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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의 얼굴

— 동등한 참여 가능성과 다문화 시민권의 옹호


같은 규칙이 같은 결과를 낳지 않을 때, 우리는 그 규칙을 여전히 공정하다고 부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언뜻 수사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조금만 파고들면, 이것이 근대 시민권의 가장 단단한 전제를 흔드는 질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근대 시민권은 동일한 법 앞에 동일한 권리를 가진 동일한 개인이라는 이상 위에 세워졌다. 이 이상은 신분·혈통·출신의 분할선을 정치 바깥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다른 의미로 작동해 왔다. 같은 시험, 같은 언어, 같은 공휴일, 같은 복장 규범 아래에서, 어떤 시민은 자기 모습 그대로 살 수 있었고 다른 시민은 자기 모습의 상당 부분을 은폐하거나 번역하거나 포기해야 했다. 이 차이를 설명하지 못하는 시민권 이론은 자기가 약속한 평등을 현실에서 실현하지 못한다.

이 차이가 무엇에 대한 차이인가를 먼저 정해야 한다. 시민권이 더 나쁘다거나 더 낫다고 말할 때의 비교 기준이 단일하지 않으면, 어떤 논증도 끝에서는 미끄러진다. 이 글은 그 기준을 하나로 고정한 뒤 논증을 쌓는다. 기준은 동등한 시민적 참여 가능성이다. 어떤 시민권이 더 바람직한가는, 그 시민권이 모든 시민에게 자기 삶의 조건에 대해 공적으로 발언하고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며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얼마나 동등하게 보장하는가로 판정한다. 다른 기준들 — 실질적 평등, 비지배, 인정, 대표성 — 은 이 기준에 종속되거나 이 기준의 구성 요소로 재배치된다. 실질적 평등은 참여의 물적 조건이고, 비지배는 참여의 신분적 조건이며, 인정과 대표성은 참여의 문턱 조건과 구조적 조건이다. 기준을 이렇게 조이는 순간, 다문화 시민권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일은 감정적 호소의 문제에서 제도 설계의 문제로 옮겨 간다.

이 글의 논제는 다음과 같다. 전통적 자유주의 시민권은 동등한 시민적 참여 가능성을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국가의 중립성이라는 가정 위에서만 성립한다. 이 가정은 현실의 다문화 사회에서 유지되지 않는다. 다수자 문화가 이미 공적 제도의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는 한, 차이에 눈감은 동일 대우는 참여의 비용을 소수자에게 비대칭적으로 부과한다. 다문화 시민권은 이 비대칭을 공적으로 교정함으로써 자유주의가 스스로 약속한 참여 가능성을 현실에서 완성하려는 기획이다. 따라서 다문화 시민권은 자유주의의 대안이 아니라 그 성숙의 한 형태다.


1. 용어의 고정

다문화 시민권은 이 글에서 “문화적 소수자 또는 역사적으로 주변화된 집단이 동등한 시민적 참여 가능성을 누릴 수 있도록 공적 제도가 차이의 존재와 비대칭적 조건을 인정하고 그에 맞추어 조정되는 시민권 체제”를 뜻한다. 이 정의는 다문화 시민권을 “모든 문화적 요구의 공적 승인”으로 확장하는 용법과 구분되며, 이 글은 그러한 무제한적 승인을 지지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 글은 다문화 시민권이 내적 제약을 스스로 설정하는 이론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 내적 제약이 무엇인지는 6절에서 다룬다.

대립항인 전통적 자유주의 시민권은 “시민을 문화적 소속에 선행하는 권리 보유자로 상정하고, 국가는 특정한 선한 삶을 옹호하지 않은 채 모든 시민에게 동일한 법적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보는 시민권 개념”을 가리킨다. 이 개념은 T. H. 마셜의 시민·정치·사회권 확장 서사에서 역사적 모델을 얻었고, 롤스적 자유주의에서 철학적 정교함을 얻었다.

핵심 기준인 동등한 시민적 참여 가능성은 다음 세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자신의 경험과 이익이 공적 담론에서 이해 가능한 주장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번역 가능성). 둘째, 그 주장이 의사결정 통로에 구조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 것(접근 가능성). 셋째, 그 접근에 드는 비용이 특정 집단에게 체계적으로 더 무겁지 않을 것(비대칭 부재). 이 세 요소는 논리적으로 종속된다. 번역 가능성이 없으면 접근 가능성은 빈 형식이 되고, 접근 가능성이 없으면 비대칭 교정만으로는 참여가 실현되지 않는다. 4절은 이 삼중 구조가 다문화 시민권의 세 제도적 축(인정·대표성·차등화된 권리)과 어떻게 대응되는지를 보인다.

파생 개념은 처음 등장할 때 괄호 안에 최소 정의를 제시한다.


2. 자유주의 시민권의 약속과 그 가정

자유주의 시민권의 매력은 구조의 단순성에 있다. 시민은 문화적 소속 이전에 권리를 가진 개인이며, 국가는 그 개인들 사이를 중립적으로 조정한다. 이 단순성 덕분에 자유주의 시민권은 근대 정치 질서에서 강력한 해방의 언어로 작동할 수 있었다. 신분과 혈통에 따른 차등을 공적 결정에서 축출하는 데 이만한 언어는 없었다. 마셜이 『시민권과 사회계급』에서 기술한 시민권·정치권·사회권의 점진적 확장은 이 시민권의 역사적 성취를 보여준다.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다원 사회에서도 이 시민권이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포괄적 교설과 정치적 정의관을 분리하고 공적 이성의 규율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 단순성은 한 가지 가정에 의존한다. 공적 제도가 모든 시민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을 수 있다는 가정, 즉 국가는 문화적으로 중립적일 수 있다는 가정이다. 이 가정이 유지될 때에만 “동일한 규칙 = 동일한 대우 = 동등한 참여”라는 연쇄가 성립한다. 그런데 이 연쇄의 첫 고리가 흔들리면 뒤의 모든 고리가 따라 흔들린다.

가정을 흔드는 실험은 어렵지 않다. 한국 사회의 공휴일 달력을 펼쳐 보자. 학교 교과과정의 언어·문학·역사 서사를 떠올려 보자. 주민등록과 가족관계등록 제도가 전제하는 가족 형태를 살펴보자. 관공서 업무가 전제하는 문해 수준을 짚어 보자. 이 제도들은 문화적으로 중립적인가. 한국어, 유교적 가족 관념의 잔재, 음력 명절과 세속-기독교 혼합의 공휴일 체계, 특정한 학력주의적 문해 전제가 모두 공적 제도의 배경에 스며 있다. 이 배경은 다수자 시민에게는 제도의 당연한 전제로 보인다. 그러나 소수자 시민에게는 자주 넘어야 할 계단으로 나타난다.

찰스 테일러가 「인정의 정치」에서 지적한 요점이 이것이다. 동등한 존엄의 이상에서 파생된 차이에 눈감은 자유주의는 표면적으로 중립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다수 문화의 형식을 보편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 테일러의 지적은 자유주의에 적대적인 외부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주의가 약속한 동등한 존엄의 원리를 일관되게 적용할 경우 제도의 기울기가 드러난다는 내재적 비판이다.

이 기울기의 성격을 더 정확히 말해 두자. 공적 제도의 비중립성은 결코 의도된 차별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다수자 문화가 워낙 자연스럽게 공적 표준으로 굳어진 탓에 그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되는 구조적 효과다. 문제는 악의가 아니다. 문제는 불가시성이다. 그리고 이 불가시성은 가정된 중립성의 가장 강한 효과다. 자기 기울기가 보이지 않는 저울은 기울어진 저울이다. 자유주의 시민권은 이 저울 위에서 평등을 계측한다.

앞의 논의가 성립한다면, 이제 물어야 한다. 이 기울기는 동등한 참여 가능성에 어떤 구체적 피해를 주는가. 그리고 그 피해는 형식적 평등의 틀만으로 교정될 수 있는가.


3. 형식적 평등과 참여의 비대칭 비용

형식적 평등은 같은 규칙을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하는 상태다. 그러나 규칙이 기울어진 지형 위에 놓여 있을 때, 동일한 적용은 기울기를 고정시킨다. 이 지점을 참여 가능성의 언어로 옮겨 보자. 참여는 공짜가 아니다. 공적 담론에 진입하려면 언어·시간·제도적 문해·상징 자본이 필요하다. 이 비용이 모든 시민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다면, 형식적으로 열린 문은 실질적으로 기울어진 문이다.

가장 단순한 예가 언어다. 공립학교의 수업이 100% 한국어로 진행된다는 규칙은 규칙 자체로는 중립적이다. 그러나 이 규칙은 한국어를 가정에서 습득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전혀 다른 조건에 놓는다. 한국 교육부와 여성가족부의 다문화 교육 실태 조사는 다문화 가정 학생의 학업성취도 격차와 고등교육 진학률 격차를 반복적으로 보고해 왔다. 격차의 원인을 학생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환원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합의되어 있다. 규칙이 부당한 것이 아니다. 규칙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조건 자체가 비대칭이다.

이 비대칭이 참여 가능성에 가하는 압력은 삼중이다. 첫째, 참여의 언어 자체가 다수자의 언어로 고정되어 있다. 둘째, 참여 경로(학교·대학·공론장)의 문턱이 다수자에게 낮고 소수자에게 높다. 셋째, 문턱을 넘더라도 자기 경험을 공적 용어로 번역해야 하는 추가 부담이 소수자에게 편중된다. 세 번째 부담은 특히 보이지 않는다. 이민 2세대 아동이 학교에서 “한국인답게” 말하기 위해 자기 가정의 언어를 공적으로 격하시키는 경험은 학업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의 시민적 발언 자체를 사전에 조정한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보편적 시민권의 이상 비판」(1989)에서 제시한 논지가 여기에 걸린다. 참여 민주주의 구조가 보편적·단일한 용어로 시민권을 정의할 때, 그 구조는 기존의 집단 억압을 재생산한다. 영의 논지는 형식적 평등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아니다. 반대로, 형식적 평등이 실제로 실현되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의 비대칭을 공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요구다. 차등화된 시민권은 보편성의 포기가 아니라 보편성의 조건이다.

여기서 한 가지 반론이 예비적으로 등장한다. 경제적 불평등도 같은 구조 아닌가. 가난한 가정의 아이 역시 동일한 규칙 아래에서 불리한 조건에 놓이고, 우리는 그 문제를 복지 정책으로 다룬다. 그렇다면 문화적 소수자의 문제도 일반적 복지·재분배 틀로 충분히 다룰 수 있지 않은가. 이 반론은 5절의 첫 번째 반론으로 본격적으로 다시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예비적으로 한 가지는 지적해 두자. 경제적 결핍은 자원이라는 비교적 단일한 축을 가진다. 문화적 비대칭은 자원 외에 인지적 번역의 층위를 추가한다. 한국어를 못하는 이주 아동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학업 지원이 아니다. 자기 모국어가 공적 교육 체계에서 결핍이 아니라 다른 자원으로 대우받을 가능성이다. 전자는 재분배로 해결되지만, 후자는 재분배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앞의 논의가 성립한다면, 다문화 시민권이 실제로 제안하는 제도적 내용이 이 세 층위의 비대칭(언어·경로·번역)을 각각 어떻게 다루는지를 묻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4. 세 축의 계단: 인정, 대표성, 차등화된 권리

다문화 시민권은 하나의 통일된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참여 가능성의 세 층위 — 번역 가능성, 접근 가능성, 비대칭 부재 — 에 각각 대응하는 세 개의 제도적 축으로 구성된다. 이 세 축은 병렬이 아니라 계단이다. 한 층위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음 층위를 다루면, 뒤 층위의 제도는 빈 형식에 그친다.

첫째 계단은 인정이다. 인정은 참여의 문턱 조건이다. 한 집단의 구성원이 자기 경험을 공적 담론에서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말할 수 있으려면, 그 경험을 수용할 공적 어휘가 존재해야 한다. 테일러는 인정의 결여 — 오인정 — 이 단순한 무례가 아니라 자기 관계 자체를 훼손하는 구조적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심리학적 해석을 잠시 괄호에 두어도 요점은 남는다. 어떤 경험이 공적 언어에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결함 있는 주류 경험의 변형으로만 다뤄질 때, 그 경험의 담지자는 공적 발언 이전에 자기 경험을 번역하거나 포기해야 한다. 이 번역 비용이 참여의 문턱이다. 문턱이 비대칭적으로 높으면, 참여는 이름뿐이다.

둘째 계단은 대표성이다. 인정이 있어도 의사결정 구조로 이어지는 공식 통로가 없으면, 인정은 비공식 여론에 머문다. 영이 「보편적 시민권의 이상 비판」에서 주장한 요점이 이것이다. 소수자는 투표권이라는 형식적 권리를 가져도 제도 설계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주변화될 수 있다. 따라서 다문화 시민권은 대표성의 구조적 장치 — 소수자 대표 보장, 의사결정에 대한 협의 의무, 공식 자문 통로 — 를 요구한다. 이 요구는 집단에게 특권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식 통로가 다수자에게만 열려 있는 사실상의 특권 상태를 교정하는 것이다.

셋째 계단은 차등화된 권리다. 번역 통로가 있고 대표 통로가 있어도, 통로에 진입하는 비용이 특정 집단에게 체계적으로 더 무겁다면 참여는 여전히 비대칭적이다. 윌 킴리카가 『다문화 시민권』(1995)에서 제시한 세 유형의 집단-차등적 권리 — 자치권, 다종족 권리, 특별 대표권 — 은 이 세 번째 계단을 세분화한 것이다. 자치권은 역사적으로 영토적 공동체를 이루어 온 민족적 소수자(퀘벡·스코틀랜드·원주민)가 언어·교육·법 체계에서 일정 수준의 자치를 행사할 권리다. 다종족 권리는 이민 배경의 소수자가 주류 제도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예외와 조정 — 예컨대 시크교도의 터번 착용 허용, 유대교도의 안식일 조정, 무슬림의 종교 복장 조정 — 이다. 특별 대표권은 역사적으로 배제된 집단에 한시적·구조적 대표 보장 장치를 두는 제도다.

이 세 유형이 하나의 단일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약점이 아니라 이론의 정직함이다. 집단의 성격에 따라 참여 비용의 구조가 다르므로, 교정 장치도 달라야 한다. 정복의 역사 위에 선 원주민의 자치권 요구는, 이민 2세대 무슬림 학생의 복장 조정 요청과 같은 논리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킴리카는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민자는 주류 제도에 자발적으로 진입했다는 점과, 민족적 소수자는 국가가 그들에게 왔다는 점의 역사적 차이를 강조했다. 이 구분은 난민과 자발적 이민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왔지만, 그럼에도 모든 문화적 소수자에게 동일한 권리를 동일한 방식으로 부여해야 한다는 단순화된 요구로부터 논의를 구해 주는 장치로서 유효하다.

세 계단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조이면 이렇다. 인정은 문을 열고, 대표성은 문턱을 넘는 길을 만들고, 차등화된 권리는 그 길의 경사를 조정한다. 이 중 어느 하나가 빠지면, 참여 가능성은 한 지점에서 차단된다. 다문화 시민권은 이 세 지점을 동시에 다루려는 제도 설계의 묶음이다.

이 제안은 설득력이 있는가. 지지자의 언어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이제 가장 강한 반대편의 진술을 들어야 한다.


5. 세 개의 치명적 반론

다문화 시민권에 대한 비판은 다양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갈래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각각은 전제 부정형 또는 내부 일관성 위협형 반론에 해당한다. 이 절은 이 반론들을 약화시키지 않고 가장 강한 형태로 재구성한다.

첫째, 평등주의 자유주의의 반론이다. 브라이언 배리는 『문화와 평등』(2001)에서 다문화주의가 소수자 집단의 문제를 잘못 진단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핵심 논점은 이렇다. 소수자가 겪는 불이익의 상당 부분은 문화 인정의 부재가 아니라, 경제적 자원과 기회의 불균등한 분배에서 비롯된다. 이 진단에 따라 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집단별 문화 권리를 제도화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오진한 처방이다. 게다가 그것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보편 규칙의 가치를 훼손한다. 배리의 어조는 과격하지만 논지 자체는 무겁다. 왜 어떤 집단의 관행에는 공적 예외가 허용되고 다른 집단에는 허용되지 않는가. 예외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한 집단의 종교적 관행 때문에 공공 규칙이 수정된다면, 그 수정을 누가 감독하는가. 다문화 이론가가 이 질문을 사안별로 얼버무릴 경우, 다문화 시민권은 일관된 원리 없이 작동하는 정치적 즉흥에 그친다.

둘째, 여성주의의 반론이다. 수전 몰러 오킨은 「다문화주의는 여성에게 나쁜가?」(1997/1999)에서 집단별 문화권을 인정하는 체제가 소수자 집단 내부의 여성을 체계적으로 불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제기했다. 많은 문화적 관행은 내부적으로 성별 위계를 포함한다. 가족법, 상속, 혼인 연령, 재혼 가능성, 공적 발언 기회가 그렇다. 문화 보호라는 이름 아래 이 관행을 공적 비판에서 면제시킬 때, 가장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은 그 집단의 여성이다. 오킨의 논지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소수자 문화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는 누구의 관점에서 정의되는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간다는 점이다. 집단의 대표 — 주로 원로 남성 — 가 말하는 “우리 문화”와, 그 집단 내부에서 살아가는 여성·아동·성소수자가 경험하는 현실은 자주 다르다. 집단권을 제도화할 때 이 차이를 무시하면, 다문화 시민권은 내부 억압을 공적 이름으로 보호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반론은 참여 가능성이라는 이 글의 기준에 직접 칼끝을 댄다. 집단 외부의 참여 비대칭을 교정하려다, 집단 내부의 참여 비대칭을 고정시키는 결과가 된다면 이론은 자기 원리를 위배한다.

셋째, 사회 통합의 반론이다. 이 반론은 공화주의적 뿌리를 갖고 있으며 가장 흔하게는 이렇게 제시된다. 시민권이 집단별로 분절될 때 공통의 정치 언어가 붕괴한다. 공적 정체성이 문화 집단별로 쪼개지면, 공동의 헌정적 의무감과 공적 연대의 근거는 어디서 오는가. 다른 언어와 다른 역사적 기억으로 분리된 시민들이 과세·재분배·국방·공교육에 대한 공통의 부담을 어떻게 공유하는가. 이 반론은 단순한 보수적 두려움이 아니다. 벨기에·캐나다·스페인의 경험은 다언어·다민족 연방이 연대의 언어를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제도적·상징적 노력을 요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노력이 부족할 때 정치 공동체가 실제로 분절의 압력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참여 가능성의 언어로 옮기면 이 반론은 다음과 같다. 참여의 장 자체가 공통적이지 않으면, 그 장 안에서의 참여 가능성을 교정해 봤자 소용이 없다. 공통의 참여 장을 해체하는 다문화 시민권은 자기 전제를 잠식한다.

이 세 반론의 무게는 각각 다르다. 배리의 반론은 방법론적 허술함을 지적하고, 오킨의 반론은 집단권과 개인 자유 사이의 긴장을 지적하며, 공화주의적 반론은 다문화 시민권이 서 있는 헌정적 토대를 지적한다. 이 반론들을 회피하는 다문화 시민권은 이론적으로 취약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굴복도 기각도 아니다. 이 반론들이 드러낸 내부 긴장을 다문화 시민권이 명시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6. 응답: 한계를 내장한 이론

첫째 반론 — 배리의 평등주의 자유주의 — 에 대한 응답은 양자택일을 거부하는 것이다. 배리의 구도는 문화 인정과 경제 재분배를 대립시킨다. 그러나 참여 가능성의 삼중 구조는 두 층위가 서로 다른 장벽을 다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경제 재분배는 참여의 물적 조건(세 번째 층위의 하위 요소)을 다루고, 문화 인정은 참여의 번역 가능성(첫 번째 층위)을 다룬다. 이주 아동의 학업 격차를 생각해 보자. 그 아이에게는 경제적 지원과 언어 지원이 동시에 필요하다. 장학금만으로는 수업 내용이 이해되지 않고, 언어 지원만으로는 방과후 학원에 접근할 돈이 생기지 않는다. 배리가 올바르게 지적한 것은 문화 인정의 언어가 경제적 불평등을 은폐하는 데 오용될 수 있다는 위험이다. 이 경고는 이론 안으로 흡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문화 시민권을 기각하는 근거가 아니라 그것을 재분배와 결합하는 방식을 조정하는 근거다.

둘째 반론 — 오킨의 여성주의 — 에 대한 응답은 킴리카가 정식화한 외적 보호와 내적 제약의 구분을 명시적으로 채택하는 것이다. 외적 보호는 집단이 더 큰 사회의 결정으로부터 부당하게 해체되거나 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다. 언어권 보호, 자치권, 차별 금지 조치가 여기에 속한다. 내적 제약은 집단이 내부 구성원의 선택과 이탈을 억압하기 위해 동원하는 제도적 강제다. 배교자의 추방, 여성의 공적 활동 금지, 자녀의 교육 권리 박탈이 이에 속한다. 킴리카의 주장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가 외적 보호는 정당화할 수 있지만 내적 제약은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구분을 참여 가능성의 언어로 옮기면 명료하다. 외적 보호는 집단 구성원의 시민적 참여 가능성을 지키는 장치이고, 내적 제약은 집단 구성원의 시민적 참여 가능성을 박탈하는 장치다. 같은 원리가 하나는 정당화하고 다른 하나는 기각한다.

이 구분은 실제 적용에서 자주 흐려진다. 어디까지가 외적 보호이고 어디부터가 내적 제약인가. 퀘벡의 프랑스어 공용화법이 영어권 소수자 가정의 자녀를 프랑스어 학교에 다니도록 강제한다면, 그것은 집단 보호인가 내적 제약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단일한 답은 없다. 그러나 답이 단일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론의 약점이 아니라 그 정직함이다. 시민권은 원리의 단호한 적용이 아니라 경합하는 요구 사이의 지속적 조정이다. 다문화 시민권은 이 조정을 공적 토론의 대상으로 만들고, 토론에 소수자 — 특히 집단 내부 소수자 — 의 목소리가 구조적으로 포함되도록 하는 장치를 제안한다. 오킨의 반론은 따라서 다문화 시민권의 외부 비판이 아니라, 좋은 다문화 시민권 이론이 내부 원리로 흡수해야 하는 요구로 재배치된다.

셋째 반론 — 공화주의적 사회 통합 — 에 대한 응답은 제도적 수준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순수한 철학적 응답으로는 불충분하다. 공통의 참여 장을 유지하면서 그 장이 다수자 문화만의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작동하는가. 가장 유력한 한 방향은 위르겐 하버마스가 제시한 헌정 애국주의다. 여기서 공통성은 공유된 민족적 기원이나 문화적 서사가 아니라, 헌정적 원리와 그 원리의 지속적 해석 실천에 대한 공유된 충성이다. 이 충성의 내용은 특정 문화의 내용과 달리 서로 다른 배경의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얇은 층이며, 동시에 시민적 자격을 결정하기에 충분한 두께를 갖는다. 이것이 작동한 경험적 예시는 여럿이다. 캐나다의 연방 구조에서는 인권 헌장의 개별 권리 보호와 퀘벡의 문화적 자율성이 공존한다. 1995년 퀘벡 분리 독립 주민투표의 근소한 실패 이후 연방의 경로는 분리가 아니라 자치의 심화였고, 이것은 다문화 시민권이 반드시 국가 해체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경험적 반증으로 기능한다.

제도의 수준에서 구체적 함의를 짚어 두자. 첫째, 공교육 커리큘럼의 재설계가 필요하다. 공통의 시민 교육이 다수자 집단의 역사 서사가 아니라 헌정적 분쟁 해결 절차의 역사에 초점을 맞출 때, 그 교육은 소수자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공통성을 전달할 수 있다. 한국의 맥락으로 번역하면, 시민 교육의 중심이 단일 민족 서사가 아니라 헌법 질서의 형성 과정과 그 해석의 역사가 되는 방향이다. 둘째, 이주민을 위한 통합 교육이 “한국 문화 학습”이 아니라 “한국 헌정 체제 참여 교육”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이 차이는 겉으로 작지만 실제로는 크다. 전자는 이주민을 학습 대상으로 놓고, 후자는 이주민을 참여 주체로 놓는다. 셋째, 다문화 지원 제도가 “적응 지원” 모델에서 “참여 조직화” 모델로 이동해야 한다. 당사자 조직의 공식 대표 통로와 협의 의무는, 공통 시민권이 소수자의 구체적 이익을 반영하도록 만드는 제도적 경로다.

이 세 제안은 공화주의적 반론이 가리킨 위험 — 공통 참여 장의 해체 — 을 실제로 완화한다. 공통성은 유지되지만, 그 공통성의 내용이 다수자 특수성과 분리된다. 이 분리는 다문화 시민권이 달성해야 할 가장 어려운 정치적 작업이다. 그것이 어렵다는 사실은 이론의 실패가 아니라 이론이 수행해야 할 과제의 규모다.


7. 한국의 현장: 법의 제1조와 심사의 최종 통계

지금까지의 논의가 추상 수준에서 성립한다면, 이제 그것을 한국의 구체적 제도 위에 놓아야 한다. 이 절의 목표는 사례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두 개의 제도적 장면에서 참여 가능성이 어떤 방식으로 구조적으로 차단되어 왔는지를 드러내고, 자유주의 시민권의 언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차원이 다문화 시민권의 언어로 어떻게 가시화되는지를 보이는 데 있다.

첫 번째 장면은 『다문화가족지원법』의 구조다. 이 법 제1조는 목적을 “다문화가족 구성원이 안정적인 가족생활을 영위하고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들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통합에 이바지함”이라고 명시한다. 제2조는 다문화가족을 “결혼이민자와 한국 국적 취득자로 이루어진 가족”으로 정의한다. 이 두 조항은 한국 다문화 정책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규정한다.

주목할 첫 번째 지점은 대상의 한정성이다. 이 법에서 다문화가족의 대상은 “한국인과 결혼했거나 한국 국적을 취득한 자의 가족”이다. 이주 노동자, 난민, 장기 체류 외국인 일반은 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즉 한국의 다문화 정책은 이주민 일반의 참여 가능성이 아니라 한국인이 되는 경로에 있는 자의 적응을 다룬다. 이주는 국적 취득으로 가는 단방향 과정으로 전제되고, 그 과정의 종착점이 한국 시민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 됨으로 상정된다.

주목할 두 번째 지점은 “사회통합”이라는 목적 규정의 방향성이다. 이 법에서 사회통합은 다문화가족의 한국 사회로의 통합을 뜻한다. 역방향의 통합 — 한국 사회가 다문화가족의 문화를 흡수하거나 그것에 의해 수정되는 통합 — 은 법의 전제가 아니다. 제6조(생활정보 제공 및 교육 지원)의 내용을 보면 이 구조가 분명해진다. 지원의 중심은 한국어 교육, 사회적응 교육, 직업 교육이다. 모국어 교육이 언급되긴 하지만 보조적 위치이며, 그 조항조차 “자녀의 언어발달”이라는 기능적 목적에 종속된다. 모국어는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할 문화 자원이 아니라, 한국어 습득을 돕는 매개로 제한된다.

이 구조를 참여 가능성의 삼중 틀에 얹으면 진단이 명확해진다. 법은 번역 가능성(첫 번째 계단)에 투자하지 않는다. 법은 결혼 이민자의 경험을 공적 언어로 번역하는 통로를 열기보다, 결혼 이민자가 한국어로 자신을 다시 쓰도록 요구한다. 법은 접근 가능성(두 번째 계단)을 구조화하지 않는다. 당사자 대표 조직이 정책 설계에 참여하는 공식 통로는 희박하다. 법은 비대칭 교정(세 번째 계단)을 부분적으로 다룬다.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제8조), 산전·산후 건강관리 지원(제9조) 등은 참여의 물적 조건을 보장하는 조치다. 그러나 이 물적 보장조차 “한국인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자격과 묶여 있다. 같은 나라에 살지만 “다문화가족”의 정의에 들지 않는 이주민은 이 보장에서 체계적으로 제외된다.

이 진단은 이 법의 폐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법은 기존 공백을 메운 의미 있는 성취였다. 그러나 이 법이 한국 다문화 정책의 상한선이 될 경우, 한국 사회는 이주민 일반의 시민적 참여 가능성 문제를 영영 다루지 않게 된다. 법의 확장이 필요하다. 대상은 결혼 이민자에서 이주민 일반으로 넓혀져야 하고, 목적은 일방향 통합에서 양방향 조정으로 재설계되어야 하며, 지원의 내용은 적응에서 참여로 재배치되어야 한다. 이 방향은 다문화 시민권 이론의 요구와 일치한다.

두 번째 장면은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사태의 최종 통계다. 2018년 한 해 동안 제주 무사증 제도를 통해 예멘인 561명이 입국했고, 549명이 난민 지위를 신청했다. 사태는 단기간에 청와대 청원 70만 명 이상을 동원한 대규모 사회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여론조사는 수용 반대 56%, 찬성 24%를 기록했다. 반대의 언어 안에는 치안 불안, 문화 충돌, 경제적 부담에 대한 우려가 섞여 있었고, 그중 상당 부분은 예멘의 실제 상황에 대한 정보 부재 위에서 형성되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8%가 예멘의 국가 상황을 “잘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법무부가 심사한 484명에 대한 최종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난민 인정 2명, 인도적 체류 허가 412명, 단순 불인정 56명, 직권 종료 14명. 난민 인정을 받은 2명은 모두 언론인 출신으로, 후티 반군에 비판적 기사를 써 납치·살해 협박을 받은 이력이 확인된 경우였다. 나머지 대부분 — 412명 — 은 난민 협약상 “박해”의 요건을 충족하지는 않지만 강제송환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인도적 체류 지위를 받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결정이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난민 심사라기보다 난민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급히 무마하기 위한 일률적인 결정”일 수 있다고 공식 지적했다.

이 통계가 참여 가능성의 관점에서 왜 중요한가. 자유주의 시민권의 틀에서 보면 쟁점은 비교적 선명하다. 난민 심사 기준의 절차적 공정성, 형식적 권리 보장, 법률 지원 접근성이다. 이 틀은 필요하지만 이 사태가 드러낸 문제를 다 포착하지 못한다. 실제로 드러난 문제는 그 이상이었다.

첫 번째는 번역 가능성의 차단이다. 예멘 난민들은 한국 사회의 공적 서사에서 단일한 타자로 재현되었다. 종교적 위협이거나 경제적 부담이거나 둘 다로 그려졌다. 이 재현은 개별 심사의 배경 조건으로 작동했다. 두 번째는 접근 가능성의 차단이다. 당사자의 발언이 공적 담론에 진입할 경로가 구조적으로 좁았다. 청원·집회·언론의 장에서 벌어진 담론의 거의 전부가 그들 “에 대한” 담론이었지 그들 “의” 담론이 아니었다. 세 번째는 비대칭의 고정이다. 인도적 체류 지위는 1년씩 연장되지만, 그 지위는 영주권 취득의 경로가 아니다. 인도적 체류자는 한국어를 할 수 없어 미숙련 단순노무만 가능하며, 기초생활보장 등 사회보험 혜택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된다. 414명(인도적 체류 412명 + 난민 2명)은 한국에 머물 수 있지만, 한국의 시민권 구조 안에서는 영구적 주변부로 배치된다.

이 세 층위의 차단은 법적 불법이 아니다. 그것은 현행 한국 시민권 구조의 합법적 결과다. 그리고 이 결과는 보편적 권리의 언어를 재확인하는 것만으로 교정되지 않는다. 교정되려면 제도적 매개가 필요하다. 인도적 체류자의 영주권 경로 확보, 난민 심사의 당사자 접근성 강화, 이주민의 공적 대표 통로 제도화. 이 제안들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이념을 이식하자는 요구가 아니다. 한국 시민권이 자기 안에서 이미 약속한 동등한 참여 가능성을 이주민에게도 일관되게 적용하자는 요구다. 이 요구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이 다문화 시민권이다.


8. 결론: 기준을 옮긴다

이 글이 시작된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같은 규칙이 같은 결과를 낳지 않을 때, 그 규칙을 여전히 공정하다고 부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은 규칙의 불공정을 고발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더 본질적인 이동은 판단 기준 자체의 재배치였다.

기준은 분배의 동일성이 아니다. 기준은 참여의 동등성이다. “누구에게 같은 것을 주는가”는 분배적 질문이고, 전통적 자유주의 시민권이 역사적으로 성취한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이 성취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신분적 차별을 공적 결정에서 축출한 언어는 인류의 정치적 유산이다. 그러나 이 질문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가 어떤 조건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참여할 수 있는가”는 참여적 질문이고, 후기 국민국가의 다문화 현실은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다문화 시민권의 우월성은 이 참여적 질문에 답할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 자원은 세 계단의 제도적 축 — 인정, 대표성, 차등화된 권리 — 이며, 이 세 축은 번역 가능성·접근 가능성·비대칭 부재라는 참여의 삼중 조건에 각각 대응한다. 이 자원을 감상적 언어로만 포장하면 배리·오킨·공화주의적 반론에 쉽게 무너진다. 그러나 이 자원을 참여 가능성이라는 단일 기준 아래 조이고, 외적 보호와 내적 제약의 구분·경제 재분배와의 결합·헌정 애국주의의 제도적 장치를 함께 설계하면, 이 반론들은 이론의 외부 적이 아니라 이론의 내부 조건으로 흡수된다.

이 글은 다문화 시민권이 모든 문화적 요구를 공적으로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 방향은 오킨의 반론 앞에서 무너진다. 이 글이 주장한 것은 더 엄격한 것이다. 다문화 시민권은 집단권과 개인 자유 사이, 인정과 비판 사이, 차이와 공통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이론이 아니라, 그 긴장을 공적으로 관리할 언어와 장치를 제공하는 이론이어야 한다. 관리의 실패는 이론 안에서 진단되고 교정될 수 있는 실패이지, 이론 자체의 파산이 아니다.

더 바람직한 시민권은 차이를 더 많이 칭찬하는 시민권이 아니다. 그것은 차이가 참여의 비대칭 비용으로 굳어지는 경로를 공적 토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시민권이다. 그것은 소수자의 목소리가 집단 내부에서든 집단 바깥에서든 구조적으로 들릴 수 있는 시민권이다. 이것이 자유주의가 처음부터 약속한 것 — 자기 삶의 조건에 대해 동등한 발언권을 가진 시민 — 의 진지한 실현이라면, 다문화 시민권은 자유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그 성숙의 한 형태다.

그리고 이 성숙은 선택이 아니다. 한국 사회를 포함한 거의 모든 후기 국민국가는 이미 다문화 사회이며, 그 방향을 돌이킬 수 없다. 남은 질문은 그 사실을 제도가 어떻게 다룰 것인가다. 중립의 이름으로 다수자 규범을 보편으로 강화하거나, 공적 제도의 기울기를 공적으로 교정하거나, 둘 중 하나다. 첫 번째 선택지는 평등의 언어를 유지한 채 실질적 불평등을 생산한다. 두 번째 선택지는 어색하고 복잡한 지속적 조정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시민권이라는 단어를 그 단어가 원래 의미했던 것 — 동등한 정치적 동료 — 에 가깝게 유지할 수 있는 길이다.

같은 규칙이 같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은, 같은 규칙을 폐기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결과를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공적으로 설계하는 일이다. 이 설계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이 다문화 시민권이다.


참고 자료

이 글에서 논증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저작과 자료는 다음과 같다.

전통적 자유주의 시민권의 역사적 모델은 T. H. 마셜의 『Citizenship and Social Class』(1950)에서 끌어왔다. 존 롤스의 『Political Liberalism』(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은 국가의 중립성 가정을 가장 정교하게 옹호한 작업이며, 2절에서 다룬 중립성 비판은 이 정교한 옹호의 내적 한계를 겨냥한다.

다문화 시민권의 이론적 축은 윌 킴리카의 『Multicultural Citizenship: A Liberal Theory of Minority Rights』(Oxford, 1995)다. 4절의 세 유형 분류(자치권·다종족 권리·특별 대표권)와 6절의 외적 보호/내적 제약 구분은 이 저작에서 직접 가져왔다. 후속 작업으로는 『Politics in the Vernacular』(Oxford, 2001)와 『Multicultural Odysseys』(Oxford, 2007)가 보완 맥락을 제공한다.

인정의 정치에 관한 논의의 출처는 찰스 테일러의 「The Politics of Recognition」(in Amy Gutmann ed., Multiculturalism, Princeton, 1994)이다. 차이의 정치와 보편 시민권 비판의 출처는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Polity and Group Difference: A Critique of the Ideal of Universal Citizenship」(Ethics 99-2, 1989)과 『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Princeton, 1990)다.

비판 측의 주요 출처는 브라이언 배리의 『Culture and Equality: An Egalitarian Critique of Multiculturalism』(Harvard, 2001)과 수전 몰러 오킨의 「Is Multiculturalism Bad for Women?」(Boston Review 22-5, 1997; Princeton, 1999)이다. 6절의 공화주의적 반론에 대한 제도적 응답은 위르겐 하버마스의 헌정 애국주의 개념(『The Inclusion of the Other』, MIT Press, 1998)에서 도움을 받았다.

한국 사례와 관련해서는 다음 자료를 참조했다. 『다문화가족지원법』(법률 제8937호, 2008년 제정; 최근 개정본 포함)의 제1조, 제2조, 제6조, 제8조, 제9조의 문언을 본문에 직접 반영했다. 한국 다문화 정책의 동화주의적 성격에 관한 비판적 연구로는 장한업, 조영달, 정경훈 등의 국내 연구, 그리고 영어권 문헌으로 Jo & Jung의 2017년 교육정책 분석, Choi의 『Population, Space and Place』 2024년 논문이 있다. 제주 예멘 난민 사태 관련 통계는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의 공식 발표(2018년 10월 및 12월 심사 결과 최종 통계), 국가인권위원회의 2018년 12월 공식 성명, 그리고 한국리서치의 2018년 7월 여론조사 보고서(「예멘 난민에 대한 한국사회 인식 보고서」)를 인용했다. 인도적 체류자의 장기 정착 조건에 관해서는 참여연대의 2019년 추적 보고서를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