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었다”는 말 뒤에 남는 것
배신의 이름을 얻기 전에
배신은 한 사람의 성품만으로 설명될 때 판단은 쉬워지지만, 그 배신이 발생한 조건은 흐려진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2025)에서, 유만수는 해고 통보를 받기 직전 동료들을 위한 항의 연설을 준비한다. 손바닥에 단어를 써 가며, 노동자를 해고하는 일을 도끼로 목을 날리는 것에 비유하는 연설이다. 미국인 담당자는 “No other choice”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뜬다. 만수는 해고된다. 그가 배신할 수 없다고 버텼던 동료들보다 더 빠르게.
원작 소설 The Ax가 1990년대 미국의 재취업 경쟁을 살인 서사로 구성했다면, 영화는 그 구조를 2020년대 한국의 자동화와 고용 불안 속으로 옮겨 놓는다. 이 맥락에서 만수의 살인은 재취업 경쟁이 한 인간에게 제공하는 언어와 명분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읽힌다.
1년 뒤 만수는 가짜 구인 광고를 만들어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수집하고, 그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한다. 그가 죽이는 사람들 가운데 고시조는 실직 후 구둣가게에서 일하며 딸을 키우는 아버지다. 만수와 거의 같은 처지의 사람이다. 만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죽인다. 나중에 그는 말한다. 어쩔 수 없었다고.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장면이 마주 선다. 첫 장면에서 만수는 같은 처지의 동료들을 배신하길 거부한다. 두 번째 장면에서 만수는 같은 처지의 사람을 죽인다. 두 사건의 대상은 개인적 신뢰보다 같은 위험의 공유로 묶인 사람들이다. 이 글이 따라가는 “배신”은 그 위치에서 발생한다. 누군가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최소 연대를 위반하고, 그 위반을 선택보다 불가피성의 언어로 서술하는 자리.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문장의 설득력
배신을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은 성품론이다. 배신한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배신은 위기가 드러낸 진짜 모습이며, 선한 사람이라면 같은 상황에서도 달리 행동했을 것이다.
이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있다. 배신은 어떤 약속이나 기대가 있던 자리에서만 성립한다. 처음부터 어떤 연대도 기대되지 않았다면, 그 연대를 깨는 행위도 배신이라 부를 수 없다. 즉 배신자는 한때 어떤 형태로든 신뢰를 받은 사람이었고, 그 신뢰를 이용했다는 사실이 성품의 결함이 잠재해 있었다는 추론을 강화한다. 또한 성품론은 미래를 예측하게 해준다. 이런 사람은 또 배신할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판단은 피해자가 자신을 보호하는 합리적 반응이다.
만수에게 이 틀을 적용하면 일관된 설명이 나온다. 그는 평소에 동료들을 아끼고 연설까지 준비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해고된 뒤에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살해했다. 성품론은 이것을 설명한다. 만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고, 표면의 선량함 아래 생존 본능이 먼저였다.
이 설명은 일정한 힘을 가진다. 그러나 결정적 공백이 남는다.
위치는 성품이 향하는 대상을 바꾼다
성품론의 공백은 만수가 해고되기 직전까지 같은 처지의 동료들에 대한 연대를 지키려 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 항의 연설이 성과 없이 끝났더라도, 그 시점의 만수는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거부했다. 무언가가 그 이후에 달라졌다.
달라진 것은 위치다.
위치는 한 사람이 관계 안에서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잃을 수 있으며, 누구에게 책임을 느끼는가를 결정하는 좌표다. 만수가 취업자였을 때 그의 책임 범위는 회사와 동료를 포함했다. 해고된 뒤 그 범위는 가족과 집으로 좁아졌다. 충성이 이행될 수 있는 조건이 달라졌다.
이 변화 안에서 영화의 두 장면은 같은 사건의 두 모드로 드러난다. 첫 장면에서 만수는 회사가 요구하는 동료 해고 명단을 거부함으로써 같은 처지의 노동자에 대한 연대를 지킨다. 두 번째 장면에서 만수는 같은 처지의 노동자인 고시조를 죽임으로써 같은 연대를 깬다. 두 행위의 대상은 개인적 친분 바깥에 있다. 회사의 명단 위에 이름이 오를 수 있는 사람들, 만수의 자리를 두고 같은 시장에 던져진 사람들이다. 첫 장면에서 만수는 그들의 이름을 적기를 거부했고, 두 번째 장면에서 만수는 그들의 자리를 직접 비웠다. 거부와 수행 사이를 가른 것은 만수의 위치다.
경쟁자 고시조를 만났을 때 만수는 그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버지임을 알아본다. 만수에게도 공감은 있었다. 그 공감에도 행위는 일어났다. 이 장면이 성품론의 설명력이 닿지 않는 지점이다. 만수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었다면 공감 자체가 발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공감이 있었고, 그 공감보다 위치의 압력이 강하게 작동했다.
성품론은 여기서 더 강한 형태로 되돌아올 수 있다. 공감이 있었는데도 자기보존이 행위를 지배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품의 결함이라는 반론이다. 이 반론은 타당한 압력을 가진다. 그 결함이 언제, 누구를 향해, 어떤 명분 아래 작동하기 시작했는지를 설명하려면 위치 변화의 분석이 필요하다.
위치의 변화는 성품이 발현되는 조건의 범위를 바꾼다.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도, 어떤 위치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성품이 누구를 향해 작동하는지가 달라진다. 영화 결말에서 만수가 홀로 관리자로 앉아 있는 공장은 인간 노동자가 하나도 없는 완전 자동화된 라인이다. 그는 배신의 산물로 얻은 자리에서, 처음 자신을 배신했던 구조의 일부가 된다. 위치가 어떻게 사람을 재편하는지를 박찬욱은 이 엔딩 하나로 말한다.
불가피성의 언어는 책임을 상황 쪽으로 옮긴다
배신한 사람은 대개 자신을 배신자보다 희생을 감수한 사람으로 경험한다.
만수는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라는 정체성을 유지한다. 이 두 사실이 동시에 성립하려면, 살인이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서사가 필요하다. 이때 “어쩔 수 없었다”는 언어가 들어온다. 이 언어는 두 정체성을 모순 없이 유지하기 위한 내러티브 장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언어가 회사에서 먼저 나왔다는 점이다. 처음 그를 해고한 회사가 이 말을 썼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만수는 자신을 공격한 쪽의 언어를 가져와, 자신의 행위를 방어하는 도구로 전용한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언어를 내면화하고, 그것으로 다음 피해자를 만든다.
만수의 자기합리화 안에서 두 작업이 동시에 일어난다. 행위의 책임을 상황 쪽으로 옮기는 작업과, 자신이 일관된 인격이라는 감각을 유지하는 작업이다. 스스로를 단지 나쁜 사람이라고 부르는 행위자는 드물다. 행위자들은 대개 자신에게는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은 성품론과 양립한다. 배신의 도덕적 평가는 행위자의 자기서술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구조를 만수에게만 고유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상황이 그랬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더 큰 책임을 택했다”라는 표현들은 다른 배신의 자리에서도 들리는 언어다. 만수의 사례는 그 언어가 가해자의 입에서 피해자의 입으로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한 인물 안에서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사례를 보편 구조의 증거로 격상시키는 것은 다른 작업이고, 그 작업은 이 글의 범위 바깥에 둔다.
배신당한 사람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은 때로 배신 자체보다 그 이후의 자기정당화다. 배신한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믿거나 믿으려 한다는 사실이 더 단단한 고통을 만든다. 공유했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무너졌는데, 무너뜨린 쪽은 그 세계가 자신에게도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책임 판단은 이해를 통과해 더 구체화된다
여기까지의 분석은 한 가지 반론에 부딪힌다. 만수와 고시조 사이에 개인적 신뢰가 없었다면, 만수의 행위에는 배신이라는 이름보다 경쟁 폭력 또는 살인이라는 이름이 더 정확한가. 배신이라는 이름을 굳이 붙이는 것이 사건의 무게를 분산시키는가.
이 반론은 “배신”을 개인적 약속의 위반으로만 정의할 때 성립한다. 같은 시장에 던져진 사람들 사이에는 개인적 약속과 다른 종류의 기대가 있다. 같은 위험을 공유한 사람들끼리는 서로의 자리를 폭력으로 비우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연대. 그 기대의 출처는 친분보다 처지의 상호 인식에 있다. 만수가 첫 장면에서 동료 해고 명단을 거부할 때 작동했던 것이 바로 이 연대다. 그 연대가 명시적 사회 약속의 형태를 갖추지 않아도, 그 연대를 깨는 행위는 단순한 경쟁이나 단순한 살인과 구분되는 위반의 성격을 가진다. 만수가 고시조를 죽일 때 그는 인간이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보편 규범과, 같은 처지의 사람을 같은 처지의 사람이 제거해서는 안 된다는 연대의 규범을 함께 위반한다. 살인은 그 위반의 극단적 형식이다. 이 사건에는 두 위반이 겹쳐 있고, 배신은 그 가운데 한 층위를 가리킨다.
위치 분석은 책임 판단을 더 구체화한다. 위치가 선택의 조건을 만들지만, 그 조건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행위자다. 만수에게도 선택지는 있었다. 산업을 바꾸거나, 더 낮은 출발점을 받아들이거나, 상실을 상실로 받아들이는 것. 영화는 그 가능성을 열어 둔다. 만수는 그 가능성을 외면했거나 끝내 보지 못했다. “이 업계를 잃으면 의미도 잃는다”는 그의 내적 명제가 스스로 선택의 지형을 좁혔다. 구조가 압박하더라도, 그 압박에 굴복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감정 이입은 배신의 이해에서 복수의 위치를 동시에 보는 능력을 수행한다. 배신당한 자가 경험하는 것—연대의 세계가 무너지는 충격, 공유했다고 믿었던 자리가 상대에게는 달랐다는 발견—과, 배신한 자의 조건—위치 변화가 만들어낸 압박, 자기합리화가 채워야 했던 정체성의 공백—을 동시에 볼 때, 배신이 얼마나 인간적인 사건인지가 보인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이해 가능하다는 의미이고, 그 의미는 정당성과 분리된다.
〈어쩔수가없다〉가 불편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객은 만수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그를 이해하게 된다. 그 이해와 동시에 이해하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 만수는 홀로 축배를 든다.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지운 것들은 스크린 밖에도 남는다.
배신을 성품의 결함으로 부르는 일은 피해자에게 납득을 준다. 그 납득은 필요하다. 조건 분석은 판단의 근거를 더 두텁게 만든다.
참고자료
- CJ ENM, 〈No Other Choice〉 공식 영화 정보 페이지.
- 박찬욱 감독, 〈어쩔수가없다〉(No Other Choice), CJ ENM, 2025.
- Donald E. Westlake, The Ax, Mysterious Press, 1997. (원작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