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차이를 견디는 보편성

인간 일반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설계되는 것들

건물 입구에 계단만 놓여 있을 때, 그 건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침묵하는 구조물도 하나의 인간관을 가진다. 그것은 걷고, 보고, 듣고, 방향을 빠르게 이해하며, 경사로 없이도 공간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을 표준 사용자로 삼는다. 그 표준에 맞지 않는 사람은 건물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차이를 발견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차이는 원래 그 사람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설계가 그를 예외로 만드는 순간 드러난다.

오늘날 같은 일이 디지털 환경에서도 반복된다. 평균적 사용자의 클릭 속도, 언어 습관, 시각 능력, 문화적 배경을 전제한 인터페이스는 특정 인간을 보편적 사용자로 세운다. AI 시스템도 데이터셋과 평가 지표를 통해 비슷한 일을 수행한다. "철학은 보편 조건을 다루는가, 아니면 인간 간 차이를 전제하는가"라는 질문은 순수한 이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인간을 처음부터 안으로 들이고, 어떤 인간을 나중에 보완 대상으로 만드는가의 문제다. 인간 일반은 철학책의 추상 명사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입구의 높이, 버튼의 위치, 음성 인식의 실패율 속에서 실제로 구현된다.

이 글의 논제는 이렇다. 철학은 보편 조건을 포기해서는 안 되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 보편 조건은 명제의 층위가 아니라 설계의 층위에서 시험된다. 따라서 좋은 보편성은 모든 인간을 한 문장으로 포획하는 명제가 아니라, 차이가 표준을 흔드는 순간을 견디도록 자신의 표준을 드러내고 수정하는 절차여야 한다. 핵심 개념 셋을 최소한으로만 규정해 둔다. 보편 조건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된다고 주장되는 가능 조건이다(이성, 세계-내-존재, 몸, 언어 등). 차이는 단순한 개인차가 아니라, 성별·인종·장애·계급·언어에 따라 그 조건이 다르게 작동하는 방식이다. 설계된 보편성은 특정 인간 경험이 제도와 기술 속에서 표준값으로 굳어지는 과정이다. 이 글은 보편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보편성이 자신을 산출한 자리의 흔적을 끝까지 숨길 때, 그것은 이미 보편성이 아니라 특권화된 부분성의 다른 이름이라고 본다.

인간 일반은 어떻게 추출되는가

보편성이 설계의 문제가 될 수 있다면,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인간 일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이다. 근대 철학은 인간을 우연적 조건에서 떼어내 보편적 주체로 사유하려 했다. 칸트는 이 기획의 가장 엄밀한 형태를 보여준다. 『도덕형이상학 정초』의 인간은 경험적 욕망에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도덕법칙을 부과할 수 있는 자율적 이성 존재다. 이 자율성은 혈통, 신분, 지역의 질서 바깥에서 성립한다. 바로 그 자율성이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식에서 모든 인간에게 동등한 존엄을 귀속시키는 근거가 된다. 칸트적 추상은 귀족과 평민, 강자와 약자의 경계를 원리상 무효화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해방의 힘을 가졌다.

문제는 이 추상이 어느 조건에서 산출되었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를 때 시작된다. 도덕 주체는 아무 몸도, 아무 역사도, 아무 사회적 위치도 갖지 않는 순수한 이성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삶의 조건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다. 보부아르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핵심은 여성이 남성과 다른 특수한 존재라는 단순한 주장에 있지 않았다. 더 날카로운 문제는 남성이 자신을 특수한 성으로 표기하지 않은 채 인간 일반의 자리에 올라섰다는 점이다. 여성은 '여성 인간'으로 표시되지만, 남성은 그냥 '인간'으로 남는다. 표시는 늘 주변부에 붙고, 중심은 자신이 표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이 충돌에서 칸트와 보부아르는 단순히 보편주의와 차이론의 대표자로 갈라지지 않는다. 칸트는 인간을 우연적 속성에서 해방하려는 추상의 힘을 보여준다. 보부아르는 그 추상이 실제 역사 속에서 누구의 조건을 중립으로 만들었는지를 묻는다. 문제는 보편성을 버릴 것인가가 아니다. 문제는 보편성이 자신을 산출한 자리를 지울 때, 해방의 언어가 어떻게 배제의 언어로 변하는가이다. 인간 일반은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 일반이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끝까지 숨길 때, 그것은 가장 세련된 방식의 편파성이 된다.

보편 조건은 현실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는가

앞 섹션의 논점이 인간 일반의 추출 방식에 있었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추출된 보편 조건이 모든 인간에게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가이다.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개념은 이 문제를 더 깊은 층위로 밀고 간다. 인간은 고립된 정신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세계 안에 던져져 있으며, 도구, 타인, 언어, 시간성 속에서 자신을 이해한다. 이 관점은 추상적 주체보다 구체적이다. 인간은 빈 공간에서 판단하는 머리가 아니라, 문고리를 잡고, 길을 건너고, 누군가의 시선을 받고, 죽음을 향해 시간을 사는 존재다.

그러나 이 구체성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하이데거가 인간의 보편적 처지를 '세계 안에 있음'으로 설명했다면, 파농은 그 세계가 이미 권력에 의해 다르게 배치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파농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제시한 '표피적 도식' 개념은 메를로-퐁티의 신체 도식이 너무 넓게 가정된 보편이라는 점을 정확히 겨냥한다. 흑인 신체는 단순히 세계 안에 있는 신체가 아니라, 타자의 시선과 식민적 언어에 의해 이미 의미가 부착된 신체로 세계에 들어간다. 백인 아이가 "저기 흑인이다"라고 외치는 순간, 신체 도식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인종적 표피 도식이 들어선다. 문고리와 거리와 말투와 시선은 중립적 배경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세계는 가능성의 장으로 열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먼저 방어해야 할 공간으로 나타난다.

이때 차이는 보편 조건의 바깥에 붙는 장식이 아니다. 차이는 보편 조건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바꾼다. 인간은 모두 몸을 가진다. 그러나 휠체어 사용자가 계단 앞에서 경험하는 몸과 비장애인이 같은 계단 앞에서 경험하는 몸은 같은 추상 항목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타인의 시선을 받는다. 그러나 어떤 시선은 단순한 사회적 관계이고, 어떤 시선은 몸 전체를 하나의 표지로 고정한다. 인간은 모두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어떤 억양은 능력의 증거로 들리고, 어떤 억양은 결핍의 표시로 들린다. 여기서 보편 조건은 폐기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정확해진다. 조건은 공유될 수 있지만, 그 조건의 작동 방식은 비대칭적이다.

그러므로 철학이 보편 조건을 다룬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철학은 보편 조건이 현실 속에서 변형되는 방식까지 다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 조건은 너무 높은 곳에 머문다. 높은 곳에서 보면 모든 입구는 점처럼 보이고, 모든 몸은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섞인다. 그러나 입구 앞에 도착한 사람에게 계단과 경사로의 차이는 형이상학보다 먼저 온다. 사유는 하늘에서 시작할 수 있어도, 검증은 언제나 문턱에서 시작된다.

가장 강한 반론: 차이를 통과한 보편성도 또 다른 보편주의 아닌가

앞 섹션의 결론이 보편 조건은 차이를 통해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이제 가장 어려운 반론을 피할 수 없다. "차이를 통과한 보편성"이라는 말 자체가 결국 새로운 보편주의 아닌가. 이 반론은 가볍지 않다. 오히려 이 글의 논제를 가장 정직하게 위협한다.

반론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보편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하나의 기준이 다양한 인간 경험을 재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이를 반영한 보편성 역시 여전히 기준을 세운다. '수정 가능한 보편성', '절차적 보편성'이라는 말도 결국 어떤 기준을 모든 사례 위에 놓는 행위다. 이 글은 낡은 보편주의를 비판하면서 더 세련된 보편주의를 들여오는 데 그치는 것 아닌가.

더 날카로운 공격은 여기서 출발한다. 차이를 보편성의 자기 수정 재료로 끌어들이는 행위 자체가 차이의 도구화라는 것이다. 이 반론에 따르면, 보편성은 자신이 빠뜨린 인간을 만날 때마다 그 인간을 원재료로 흡수해 더 정교해진다. 차이는 언제나 '보편성을 개선하기 위한 피드백'으로 처리되고, 결코 그 자체로 머물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휠체어 사용자의 경험은 접근성 표준의 갱신 데이터가 되고, 소수 언어의 억양은 AI 성능 지표의 오차항이 된다. 차이를 품는다는 제스처는 차이를 가공 대상으로 만드는 절차와 구분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 문제가 아니라 권력 문제다. 포용의 언어는 종종 가장 효율적인 정상화 장치로 작동한다. 모든 차이를 절차 안으로 들이겠다는 선언은 동시에 모든 차이를 절차의 문법에 맞추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 반론은 부분적으로 옳다. 차이를 말한다고 해서 기준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어려워진다. 어떤 차이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고, 어떤 문화적 차이는 폭력적 위계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 차이를 규범적으로 승인해야 한다"는 결론을 낳지 않는다. 또한 차이를 보편성의 재료로 흡수하는 일이 언제나 중립적 개선이 아니라는 지적도 받아들여야 한다. 접근성 표준과 AI 공정성 지표가 어떤 차이는 기록하고 어떤 차이는 기각하는지, 그 선별 자체가 권력 작용이다.

그러나 이 반론이 보편성의 복귀를 정당화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론이 보여주는 것은 보편성이 불필요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보편성이 더 이상 최종 명제의 형태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차이를 통과한 보편성도 기준을 세운다. 다만 중요한 차이는 그 기준이 자신을 무표지의 진리로 제시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놓인 조건을 드러내고 자신이 포획하지 못하는 잔여를 인정하는가에 있다. 도구화의 위험은 절차 자체의 불가피한 속성이 아니라, 절차가 자신의 한계를 은폐할 때 발생한다. 기준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기준 없는 세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준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구에 의해 검토되며, 어떤 예외 앞에서 수정되는지를 묻는 더 엄격한 절차를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보편성이 자기 수정 장치를 내장하는 동시에 자신이 모든 차이를 다 흡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함께 고백할 수 있는가이다.

보편성은 명제가 아니라 절차다

앞 섹션의 반론이 옳다면, 이제 보편성을 하나의 완성된 문장으로 방어할 수 없다. 보편성은 "인간은 본래 X이다"라는 명제가 아니라, 그 명제가 실제 인간 앞에서 어떻게 시험되고 수정되는가를 보여주는 절차가 되어야 한다. 절차적 보편성은 모호한 관용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최소한 세 가지 기준을 가진다.

첫째, 표준을 드러낼 것. 어떤 제도나 기술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때, 그 모두가 실제로 어떤 사용자를 기본값으로 삼는지 명시해야 한다. 표준은 사라질 수 없다. 그러나 숨겨진 표준은 비판될 수 없다.

둘째, 예외 앞에서 수정될 것. 어떤 인간이 시스템에 맞지 않을 때, 그 인간을 실패한 사용자로 처리할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의 표준을 다시 볼 것인가가 결정적이다. 예외가 표준을 다시 계산하게 만들 때, 보편성은 추상적 선의가 아니라 실제 절차가 된다.

셋째, 적용 조건을 명시할 것. 어떤 원칙이 모든 상황에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순간, 원칙은 현실의 차이를 압착하기 시작한다. 자율성, 평등, 접근성, 공정성은 중요한 보편 가치지만, 그 가치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형태로 구현되는지는 함께 규정되어야 한다.

이 세 기준은 보편성을 약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편성을 책임 있게 만든다. 보편성이 비판을 견딜 수 있으려면, 그것은 자신의 적용 조건을 숨기지 않아야 한다. 보편성은 더 이상 신전의 문장처럼 높은 곳에 걸려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설계 문서, 접근성 검사, 데이터 감사, 사용자 피드백, 법적 책임의 언어 속으로 내려와야 한다.

계단과 평균 사용자: 설계된 보편성의 동일한 구조

앞 섹션에서 보편성을 절차로 다시 정의했다면, 이제 그 정의가 실제 사례에서 어떻게 시험되는지 보아야 한다. 장애 접근성과 AI 공정성은 서로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같은 구조를 가진다. 둘 다 특정 인간을 기본값으로 삼고, 기본값에 맞지 않는 인간을 사후 보완의 대상으로 만든다. 두 영역 모두에서 보편성의 문제는 이미 명제가 아니라 설계의 언어로 제도화되어 있다.

장애 접근성 논의의 핵심은 장애가 개인의 결핍이 아니라 환경과의 관계라는 점이다. WHO와 세계은행이 2011년 펴낸 『세계 장애 보고서』는 이 관점을 명문화한다. 장애인권리협약(CRPD)은 장애를 "손상을 가진 사람과 그들의 온전하고 효과적인 사회 참여를 가로막는 태도적·환경적 장벽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보고서는 이 정의를 '의료 모델'에서 '사회 모델'로의 전환으로 서술하며, 물리적·사회적·태도적 환경이 손상을 가진 사람의 참여를 가로막거나 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같은 손상을 가진 사람도 맥락에 따라 매우 다른 종류와 정도의 제약을 경험한다. 계단만 있는 건물은 "휠체어 사용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쓰지 않는다. 다만 입구를 그렇게 만든다. 바로 이 점에서 배제는 더 은밀하고 강력하다. 배제는 금지 문구가 아니라 기본 설계 안에 들어간다.

이런 진단은 웹 환경에서도 구체적 규범 문서로 내려와 있다. W3C의 『웹 콘텐츠 접근성 지침 2.2』는 웹 콘텐츠가 지각 가능하고(Perceivable), 조작 가능하며(Operable), 이해 가능하고(Understandable), 견고해야(Robust) 한다는 네 원칙 아래 13개 지침과 세 단계(A·AA·AAA) 성공 기준을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이 기준들이 단지 장애인을 위한 별도 배려가 아니라, 콘텐츠가 "한 인간의 감각·신체·인지 능력의 차이에 맞춰 다양한 형태로 재표현"될 수 있도록 요구한다는 점이다. 표준 자체가 자신의 보편성 주장을 검증 가능한 성공 기준으로 분해하고, 자신이 놓치는 사용자를 호출하는 구조다. 이는 앞서 제시한 절차적 보편성의 세 기준이 기술 규범의 층위에서 실제로 구현된 형태다.

AI 시스템에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된다. 평균 사용자에게 잘 작동하는 모델은 자신을 보편적 도구로 소개한다. 그러나 평균은 중립이 아니다. 평균은 데이터 수집의 역사, 시장의 우선순위, 언어권의 크기, 평가 지표의 선택, 개발자의 상상력이 만든 결과다. 어떤 언어는 풍부한 학습 자료를 갖고, 어떤 언어는 주변부에 남는다. 어떤 발화와 얼굴과 행동 패턴은 쉽게 인식되고, 어떤 것은 오류로 처리된다. 이때 사용자는 기술을 잘못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기술이 상상한 인간상 바깥에 놓인 사람이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가 2023년 발표한 『AI 위험 관리 프레임워크 1.0』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룬다. 프레임워크는 AI 시스템의 관리 과정을 통치(Govern)·지도(Map)·측정(Measure)·대응(Manage)의 네 기능으로 나누고, '유해 편향이 관리된 공정성'을 신뢰 가능한 AI의 핵심 속성 중 하나로 제시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공정성에 대한 자기 교정적 규정이다. 프레임워크는 편향을 체계적 편향, 계산적·통계적 편향, 인간-인지적 편향 세 범주로 구분하면서, 예측이 인구통계적 집단 간에 균형 잡힌 시스템도 장애인이나 디지털 격차 영향권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접근 불가능할 수 있고, 기존의 구조적 불평등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이 진술은 중요하다. 그것은 공정성을 단일한 수치 지표로 환원하는 접근이 왜 실패하는지를 보편성 논의의 언어로 다시 말하고 있다. 데모그래픽 간 균형은 보편성의 한 측면일 뿐이며, 그 균형이 이미 특정 사용자 집단을 전제로 계산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할 수 있다. 공정한 AI는 자신이 어떤 인간을 표준으로 삼아 설계되었는지를 계속 개방해 두어야 한다.

세 문서는 각기 다른 영역을 다룬다. 그러나 공통된 구조가 있다. 모두 보편성을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기준의 집합으로 분해한다. 모두 자신의 표준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스스로를 수정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모두 적용 조건의 차이를 인정한다. 철학 논쟁은 이 문서들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반복되고 있다. 인간 일반의 정의는 학술지의 논문만이 아니라 접근성 지침의 성공 기준과 AI 공정성 지표의 선택 안에서도 내려지고 있다. 기술은 인간관을 실행하는 장치이고, 제도는 인간 일반의 정의를 행정적으로 굳히는 방식이다.

이 사례들이 보여주는 결론은 단순하다. 차이를 나중에 보완하는 보편성은 이미 늦다. 나중에 붙인 경사로는 아무 경사로가 없는 것보다 낫지만, 처음의 설계가 누구를 잊었는지 지우지는 못한다. AI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배포 이후 발견된 편향을 고치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 편향은 종종 설계 초기의 인간 모델이 좁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보편성은 결과물 끝에 붙는 윤리 장식이 아니라, 설계의 시작점에서부터 다루어져야 하는 조건이다.

결론: 보편성의 기준을 다시 세우기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철학은 보편 조건을 다루는가, 아니면 인간 간 차이를 전제하는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방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편 조건만 다루는 철학은 자신이 누구의 경험을 인간 일반으로 삼았는지 잊기 쉽다. 차이만 전제하는 철학은 공통의 판단 기준을 잃을 위험이 있다. 문제는 보편성과 차이의 단순한 절충이 아니다. 문제는 보편성이 차이에 의해 시험받을 수 있는 구조를 갖는가이다.

이 질문의 무게는 현대 사회에서 특히 가중된다. 보편성은 더 이상 철학 논문 안에서만 방어되거나 반박되지 않는다. 그것은 건물의 입구, 인터페이스의 버튼, 알고리즘의 분류, 접근성 지침의 성공 기준, AI 공정성 프레임워크의 측정 항목 속에서 매일 결정된다. 보편성이 명제의 층위에서 설계의 층위로 내려왔다는 사실은, 보편성 비판도 동일한 층위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철학이 이 층위를 외면할 때 벌어지는 일은 두 가지다. 보편성에 관한 추상적 숭배가 철학의 영역으로 남고, 보편성의 실제 구현은 기술 규범과 행정 지침의 영역에서 철학적 사유 없이 진행된다. 둘 다 철학의 후퇴다.

따라서 이 글의 결론은 중도론이 아니다. 보편성은 필요하다. 권리, 접근성, 존엄, 공정성은 개별 경험을 넘어서는 판단의 언어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 언어가 실제 인간을 만나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믿는 순간, 보편성은 자기 배반을 시작한다. 좋은 보편성은 모든 차이를 흡수해 더 정교해지는 보편성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표준에서 출발했는지를 드러내고, 포획하지 못하는 잔여의 존재를 인정하며, 예외 앞에서 수정될 수 있는 절차를 내장한 보편성이다.

철학의 임무도 여기서 다시 정해진다. 철학은 인간 일반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인간 일반이 계단을 오를 수 있는 몸, 지배적 언어를 말하는 입, 표준 데이터에 잘 포착되는 얼굴, 다수 문화에 익숙한 감각만을 몰래 대변하지 않도록 끝까지 의심해야 한다. 그 의심은 더 이상 순수 개념 분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설계 문서와 기술 규범의 언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보편성은 내려올 때 비로소 강해진다. 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보편성은 보편성이 아니다.

참고자료

  • Immanuel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
  • Simone de Beauvoir, Le Deuxième Sexe, 1949.
  •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1927.
  • Frantz Fanon, Peau noire, masques blancs, 1952.
  • Maurice Merleau-Ponty,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1945.
  • 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1975.
  • Judith Butler, Gender Trouble, 1990.
  • World Health Organization and World Bank, World Report on Disability, 2011.
  • World Wide Web Consortium, Web Content Accessibility Guidelines (WCAG) 2.2, W3C Recommendation, 2023.
  •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Artificial Intelligence Risk Management Framework (AI RMF 1.0), NIST AI 100-1, 2023.
  • ISO, ISO 9241-210:2019 Ergonomics of Human-System Interaction — Human-Centred Design for Interactive Systems, 2019.
  • 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Rights of Persons with Disabilities,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