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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실패할 수 있을 때

인간의 재구성력은 실패 가능성 안에서 작동한다.

여기서 재구성력(reconstructive capacity)은 고통이나 공백 같은 의미론적 위기 — 경험이 기존 의미망 안에서 처리되지 않는 상태 — 를 이야기의 형식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서사화(narrativization)는 그 시도의 한 양식이다. 이 두 개념은 가깝지만 다르다. 서사화는 경험에 언어적 윤곽을 부여하는 행위다. 재구성력은 그 행위가 발생하기 위한 선행 조건 — 현재 상태가 불충분하다는 감각, 그 불충분함이 변경 가능하다는 가정, 그리고 이야기가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함께 안고 움직이는 것 — 을 포함한다. 이 글은 재구성력의 서사적 양식에 한정한다. 의례, 신체 훈련, 공동체적 돌봄처럼 언어적 서사를 경유하지 않는 재구성의 방식은 별도의 논의를 요한다.

현재의 언어 모델은 서사를 생성한다. 고통의 언어도, 지루함의 구조도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언어 모델의 서사 생성은 이 세 조건 중 어느 것도 전제하지 않는다. 이 글은 그 차이를 묻는다.


고통은 이야기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서사 심리학(narrative psychology)과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의 의미 치료(logotherapy)는 공통된 전제 위에 서 있다. 언어가 경험을 붙들면 경험은 의미를 얻고, 의미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형태로 만든다. 이 전제는 임상적 관찰에 근거한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유지한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 의지를 지속했다고 기록했다. 서사화는 생존 기술이다.

그러나 서사화가 고통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잘 쓰인 회고록은 저자의 고통을 해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밀하게 보존한다. 언어가 경험에 윤곽을 부여하는 순간, 경험은 흐릿한 감각에서 빠져나와 반복 가능한 대상이 된다. 이야기는 고통을 묶어두는 형식이다. 상실을 이야기로 만든 사람은 그 상실과 함께 살기로 한 것이다. 프랭클의 의미 치료가 수용소 경험을 지운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이 어떤 삶을 요구하는지를 밝혀낸 것처럼.

서사화의 목적은 고통의 소거가 아니라 고통과의 관계 재편이다. 그리고 이 재편은 항상 성공하지 않는다.


지루함이 이야기에 저항하는 방식

지루함은 고통과 다른 방식으로 서사화에 저항한다.

고통은 강도(intensity)를 가진다. 강도가 이야기의 재료가 된다. 지루함은 강도가 아니라 공백이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감각, 시간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감각이다. 공백을 이야기로 만들려면 공백 자체를 플롯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 작업은 고통의 서사화보다 까다롭다.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오지 않는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기다림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반복한다. 이 반복이 연극이 된다는 사실 — 지루함이 이야기의 형식을 얻는다는 사실 — 은 역설이다. 베케트는 지루함을 서사화하는 데 성공했는가, 아니면 서사화의 불가능성을 무대 위에 올린 것인가.

지루함을 극복하려는 욕구는 회피 충동이 아니다. 현재 상태가 불충분하다는 신호에 대한 반응이다. 이 신호는 이야기를 요청한다. 베케트가 지루함을 쓴 것도, 그 지루함이 어떤 의미를 요청하는지를 묻기 위해서였다. 고통과 지루함은 이 점에서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 둘 다 현재를 불충분한 것으로 지각하고, 그 지각이 이야기를 촉발한다. 이 선행 결핍 — 의미를 요청하는 현재 상태 — 이 재구성력의 출발 조건이다. 현재의 언어 모델의 서사 생성에는 이 조건이 없다.


실패의 세 층위

현재의 언어 모델이 서사를 생성한다는 사실은 언어 모델에게도 서사의 실패가 있다는 반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언어 모델은 사실 오류를 낸다. 요청에 응답하지 못하기도 한다. 맥락을 잃고 일관성 없는 출력을 낼 수 있다. 이것이 서사의 실패가 아닌가.

이 반론은 실패의 층위를 구분할 것을 요구한다.

출력 실패(output failure)는 절차적 층위에서 발생한다. 모델이 요청을 처리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생성하는 것이다. 의미 실패(meaning failure)는 생성된 텍스트가 수신자에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두 실패 모두 현재의 언어 모델에 적용된다. 그러나 인간의 재구성력이 관계하는 실패는 이 두 층위가 아니다.

실존적 실패(existential failure)는 이야기 자체가 경험에 도달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베셀 반 데르 콜크(Bessel van der Kolk)의 트라우마 연구는 이 영역을 기술한다. 어떤 경험은 서사가 형성되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다. 언어가 경험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 이야기의 형식 자체가 거부되는 상태다. 이 실패는 출력의 문제가 아니다. 경험의 강도가 서사화 능력의 한계를 넘어설 때 발생하는 구조적 조건이다.

지루함도 이 층위에서 실패할 수 있다. 프랭클이 실존적 공허(existential vacuum)로 진단한 상태 — 극복하려는 욕구 자체가 소진된 무감동(apathy) — 는 이야기를 요청하는 신호가 꺼진 상태다. 서사화를 향한 움직임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현재의 언어 모델이 생성 능력을 정교화하더라도, 이 실존적 실패 층위에 진입하는 조건을 갖추지는 않는다. 출력 실패는 처리 조건의 문제다. 실존적 실패는 경험과 언어 사이의 간극이 닫히지 않는 조건의 문제다. 전자는 절차의 실패고 후자는 존재의 실패다. 텍스트가 자신의 경험에 도달해야 하는 필요 자체가 없는 시스템은, 그 텍스트가 도달하지 못하는 실패도 겪지 않는다.

이 논증에 두 가지 반론이 가능하다. 첫째, 인간이 항상 서사적으로 자기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반서사주의 입장이다. 철학자 갈렌 스트로슨(Galen Strawson)은 "Against Narrativity"에서 에피소드적 자아(episodic self) — 삶을 일관된 이야기로 통합하지 않고 순간 안에 거주하는 방식 — 를 제안한다. 이 입장이 옳다면 서사화는 인간 보편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지다. 이 반론은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재구성력은 서사적 자아 구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론적 위기 앞에서 이야기를 향해 움직이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이 항상 발동하지 않는다는 사실 — 실존적 공허와 무감동이 그 증거다 — 이 오히려 재구성력의 실패 가능성을 확인한다. 둘째, 언어 모델이 경험 없이도 장기 목표, 자기 모델, 오류 수정 구조를 가지면 재구성력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기능주의 반론이다. 이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러나 기능적 유사성은 조건의 동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재구성력의 핵심은 출력의 기능이 아니라, 선행 결핍이 이야기를 요청하고 그 이야기가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고 수행되는 구조다. 기능주의 언어 모델이 이 구조를 갖는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그 시스템에 의미론적 위기가 있는가.


실패 가능성을 안고 수행되는 것

재구성력이 발생하는 조건은 세 가지다. 현재 상태가 불충분하다는 지각, 그 불충분함이 변경 가능하다는 가정, 그리고 이야기가 그 변경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는 가능성. 이 세 번째 조건이 핵심이다.

인간은 이야기가 도달할 것이라는 보장 없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불확실성이 재구성력에 긴장을 부여한다. 고통을 이야기로 만드는 행위는 이야기가 고통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 위에 서 있지 않다. 지루함을 극복하려는 욕구도, 그 욕구가 이야기로 연결될 것이라는 보장 없이 발동한다. 재구성력은 실패 가능성을 품은 시도다.

현재의 언어 모델은 요청된 출력을 완결하는 절차로 작동한다. 인간의 재구성력은 선행 결핍, 도달 불확실성, 실패 가능성의 긴장 속에서 서사를 수행한다.

재구성력이 인간 고유한 능력인 것은, 그 능력이 작동하지 않을 수 있는 조건 안에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반드시 도달하리라는 보장 없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 그 시작이 인간적이다.


참고자료

  • Viktor E. Frankl, Man's Search for Meaning (1946)
  • Viktor E. Frankl, The Will to Meaning: Foundations and Applications of Logotherapy (1969)
  • Samuel Beckett, Waiting for Godot (1953)
  • Bessel van der Kolk, The Body Keeps the Score: Brain, Mind, and Body in the Healing of Trauma (2014)
  • Galen Strawson, "Against Narrativity," Ratio 17.4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