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의 성공과 규범 언어의 환원 불가능성
우리는 인간을 점점 더 잘 설명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감정은 신경전달물질의 변동으로, 선택은 진화적 적응의 흔적으로, 성향은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습관은 데이터의 패턴으로 서술된다. 누군가 분노를 터뜨리면 우리는 먼저 의지의 타락보다 스트레스와 피로, 호르몬과 환경을 떠올린다. 누군가 우울에 빠지면 영혼의 병보다 신경화학적 조건과 사회적 압박을 생각한다. 인간은 점차 신비로운 내면의 주권자가 아니라 분석 가능한 체계로 재기술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그렇게 인간을 물질적 과정의 산물로 설명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자신의 삶을 말할 때 여전히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후회를 말하고, 책임을 묻고, 의미를 찾고, 존엄을 주장한다. 배신당했을 때 도파민 회로의 교란만을 말하지 않는다. 사랑을 선택했을 때 적응 전략의 자동 실행만을 고백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왜 그렇게 했는가"를 묻고, "그래서는 안 되었다"를 말하며, "그럼에도 감당해야 한다"는 문장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 병존은 사유의 불철저함인가. 아니면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애초에 이중적인가. 이 글은 그 이중성이 단순한 모순이 아니라, 유물론적 설명이 정교해질수록 오히려 더 날카롭게 요구되는 구조적 조건임을 보이려 한다.
1. 두 언어의 정의
이 글에서 유물론적 관점이란 인간의 정신, 가치, 의식, 선택을 궁극적으로 물질적 과정의 산물로 이해하려는 입장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유물론은 엄밀한 형이상학 체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뇌과학, 진화생물학, 계산주의, 데이터 기반 자기이해를 통해 일상에 스며든 현대적 설명의 문법 전체를 포함한다. 이 용법은 폴 처치랜드가 전제한 "완성된 신경과학"이라는 강한 판본과도, 존 설이 의식을 생물학적 자연현상으로 다루는 비환원적 자연주의와도 구별된다. 이 글의 대상은 일상에 스며든 작동적 유물론, 곧 자기이해와 사회적 판단의 문법으로서의 유물론이다.
철학적 언어란 존재, 자유, 책임, 의미, 존엄, 목적처럼 인간 경험을 단순한 인과 기술이 아니라 해석과 규범의 차원에서 조직하는 언어를 뜻한다. 이 언어를 과학의 공백을 메우는 수사로 축소할 수도, 초월적 실체에 대한 기술로 격상할 수도 있다. 이 글은 두 극단 모두를 거부한다. 철학적 언어는 과학 이전의 잔재가 아니며, 그렇다고 과학 너머의 독립 영역에 관한 기록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설명 가능한 대상이면서 동시에 평가해야 하는 행위자로 살아가기 위해 실제로 사용하는 실천의 언어다. 이 실천의 언어를 이 글의 고정 정의로 삼는다.
2. 유물론적 문법의 일상화
앞의 정의가 성립한다면, 현대인이 어떤 의미에서 이미 유물론적 문법 속에 살고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오늘날 자기이해는 점점 더 측정 가능한 것의 언어로 옮겨간다. 수면 시간, 심박 변이도, 호르몬 변화, 주의력 패턴, 소비 기록, 검색 이력, 감정 추적 데이터가 인간을 설명하는 재료가 된다. 사람은 자신의 슬픔을 그저 "슬프다"고 말하기보다 번아웃, 세로토닌, 트라우마 반응, 애착 유형 같은 틀로 재서술한다. 어떤 행동을 설명할 때 "의지가 약했다"보다 "실행 기능이 저하된 상태였다"가 더 정확한 기술로 받아들여진다. 관계의 파탄을 말할 때 "배신"보다 "회피형 애착의 귀결"이 더 정당한 설명으로 통용된다.
이런 변화는 공허한 환상이 아니다. 유물론적 재기술은 과거라면 도덕적 결함으로 판정되었을 고통을 치료 가능한 상태의 언어로 바꾸었다. 우울증은 게으름이 아니며, 주의력 결핍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유물론적 재기술은 인간을 비난과 미신의 대상으로 두지 않고, 원인과 조건의 맥락 속에 다시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해방적 성격을 갖는다. 여기까지는 분명하다.
그러나 바로 그 성공 때문에 더 날카롭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원인을 더 잘 안다고 해서, 그 삶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함께 알게 되는가. 수면 부족이 짜증의 원인임을 안다고 해서, 그때 타인에게 던진 말의 정당성이 해소되는가. 분노의 진화적 기원을 안다고 해서, 그 분노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야 하는지가 결정되는가. 설명이 촘촘해질수록 이유를 요구하는 두 번째 언어는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분명한 형태로 요청된다.
3. 설명과 이해의 층위
앞 절의 관찰이 사유의 일관성 문제로만 보일 수 있다면, 이제 그것이 오래된 철학적 구분의 현대적 재출현임을 드러내야 한다. 근대 이후의 인문학과 철학은 설명과 이해의 긴장을 줄곧 사유해 왔다. 빌헬름 딜타이는 자연과학의 설명(Erklären)과 정신과학의 이해(Verstehen)를 구별하며, 인간 삶은 단지 인과적 연쇄로 기술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 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윌프리드 셀러스는 우리가 일상에서 자신과 세계를 파악하는 현상적 이미지와 과학이 제시하는 과학적 이미지 사이의 긴장을 근대 철학의 중심 과제로 세웠다. 이 구분은 과학을 폄하하는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설명의 성공이 곧 삶의 자기이해를 완결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구조적 지도다.
이 구분을 가장 첨예하게 제기한 것은 토마스 네이겔이다. 「박쥐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서 그는 박쥐의 신경구조와 초음파 수용 체계를 아무리 상세히 기술해도 박쥐로서 존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논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학의 부족함이 아니다. 문제는 층위의 차이다. 어떤 상태가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한 3인칭적 설명과, 그 상태가 주체에게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대한 1인칭적 이해는 같은 문장으로 닫히지 않는다. 통증의 생리학은 고통의 조건을 기술할 수 있지만, "아프다"라는 경험의 질감 자체를 소거하지는 못한다.
네이겔의 논의는 의식의 신비화로 미끄러질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비판되어 왔다. 그러나 이 글의 맥락에서 그의 공헌은 의식의 존재론이 아니라 서술의 문법에 있다. 어떤 사람이 반복적으로 분노를 터뜨리는 이유를 뇌의 충동 조절 문제나 성장 환경의 상처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하자. 그 설명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타인에게 가한 상처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사과하고 변화할 것인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설명은 원인을 밝히지만, 삶은 이유를 요구한다. 전자는 "무엇이 이런 결과를 낳았는가"를 묻고, 후자는 "나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판단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 둘은 연결되어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
4. 가장 강한 반론 — 제거주의적 유물론
앞 절의 층위 구분이 성립한다면, 이제 그 구분 자체를 거부하는 반론을 정면으로 상대해야 한다. 이 글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반론은 "과학이 아직 미완성이기 때문에 철학적 언어가 남아 있다"는 약한 형태의 반론이 아니다. 그보다 강한 반론은 철학적 언어가 어떤 실재적 차원을 기술한다는 전제 자체를 거부한다. 이것이 제거주의적 유물론의 입장이다.
폴 처치랜드와 패트리샤 처치랜드는 믿음, 욕구, 의도, 책임 같은 일상 개념의 체계—이른바 민간심리학(folk psychology)—이 세계의 실제 구조를 설명하는 이론으로서는 실패한 이론이며, 성숙한 신경과학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 주장했다. 과거에 공기를 "플로지스톤"으로, 열을 "칼로릭"으로 설명했듯, "의지"나 "책임" 같은 개념도 언젠가 폐기될 낡은 이론의 잔재라는 것이다. 알렉스 로젠버그는 이를 더 밀어붙여 "과학적 허무주의(scientific nihilism)"를 선언했다. 그에게 물리학이 실재의 근본 설명인 한 의미, 목적, 도덕적 책임은 모두 환상이다. 인간은 의미를 산출하지 않는 물질적 과정의 국소적 배열일 뿐이며, 의미를 느끼는 일조차 진화적 유용성이 남긴 심리적 부산물에 불과하다.
이 반론은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 처치랜드와 로젠버그의 논리는 단순하지 않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된다. 첫째, 물리학과 신경과학은 세계의 근본 수준에 대한 최선의 설명이다. 둘째, 그 근본 수준에서 "책임"이나 "의미"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그러므로 이 개념들이 지시한다고 여겨지는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넷째, 그것들은 사회적으로 유용할지 모르나 궁극적으로는 환상이다. 이 논증은 과학의 권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절약의 원리에 기반해 있다. 세계를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은 존재자는 가정하지 말라는 오컴의 면도날이, 여기서는 규범적 개념 일반을 향해 휘둘러진다.
이 반론의 강력함은 경멸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다. 제거주의는 자기지시적 부담을 떠안는다. "책임"과 "의미"가 환상이라고 주장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책임과 의미의 언어 안에서 수행된다. 주장은 참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참/거짓의 규범은 환상이 아닐 때에만 작동한다. 더 나아가 제거주의는 실천의 차원을 설명하지 못한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재판에 세우는 일이 환상이라 선언한다 해도, 어떤 사회도 그 선언만으로 법체계를 해체하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는 일이 생물학적 부산물이라 말한다 해도, 아무도 약속의 문법 바깥에서 살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불철저함이 아니다. 규범 언어가 단지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상호작용의 구조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제거주의가 제거하려는 것이 그렇게 쉽게 제거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표상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론의 부분적 타당성은 남는다. 처치랜드가 옳은 것은, 민간심리학적 개념들이 세계의 인과 구조와 정확히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지"가 뇌의 특정 영역과 단순 동일시될 수 없듯, 규범 언어는 세계의 구성요소를 직접 기술하는 언어가 아니다. 그러나 이 관찰은 규범 언어의 제거로 가지 않는다.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은 규범 언어의 기능을 다시 이해하는 일이다. 곧, 규범 언어는 세계의 요소를 기술하는 지도가 아니라, 인간이 서로에 대해 이유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기 위한 실천의 문법이라는 재규정이다.
5. 호환론의 우회
제거주의가 규범 언어를 직접 폐기하려는 기획이라면, 호환론은 그것을 자연의 질서 안에 위치시키려는 기획이다. 대니얼 데닛의 작업이 대표적이다. 그의 호환론은 자유를 모든 원인으로부터 벗어난 형이상학적 절대 자율성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자유는 결정론의 부정이 아니라, 복잡한 유기체가 진화 과정에서 획득한 예측, 반성, 자기조절, 결과 고려의 능력과 관련된다. 자유는 세계 밖에서 내려오는 초월적 특권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형성된 실천적 능력이다. 그것은 진화했고, 누적되었으며, 문화적으로 확장되었다.
이 관점에서 자유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자유를 파괴하는 대신 그 조건을 해명하는 작업이다. 어떤 유기체가 어떻게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내적 기준에 따라 선택하는 능력을 발전시키게 되었는지 밝히는 일은, 자유를 제거하는 작업이 아니라 자유의 실제 모양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 논의에서 자유는 원인 없는 선택이 아니라, 이유에 반응하고 행위를 수정할 수 있는 진화된 능력으로 다시 정의된다.
그러나 바로 이 호환론은 스스로의 의도와 반대되는 귀결을 낳는다. 자유가 진화한 능력이라면, 그리고 그 능력이 이유에 반응하는 능력이라면, 이유의 공간은 설명 너머에 그대로 남는다. 어떤 능력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설명하는 것과, 그 능력을 가진 존재가 어떤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자유의 기원을 설명하는 언어와 자유를 귀속하는 언어는 겹치지만 일치하지 않는다. 데닛의 호환론은 유물론과 자유가 양립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양립의 구조는 정확히 이 글이 말하려는 것—설명의 층위와 규범의 층위는 서로를 대체하지 않는다—과 일치한다. 호환론은 자유를 구원하는 대가로 자유를 평가의 문법 안에 남겨 둔다. 그러므로 호환론이 승리할 때에도 철학적 언어는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제자리를 얻는다.
여기에 갈렌 스트로슨의 강한 회의론이 또 다른 반론으로 끼어든다. 스트로슨은 어떤 행위에 대해 궁극적으로 책임을 지려면 자기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형성한 존재여야 하는데, 그런 자기창조는 불가능하므로 궁극적 책임은 환상이라고 논한다. 이 논증은 날카롭지만, 여전히 같은 구조를 드러낸다. 스트로슨이 부정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절대적인 자기원인으로서의 자유이지, 이유의 공간에서 행위를 조정하고 타자와 이유를 주고받는 실천으로서의 책임이 아니다. 결국 형이상학적 자유의지가 증명되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서로를 이유의 상대로 대하는 실천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유의 형이상학과 책임의 실천은 다른 작업이다.
6. 실천의 문법으로서의 철학
이 구분을 가장 밀도 있게 사유한 것이 찰스 테일러, 해리 프랭퍼트, 버나드 윌리엄스의 작업이다. 이들의 논의는 이 글의 논제를 세 각도에서 지탱한다.
테일러는 인간을 "자기해석적 동물"로 규정한다. 인간의 정체성은 중립적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것을 더 중요하고 더 높은 것으로 평가하는가의 구조—그가 "강한 평가(strong evaluation)"라고 부른 것—로 구성된다. 배고픔을 채우려는 욕구와 약속을 지키려는 의무는 질적으로 다른 층위에 놓인다. 이 차이를 단순한 욕구 강도의 차이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인간 행위의 구조 자체를 왜곡한다. 강한 평가의 언어 없이는 "자부심", "수치", "존엄" 같은 경험 자체가 기술 불가능해진다. 테일러의 논점은 규범 언어가 인간 경험의 문법에 구조적으로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랭퍼트는 이 구조를 더 날카롭게 분석한다. 그에게 인격이란 1차적 욕구—무엇을 원하는가—와 2차적 욕구—무엇을 원하기를 원하는가—의 구분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다. 중독자와 자유로운 행위자의 차이는 1차적 욕구의 강도가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욕구할 것인가의 판단이 작동하는지 여부에 있다. 이 구조는 뇌의 회로로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설명은 2차적 평가의 자리를 없애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이 정교해질수록 "나는 어떤 욕구를 가진 존재이기를 원하는가"라는 물음의 자리는 더 뚜렷해진다.
윌리엄스는 여기에 도덕적 운(moral luck)과 내재적 이유(internal reasons)의 논의를 더한다.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조건에 의해 판단되며, 그럼에도 그 판단을 회피할 수 없다. 최선의 주의를 기울이고 운전한 사람조차 자신의 차가 아이를 친 뒤에는 "그럼에도 내가 그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사실을 감당해야 한다. 이 감당은 과학적 책임 판정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의 형식이며, 이 형식 없이 인격은 유지되지 않는다. 윌리엄스가 보여 주는 것은 규범 언어가 외부적 심판의 언어이기 이전에 1인칭의 자기관계의 언어라는 점이다.
이 세 논의는 공통된 구조를 가리킨다. 규범 언어는 과학이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을 기술하는 독립적 지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서로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묻는 실천을 구성하는 문법이다. 이 문법 없이 사랑이나 배신, 약속이나 용서, 존엄이나 수치 같은 경험은 기술 불가능해지며, 그 경험이 기술되지 않는 한 인간의 사회적 삶도 유지되지 않는다. 규범 언어는 사회 제도의 장식이 아니라 사회 제도의 조건이다.
7. 두 언어를 함께 사유하기
설명과 이해는 같은 일이 아니다. 원인을 아는 것과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서로 다른 층위의 작업이다. 전자는 사건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유능하다. 후자는 행위를 정당화하고 비판하며 함께 살아갈 기준을 세우는 데 필요하다. 인간 사회는 후자 없이 유지되지 않는다. 약속, 책임, 신뢰, 비난, 용서, 존엄 같은 말들이 모두 환상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우리는 더 진실한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삶의 구조를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유물론적 관점과 철학적 언어의 병존은 모순도 위선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애초에 하나의 언어로만 닫히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의 징후다. 인간은 분명 물질적 과정의 일부다. 그는 신경과 몸, 환경과 역사, 생물학과 제도의 얽힘 속에 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 얽힘을 해석하고, 자신의 행위를 평가하며,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묻는 존재다. 이 두 번째 측면은 과학 이전의 잔재가 아니라 과학 이후에도 남는 인간 조건의 형식이다.
이 글이 남기는 판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어떤 개념이 자연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그 개념이 사회적 실천에서 불필요해지는가 하는 물음과 다른 물음이다. 제거주의가 묻는 것은 전자이고, 실천의 문법이 묻는 것은 후자다. 철학적 언어를 둘러싼 논쟁을 평가할 때, 먼저 구분되어야 하는 것은 어느 물음이 제기되고 있는가다. 설명의 성공은 이해의 필요를 없애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이 정교해질수록, 무엇이 설명의 층위이고 무엇이 평가의 층위인지를 구분할 책임은 더 무거워진다. 현대의 과제는 유물론을 더 철저히 밀어붙이는 일이 아니다. 유물론의 성공 이후에도 환원되지 않는 두 번째 언어를, 신비화 없이, 그러나 축소 없이 어떻게 다시 사유할 것인가가 지금의 과제다. 이 글은 그 과제의 입구에 멈춰 선다. 입구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설명 이후에 남는 말은 과학이 놓친 잔여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져야 하는 책임의 문법이다.
참고자료
Wilhelm Dilthey, Introduction to the Human Sciences.
Wilfrid Sellars, "Philosophy and the Scientific Image of Man," in Science, Perception and Reality.
Thomas Nagel, "What Is It Like to Be a Bat?"; Mind and Cosmos.
Paul M. Churchland, Matter and Consciousness.
Patricia S. Churchland, Touching a Nerve: The Self as Brain.
Alex Rosenberg, The Atheist's Guide to Reality.
Daniel C. Dennett, Freedom Evolves.
Galen Strawson, "The Impossibility of Moral Responsibility," Philosophical Studies.
Charles Taylor, Sources of the Self; "What Is Human Agency?"
Harry G. Frankfurt, "Freedom of the Will and the Concept of a Person"; The Reasons of Love.
Bernard Williams, Ethics and the Limits of Philosophy; "Moral L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