조건을 탐색한다.
1. 인간은 왜 세계를 닫으려 하는가
1-1. 불확실성은 존재론적 위협이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자유를 느끼기보다 먼저 불안을 느낀다. 세계가 너무 열려 있으면, 무엇이 옳은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나인지, 무엇이 안전한지 결정할 기준이 사라진다. 따라서 인간은 삶을 지속하기 위해 세계를 정리한다. 이 정리는 단순한 인식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축소이자, 감당 가능한 크기로 현실을 접는 행위다.
홉스는 자연상태를 공포와 상호 불신의 조건으로 묘사했다. 그의 설명이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사유실험이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통찰은 남는다. 인간은 무질서 그 자체보다 무질서가 언제 폭력으로 전환될지 모르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자유의 일부를 넘겨주고, 분산된 판단을 하나의 질서로 수렴시킨다. 이 점에서 질서는 사치가 아니라 불안을 제어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첫 번째 전환이 일어난다. 불안을 줄이기 위해 구성된 질서는 곧 자기보존을 목표로 삼는다. 처음에는 불안을 다루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 나중에는 그 자체의 존속을 위해 사람들을 배치하는 구조가 된다. 질서는 인간을 위해 생겨났지만, 어느 순간 인간이 질서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뒤집힌다. 이 전도는 질서의 우연한 오작동이 아니다. 질서가 불안의 산물인 한, 질서는 자기 존속의 실패를 곧 불안의 복귀로 해석하게 되며, 따라서 자기 유지에 점점 더 집착하게 된다.
1-2. 질서는 해석의 체계이자 배제의 체계다
질서는 사물을 배열하는 동시에,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인지 결정한다. 하나의 질서가 성립한다는 것은 안과 밖, 정상과 비정상, 유용한 자와 부담스러운 자,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이 생긴다는 뜻이다. 즉 질서는 단순히 혼란을 줄이는 방식이 아니라, 현실을 가치적으로 분할하는 방식이다.
푸코가 규율권력을 분석하며 보여준 것은, 근대적 제도가 단지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관찰 가능하고 분류 가능하며 교정 가능한 대상으로 구성한다는 점이었다. 판옵티콘의 원리는 감시 장치의 원리이기 이전에, 사람을 지속적으로 가시화하고 비교 가능한 단위로 만드는 원리다. 여기서 인간은 살아 있는 타자라기보다 관리 가능한 사례가 된다.
그렇다면 질서는 왜 필연적으로 폐쇄를 향한 경향을 가지는가. 이것은 질서의 정의 자체에서 따라 나온다기보다, 질서가 불안에 대한 반응으로 형성되는 한에서 생기는 경향이다. 열린 질서는 자기 경계의 불확정성을 용인해야 하는데, 이 불확정성은 질서가 제거하려 했던 바로 그 불안을 다시 불러온다. 따라서 불안에 의해 추동된 질서일수록, 자기 동일성을 방어하기 위해 타자를 외부화하거나 내부적으로 길들이려는 힘이 강해진다.
2. 폐쇄적 질서는 어떻게 타인을 소모하는가
2-1. 타인은 가장 먼저 대상으로 번역된다
폐쇄적 질서가 형성되면, 타인은 더 이상 예측 불가능한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질서 내부에서 해석 가능한 항목이 된다. 부버의 구분을 빌리면, 살아 있는 관계는 '나-너'의 차원에서 시작되지만, 일상적 질서는 끊임없이 타인을 '나-그것'의 차원으로 미끄러뜨린다. 타인은 대화의 상대라기보다 사용, 평가, 분류, 기대, 소비의 대상으로 변한다.
레비나스는 이 지점을 더 근본적으로 파고든다. 그에게 타자는 나의 인식 능력 안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존재다. 타자의 얼굴은 나의 자유와 자기중심성에 대한 문제 제기로서 도래한다. 내가 타자를 나의 범주로 해석하고 나의 서사 안에 위치시키는 순간, 나는 이미 타자의 타자성을 지우고 있다. 타인을 소모한다는 것은 단지 착취한다는 뜻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타인이 내 질서를 넘어서는 존재라는 사실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가 느끼고 저항하고 해석하며 나와 다른 세계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내 목적과 서사에 맞는 형식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너스바움이 정리한 대상화의 분석은 이 환원이 취하는 구체적 양식을 보여준다. 타인을 수단으로만 대하고, 자율성을 부정하고, 대체 가능한 존재로 취급하며, 침해 가능하고 소유 가능한 것으로 보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를 하나의 사물처럼 다루고 있다. 중요한 점은 대상화가 반드시 노골적 폭력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 보살핌, 조직 충성, 교육, 효율성, 심지어 정의의 이름으로도 대상화는 일어날 수 있다.
2-2. 소모는 악의라기보다 구조적 편의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경우 인간이 의식적 악의를 품고 타인을 소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타인 소모는 흔히 효율, 책임, 질서, 보호, 도덕이라는 명분 속에서 작동한다. 반두라가 분석한 도덕적 이탈 메커니즘은 바로 이 과정을 설명한다. 인간은 해로운 행위를 더 높은 목적과 연결해 정당화하고, 책임을 분산시키며, 피해를 축소하고, 피해자를 비인간화함으로써 자기 검열을 해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나는 나쁜 일을 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은 채 충분히 잔혹해질 수 있다. 공동체를 지킨다고 생각하거나, 원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더 큰 선을 위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거나, 명령을 수행할 뿐이라고 생각할 때, 인간은 오히려 더 위험해진다.
이 구조에서는 폭력이 감정적 흥분보다 인지적 정돈의 형태를 띤다. 타인을 해치는 행위가 충동이 아니라 해석 체계의 산물로 수행되는 것이다.
2-3. 비인간화의 두 차원
해슬럼의 비인간화 연구는 이 논의에 중요한 교정을 더한다. 비인간화는 상대를 동물처럼 취급하는 수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타인을 기계나 자동 장치처럼, 즉 차갑고 감정 없고 내면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것 역시 비인간화다. 해슬럼의 구분에 따르면, 인간 고유의 특성을 부정하는 동물적 비인간화와, 인간 본성의 깊이를 부정하는 기계적 비인간화가 구별된다. 전자가 역겨움과 배제의 감정을 동반한다면, 후자는 무관심과 냉담을 통해 작동한다.
이 구분은 현대 사회에서 특히 중요하다. 오늘날 타인 소모는 고전적 폭력처럼 노골적으로만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숫자, 성과, 프로필, 알고리즘적 입력값, 행정적 케이스로 다루는 것도 기계적 비인간화에 해당한다. 해고 통보의 표준 문구, 복지 배제의 행정 절차, 온라인 플랫폼의 추천 논리, 평가표와 지표 중심의 조직 문화는 때로 누구도 직접 분노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를 소모한다. 이런 이유로 문명화된 질서가 야만의 반대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많은 경우 문명은 야만을 더 정교하고 비가시적인 형식으로 운영한다.
3. 개인의 심리를 넘어서: 집단과 제도의 증폭
3-1. 집단은 폐쇄를 증폭하고, 행위를 탈주체화한다
인간이 자기 세계를 닫는 방식은 개인 심리의 차원을 넘어서 집단적 차원에서 증폭된다. 애시의 동조 실험은 명백히 틀린 판단 앞에서도 집단 압력이 개인의 판단을 흔든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밀그램의 복종 실험은 권위의 명령 앞에서 개인의 도덕적 거부감이 얼마나 쉽게 유보될 수 있는지를 드러냈다. 두 실험 모두 이후 방법론적 비판을 받았다. 애시 실험은 효과 크기의 과장 문제가, 밀그램 실험은 참가자 선택의 편향성과 실험 맥락의 인위성이 지적되었다. 그럼에도 여기서 한 가지 구조적 통찰은 견고하게 남는다. 사람은 혼자 악해지기보다 구조 속에서 악을 평범하게 수행한다.
이때 집단이 개인의 폭력을 단순히 증폭한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집단이 개인에게 자기 행위를 자기 것으로 느끼지 않게 만드는 장치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역할, 직무, 소속, 절차, 규정, 관행은 행위를 탈주체화한다. 그 결과 사람은 "내가 했다"보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도덕적 약점이라기보다, 집단적 질서가 제공하는 인지적 환경의 효과다.
3-2. 제도는 소모를 익명화하고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고프먼이 총체적 제도에서 관찰한 것은 제도가 사람의 정체성을 벗겨내고 재조립하는 방식이었다. 개인은 이름, 습관, 사적 시간, 선택권을 잃고 제도의 리듬 속에 편입된다. 이 과정은 감옥이나 수용소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학교, 군대, 병원, 회사, 플랫폼, 관료제 등도 각자의 방식으로 인간을 표준화하고 역할화하며 측정 가능한 존재로 재구성한다. 이때 타인을 소모하는 행위는 더 이상 명시적 악행이 아니다. 그것은 업무 효율, 성과 관리, 위험 통제, 품질 유지, 조직 문화라는 이름으로 정상화된다.
아렌트가 전체주의를 분석하며 드러낸 핵심은, 폭력이 단지 증오의 폭발이 아니라 사유 없는 수행, 즉 생각하지 않음의 행정화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바우만 역시 홀로코스트를 근대의 예외적 일탈이라기보다, 산업적 합리성과 관료적 분업이 인간 제거를 수행 가능하게 만든 사건으로 읽었다. 두 분석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바는 분명하다. 타인 소모는 종종 비정상적 악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상적인 질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결과다. 질서는 폭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잘 설계된 질서는 폭력을 감정이 아니라 절차의 형태로 변환시킨다.
3-3. 내부 결속을 위한 외부 희생양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은 이 구조에 또 다른 차원을 추가한다. 공동체 내부의 긴장과 경쟁이 높아질수록, 집단은 복잡한 갈등의 원인을 한 인물이나 한 집단에 집중시키려 한다. 그러면 복잡성은 단순화되고 공동체는 잠시 통합된다. 이 메커니즘의 핵심적 위험은, 희생양이 실제로 문제의 원인이어서가 아니라 문제를 설명하기에 편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선택된다는 점이다. 내부의 균열을 직면하는 대신, 외부의 타자를 제거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폐쇄적 질서는 타인을 단순히 무시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기 안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타인을 소모하고 배제한다.
4. 왜 폐쇄적 질서는 스스로를 재생산하는가
앞선 장들이 폐쇄적 질서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타인을 소모하는지를 보여주었다면,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이 구조가 해체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지를 묻는다. 폐쇄가 단순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고 강화되는 데는 고유한 메커니즘이 있다.
4-1. 인정의 비대칭과 지배의 재생산
헤겔의 주인과 노예 변증법은 이 재생산 메커니즘의 한 원형을 보여준다. 두 의식이 서로를 인정하려 할 때, 인정은 대칭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쪽은 자기 생명을 건 투쟁에서 승리하여 주인이 되고, 다른 한쪽은 복종하여 노예가 된다. 그러나 주인의 인정은 자유로운 타자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자로부터 온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공허하다. 반면 노예는 노동을 통해 세계를 형성하면서 역설적으로 자기 의식을 획득한다. 헤겔이 보여준 것은 인정의 비대칭이 그 자체로 불안정하다는 점이지만, 현실의 사회적 질서에서 이 비대칭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자는 자기 질서를 자연적 위계로 고정하려 하고, 그럼으로써 인정의 비대칭을 재생산한다.
프라토와 시다니우스의 사회지배성향 연구는 이 구조가 심리적 차원에서도 자기 유지 기제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지배성향이 높은 개인과 집단은 집단 간 위계를 정당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인식하며, 위계를 강화하는 정책과 이데올로기를 선호하고 위계를 약화하는 시도에 저항한다. 이것은 폐쇄적 질서가 단지 외부 조건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질서 내부 구성원의 심리적 투자에 의해서도 유지됨을 의미한다.
4-2. 자기 정당화의 순환
폐쇄적 질서가 위험한 더 본질적인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를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하나의 질서가 자기보존에 성공할수록, 그 질서는 점점 더 자신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며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원래 세상은 이런 것이라는 말, 원래 사람은 경쟁한다는 말, 원래 강한 질서 없이는 다 무너진다는 말은 단순한 기술적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현존하는 권력 배치를 자연의 질서처럼 보이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언어다.
페팃의 공화주의적 자유 개념은 이 구조의 정치적 함의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페팃에 따르면, 자유의 반대는 단지 간섭이 아니라 지배, 즉 임의적 권력이 행사될 수 있는 상태 자체다. 현재 간섭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 대해 임의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후자는 이미 지배 상태에 놓여 있다. 폐쇄적 질서는 타인을 바로 이 상태에 둔다. 타인은 언제든 해석되고, 분류되고, 배제되고, 동원될 수 있으며, 이 위험은 구체적 폭력이 발생하지 않은 순간에도 이미 현실이다. 그리고 이 지배 상태 자체가 자기 정당화의 순환을 강화한다. 지배받는 자는 저항할 자원이 줄어들고, 지배하는 질서는 저항의 부재를 동의의 증거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4-3. 폐쇄적 질서는 내부 구성원도 소모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폐쇄적 질서는 외부자만 해치는 것이 아니라 내부자도 소모한다. 왜냐하면 타인을 기능으로 환원하는 질서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기능으로 환원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기 세계를 절대화한 개인이나 조직은 결국 쓸모 있어야만 가치가 있다는 논리, 역할을 수행하는 만큼만 존재한다는 논리, 성과를 내지 못하면 제거 가능하다는 논리를 내부에도 적용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타인 소모와 자기 소모는 연결된다. 타인을 수단으로만 보는 세계는 결국 자신도 수단으로만 본다. 외부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질서는 내부자에게도 조건부 존엄만을 허락한다. 이것은 폐쇄적 질서의 가장 역설적인 특성이다. 그것은 내부의 안전과 안정을 약속하며 구성원을 끌어들이지만, 실제로는 내부자에게도 도구적 존재로서의 자리만을 허용한다.
5. 반론 검토: 모든 질서는 폭력인가
5-1. 질서 없는 사회라는 불가능
이쯤에서 정면으로 다루어야 할 반론이 있다. 질서가 없다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고, 역할 분담과 제도 운영이 없다면 사회는 곧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렇다면 질서를 문제 삼는 것은 순진한 낭만주의 아닌가.
이 반론은 부분적으로 옳다. 질서 없는 사회는 없으며, 인간은 질서 없이는 살 수 없다. 이 글의 논증은 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 문제는 질서를 만들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질서가 타인을 소모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가라는 물음이다.
5-2. 폐쇄적 질서와 열린 질서를 구분하는 조건
모든 질서가 동일한 정도로 폐쇄적이지는 않다. 민주적 제도가 권위주의적 제도보다 타인 소모의 경향이 약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질서가 폭력적으로 변하는 데에는 식별 가능한 구조적 조건이 있다.
첫째, 자기 수정 가능성의 상실이다. 질서가 자기 규칙의 오류나 한계를 인정하고 수정할 수 있는 절차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규칙에 대한 의문 자체를 배반으로 취급하는가. 둘째, 발언권의 박탈이다. 질서의 영향을 받는 자가 그 질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리가 보장되어 있는가, 아니면 타자는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존재로 구성되어 있는가. 셋째, 목적의 전도다. 규칙의 목적이 그 안의 인간에게 있는가, 아니면 체계 자체의 유지로 바뀌어 있는가. 넷째, 고통의 은폐다. 질서가 산출하는 피해와 고통이 가시화되고 있는가, 아니면 효율, 성과, 불가피성 같은 기능적 언어로 덮여 있는가.
이 네 가지 조건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들이 폐쇄의 정도를 결정하는 변수이기 때문이다. 질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을 때 질서는 폐쇄를 향해 기울어진다. 반대로 이 조건들이 제도적으로 보장될 때, 질서는 자기 폭력성을 제한할 수 있다.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논증한 바와 같이, 질서에 내재하는 폐쇄의 경향 자체는 인간의 인지적, 심리적 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그것을 영구적으로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6. 균열의 가능성: 질서를 다시 여는 조건
6-1. 탈출은 질서의 비절대화에서 시작된다
인간이 자기 세계를 닫고 타인을 소모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탈출은 순수한 선의나 추상적 사랑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훨씬 더 불편한 작업에서 시작된다. 내가 옳다고 믿는 질서가 누구를 침묵시키고 누구를 도구화하고 있는지를 묻는 작업이다.
윤리는 흔히 선한 의도에서 시작한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자기 의도의 한계를 의심하는 데서 더 자주 시작된다. 내가 누군가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를 이미 내 이해의 틀에 가둔 것일 수 있고, 내가 누군가를 보호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를 통제하고 있는 것일 수 있으며, 내가 공동체를 지킨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단지 그 공동체의 폐쇄성을 강화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윤리적 전환의 첫걸음은 더 많은 확신이 아니라 자기 확신의 균열이다.
6-2. 대안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소화하지 않는 것이다
부버와 레비나스가 각기 다른 언어로 보여준 것은,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는 상대를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완결시키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타자가 끝내 내 서사에 다 흡수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의 출발점은 타자에 대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타자가 나의 지식을 초과한다는 사실 앞에서의 응답 가능성이다.
이것은 실천적으로 다음과 같은 태도를 요구한다. 타인을 설명하기 전에 그가 스스로 말할 자리를 보장하는 것, 효율보다 존엄을 우선하는 절차를 설계하는 것, 집단의 통합보다 이견의 존재를 더 건강한 신호로 보는 것, 그리고 '우리'라는 말이 누구를 바깥으로 밀어내는지 반복적으로 점검하는 것이다.
애시의 실험이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처럼, 단 한 명의 이견만으로도 집단의 동조 압력은 크게 약화될 수 있다. 즉 열린 질서는 완전한 합의가 아니라, 반대가 가능하고 반대가 체계의 붕괴로 간주되지 않는 상태에서 형성된다.
6-3. 윤리는 제도 설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의 선의에만 기대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반두라의 분석이 보여주듯 도덕적 이탈은 선한 사람에게서도 작동하며, 애시와 밀그램의 실험이 보여주듯 구조적 압력은 개인의 도덕적 판단을 쉽게 유보시킨다. 폐쇄적 질서가 개인을 넘어 제도적으로 작동한다면, 대항 역시 제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페팃이 강조한 바와 같이,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간섭의 부재만이 아니라 지배의 부재가 제도적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감시받는 자에게 이의제기 권한을 주고, 평가받는 자에게 설명 요구권을 부여하며, 소수자의 목소리가 형식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반영되도록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이 과제가 더욱 긴급해진다. 알고리즘적 분류, 자동화된 의사결정, 플랫폼의 추천 체계는 인간을 데이터 포인트로 환원하면서도 그 과정의 대부분을 비가시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체계에서 지배에 대한 이의제기는 지배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어려워진다.
윤리 없는 제도는 차갑고, 제도 없는 윤리는 무력하다. 따라서 타인 소모를 줄이려면, 개인의 도덕성뿐 아니라 권력의 비대칭을 수정하는 장치, 투명성과 항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절차, 그리고 대체 불가능한 개별자를 보존하는 언어와 제도가 필요하다.
7. 결론
인간은 어디에 있든 자기 세계를 폐쇄적 질서로 만들 가능성을 지닌다. 이는 인간이 악해서만이 아니라,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예측 가능성을 원하며,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생존의 구조가 타인을 대상화하고 비인간화하며 제도적 절차를 통해 소모하는 방향으로 쉽게 미끄러진다. 이 미끄러짐은 헤겔이 보여준 인정의 비대칭, 레비나스가 지적한 타자의 포섭, 아렌트와 바우만이 분석한 사유 없는 수행, 지라르가 드러낸 희생양의 논리에 의해 집단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증폭되며, 자기 정당화의 순환을 통해 재생산된다.
따라서 타인 소모는 일부 악인이 저지르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질서를 만드는 바로 그 능력 안에 잠재해 있다. 가정, 학교, 회사, 국가, 이념, 공동체, 심지어 사랑과 우정까지도 이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고 결론이 냉소일 필요는 없다. 이 글이 논증하고자 한 것은 인간의 불가피한 악이 아니라, 폐쇄의 경향과 그 경향에 대한 저항 가능성이 동시에 인간의 조건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가능성은 완벽한 질서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자기가 만든 질서가 닫히기 시작하는 순간을 알아차리고, 그 질서에 균열을 내는 데 있다. 윤리는 폐쇄를 완성하는 기술이 아니라, 폐쇄가 타자를 집어삼키기 직전에 멈추는 능력이며, 그 멈춤을 개인의 의지에만 맡기지 않고 제도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결국 인간다운 사회는 질서가 없는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질서가 스스로를 절대화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는 사회이며, 그 방해가 단순한 저항의 감상이 아니라 이의제기의 권리, 투명성의 절차, 타자의 발언권이라는 제도적 형식을 갖춘 사회다. 인간의 과제는 질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타인을 소모하지 못하도록 끝없이 다시 열어 두는 것이다.
참고자료
철학 및 사회이론
- Thomas Hobbes, Leviathan (1651).
- G.W.F. Hegel, Phenomenology of Spirit (1807), 특히 주인과 노예 변증법(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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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chel Foucault, Discipline and Punish: The Birth of the Prison (1975).
- Erving Goffman, Asylums: Essays on the Social Situation of Mental Patients and Other Inmates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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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백과사전 항목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Domination," "Feminist Perspectives on Objectification," "Emmanuel Levinas," "Republicanism," "Michel Foucault,"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Martin Bu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