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의 성숙
축적 너머의 형식에 관하여
우리는 축적의 시대에 살고 있다. 데이터는 쌓이고, 자본은 불어나며, 경험은 아카이브되고, 정체성은 이력서처럼 두꺼워진다. 이 세계에서 소멸은 거의 본능적으로 상실과 등치된다. 무언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빈곤해진다는 것이고, 줄어든다는 것은 퇴행한다는 것이며, 비워진다는 것은 결핍된다는 것이라는 등식이 거의 의심 없이 작동한다. 그러나 이 등식은 정말로 자명한가. 혹시 우리는 축적 그 자체를 선(善)으로 전제하는 하나의 존재론적 편향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에세이는 소멸을 빈곤이 아닌 절제로, 상실이 아닌 성숙으로 다시 읽으려는 시도이다. 다만 여기서 '소멸'이란 모든 사라짐 일반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자발적이고 반성적인 형식적 소거, 즉 축적의 경험을 통과한 뒤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의식적 비움이다. 강요된 빈곤이나 비자발적 박탈과 이 비움을 혼동하는 것은 이 글이 경계하는 첫 번째 오류이며, 이 구별은 끝까지 유지될 것이다.
1. 과잉의 두 얼굴 — 병리로서의 소진과 구조로서의 탕진
한병철(Byung-Chul Han)은 현대 사회를 '긍정성의 과잉'이 지배하는 피로사회로 진단한다. 부정성이 추방된 세계에서 주체는 끊임없이 생산하고, 수행하고, 소통한다. 면역학적 타자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동일자의 자기착취이며, 과잉 긍정은 역설적으로 존재를 소진시킨다. 한병철에게 과잉은 풍요가 아니라 질식이고, 소진은 치유되어야 할 병리이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의 과잉은 이와 방향이 다르다. 바타유는 『저주의 몫』에서 경제를 축적이 아닌 비생산적 소비(dépense)의 관점에서 재구성했다. 태양은 대가 없이 에너지를 쏟아붓고, 생명은 그 과잉을 죽음과 성애와 축제를 통해 소진한다. 바타유에게 과잉 에너지의 문제는 어떻게 더 축적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탕진할 것인가이다. 소진은 병리가 아니라 체계가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구조적 작동이다.
두 사상가는 모두 축적의 무조건적 긍정성을 의심한다는 점에서 교차하지만, 과잉에 대한 처방은 정반대이다. 한병철 쪽에서 소진은 멈춰야 하는 것이고, 바타유 쪽에서 소진은 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이 글의 논제에 중요한 갈림길을 만든다. 이 글이 말하는 '소멸'은 바타유적 탕진 — 과잉 에너지의 황홀한 방출 — 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축적의 논리 자체에 대한 반성적 거리 확보에 가깝다. 탕진은 축적의 이면이지만 여전히 축적의 논리 안에 있다. 탕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축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이 탐색하는 소멸은 축적-탕진의 순환 자체를 벗어나는 형식적 전환이며, 그 전환의 첫 번째 철학적 범형을 하이데거의 Gelassenheit에서 찾을 수 있다.
2. 내려놓음의 존재론 — 하이데거의 Gelassenheit
그렇다면 과잉에 대한 응답이 탕진도 아니고 단순한 중단도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태도인가. 마르틴 하이데거는 후기 사유에서 Gelassenheit, 즉 '내려놓음' 혹은 '초연한 내맡김'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은 의지의 포기가 아니라 의지함 자체를 의지하지 않는 태도, 표상적 사유의 장악 욕구를 내려놓는 사유의 전환이다.
기술 시대의 몰아세움(Ge-stell)은 존재자를 부림감(Bestand)으로 환원하여 축적과 동원의 대상으로 삼는다. 강은 수력 발전의 자원이 되고, 숲은 목재의 재고가 되며, 인간조차 인적 자원으로 관리된다. 이 동원의 논리에서 존재는 언제나 '무엇을 위한 것'으로만, 즉 축적 가능한 것으로만 현현한다. Gelassenheit는 이 동원의 논리 바깥에서 존재가 스스로 도래하도록 내버려두는 태도이다.
여기서 핵심은 Gelassenheit가 수동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의지적 장악의 포기를 통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더 근원적인 수용성이다. 하이데거가 '사유의 들판 사잇길'에서 묘사하는 것은 주체가 대상을 표상하기를 그치는 순간, 사물이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서 현현하는 경험이다. 장악하는 손을 거둘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있다 — 이것은 소멸이 존재의 감소가 아니라 존재의 다른 개시 방식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축적의 논리에서 보면 내려놓음은 손실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그것은 오히려 표상적 사유가 차단하고 있던 존재의 차원을 여는 행위이다. 소멸이 빈곤의 징후가 아니라 절제의 형식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전환 지점에서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Gelassenheit는 존재론적 사건이지, 윤리적 요청은 아니다. 주체가 자기를 비움으로써 타자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논의는 시몬 베유와 레비나스의 윤리적 사유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3. 탈창조의 윤리 — 자기 비움이 타자를 위한 자리가 되는 순간
시몬 베유(Simone Weil)의 décréation(탈창조)은 소멸의 사유를 존재론에서 윤리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베유에게 창조란 신이 자기를 물러나게 함으로써, 즉 자기 존재의 일부를 비움으로써 세계에 자리를 내주는 행위이다. 이 신학적 직관을 인간 주체에 적용하면, décréation은 자아가 스스로를 비워냄으로써 타자와 세계가 존재할 공간을 마련하는 윤리적 운동이 된다.
베유의 사유에서 자아의 팽창은 곧 세계의 축소이다. 자아가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확장할수록, 타자는 자아의 투사와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세계는 자아의 서사 안에 편입되고, 타자의 고유한 이질성은 자아의 해석 틀 안에서 소멸한다. 반대로 자아가 자기를 지워나갈 때, 세계는 비로소 자아의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자기 부정이 아니라 자기 과잉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다.
그런데 왜 자기 비움은 단순히 주체 내부의 형식 변화에 그치지 않고, 타자를 위한 자리 비움이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 윤리학이 필요하다. 레비나스에게 타자의 얼굴은 나의 존재 권리 자체를 문제 삼는 호소이다. 주체성은 자기 동일성의 확보가 아니라, 타자 앞에서의 수동성, 대체 불가능한 책임의 수락을 통해 비로소 윤리적으로 구성된다. 레비나스의 주체는 자기를 세워서가 아니라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주체가 된다.
베유와 레비나스는 경로가 다르다. 베유의 비움은 존재론적이고 신학적이며, 자아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정화하는 데 초점이 있다. 레비나스의 비움은 윤리적이고 관계적이며, 타자의 호소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주체 해체에 초점이 있다. 그러나 두 사유는 결정적인 한 지점에서 수렴한다. 주체의 자기 축소가 윤리적 성숙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축적하는 자아는 타자를 대상으로 만들고, 비우는 자아만이 타자를 타자로 만날 수 있다. 이 구도에서 소멸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관계의 진정한 가능 조건이 된다.
4. 비움의 미학 — 형식의 자기반성으로서의 소거
소멸이 존재론적으로는 개시이고 윤리적으로는 관계의 조건이라면, 미학에서는 무엇인가. 이 물음이 필요한 이유는 미학이야말로 형식의 변화를 가장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중심 테제 — 소멸은 내용의 부재가 아니라 형식의 전환이다 — 는 미학적 사례에서 가장 감각적으로 증명된다.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에서 연주자는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침묵은 음악의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청중은 객석의 기침 소리, 공조기의 윙윙거림, 자기 자신의 호흡 같은 소리들을 처음으로 듣게 된다. 의도된 음향의 소거가 비의도적 음향의 존재론적 지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비움은 빈곤이 아니라 지각의 조건 자체를 재구성하는 작업이며, 이것은 하이데거의 Gelassenheit가 미학적 형식으로 현현한 경우에 해당한다. 표상적 장악을 거둘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있다는 원리가 여기서도 반복된다.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흰색 위의 흰색」이나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의 격자 회화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작동한다. 재현적 요소의 점진적 소거는 화면의 빈곤이 아니라, 시각적 과잉이 은폐하고 있던 지각의 조건 자체를 노출시키는 작업이다. 덜어냄은 형식의 퇴행이 아니라 형식의 자기반성이며, 축적된 표현들을 통과한 뒤에야 도달할 수 있는 형식적 성숙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통과한 뒤에야'라는 조건이다. 마틴의 격자가 성숙인 것은 추상표현주의의 과잉을 경유했기 때문이고, 케이지의 침묵이 침묵 이상인 것은 서양 음악의 음향적 축적 전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 캔버스와 축적을 통과한 뒤의 빈 캔버스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 미학적 원리는 삶의 형식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이 글의 답은 조건부 긍정이다. 예술 작품에서 소거가 성숙으로 읽히는 것은 그것이 자발적이고, 반성적이며, 축적의 경험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조건이 충족될 때 — 비움이 강요가 아니라 선택이고, 무지가 아니라 앎을 통과한 것이며, 축적의 가능성을 보유한 채 그것을 내려놓는 것일 때 — 삶의 소멸도 성숙의 형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소멸, 즉 비자발적이고 비반성적인 소멸은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5. 소멸의 경계 — 자발적 비움과 비자발적 박탈
여기서 이 글이 회피해서는 안 되는 반론을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 모든 소멸이 성숙은 아니다. 강요된 빈곤은 절제가 아니고, 사회적 배제는 내려놓음이 아니며, 기억의 훼손은 비움이 아니고, 생태적 파괴는 형식의 전환이 아니다. 빈곤선 이하의 삶에서 물질적 소멸을 '성숙'으로 읽는 것은 폭력적 오독이며, 알츠하이머에 의한 기억의 소멸을 '절제'로 포장하는 것은 윤리적 기만이다.
이 구별의 핵심은 주체의 선택 가능성에 있다. 이 글이 성숙으로 읽는 소멸은 축적의 가능성을 보유한 주체가 그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내려놓는 행위이다. 내려놓을 수 있는 자만이 내려놓음을 수행할 수 있다. 처음부터 가진 적이 없는 자에게 비움을 성숙이라 말하는 것은, 형식의 철학이 아니라 지배의 수사가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소멸의 성숙은 보편적 처방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축적의 구조적 가능성이 확보된 위치에서만 윤리적으로 유의미한 선택이며, 그 위치 밖에서는 소멸이 아니라 박탈에 대한 저항이 먼저 요구된다.
아울러 이 글이 말하는 소멸은 금욕주의와도 구별되어야 한다. 금욕주의는 육체나 욕망을 적대시하는 도덕적 프로그램이다. 이 글의 소멸은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형식적 전환이며, 무엇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의 형식이 더 이상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다른 형식을 탐색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소멸은 미니멀리즘 소비 트렌드와도 다르다. 물건을 줄이는 생활 양식은 대개 효율성이나 심리적 쾌적함을 목표로 하는데, 이것은 축적의 논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의 대상을 물질에서 경험이나 감정으로 대체하는 것에 가깝다. 이 글이 탐색하는 소멸은 축적 대상의 교체가 아니라 축적이라는 형식 자체에 대한 존재론적 반성이다.
6. 소멸의 성숙, 혹은 형식의 완성
이 글이 끝내 증명하려 한 것은 하나의 조건문이다. 소멸이 자발적이고, 반성적이며, 축적의 경험을 전제할 때, 그것은 빈곤이 아니라 형식의 전환이며, 상실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획득이다. 이 조건문의 전건이 충족되지 않을 때 — 소멸이 강요되고, 비반성적이며, 박탈의 결과일 때 — 같은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소멸 일반을 미화하는 것은 이 글의 의도가 아니며, 그렇게 읽혀서도 안 된다.
그러나 조건이 충족되는 곳에서, 소멸은 축적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을 연다. 장악을 거두면 사물이 스스로 나타나고(하이데거), 자아를 비우면 타자가 비로소 타자로서 현현하며(베유, 레비나스), 표현을 소거하면 지각의 조건 자체가 재구성된다(케이지, 마틴). 이 세 차원 — 존재론적, 윤리적, 미학적 — 은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적 원리의 상이한 발현이다. 그 원리란 이것이다: 축적이 의미를 생산하는 형식이라면, 의식적 비움은 축적이 차단하고 있던 의미를 해방하는 형식이다.
쌓아올린 것의 무게를 견디는 것은 힘이다. 그러나 쌓아올린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성숙이다. 이 성숙은 축적의 부정이 아니다. 축적을 통과하지 않은 비움은 아직 비움이 아니라 그저 텅 빔이기 때문이다. 소멸의 성숙은 축적의 완성에 가깝다 — 축적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기 너머의 형식을 허락하는 순간이라는 의미에서. 과잉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존재는 쌓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을 통해 자기에게 새로운 형식을 부여한다. 이 부여가 강요 없이, 반성 속에서, 축적의 기억을 간직한 채 이루어질 때, 그것을 우리는 성숙이라 부를 수 있다.
참고 문헌
Bataille, Georges. La Part maudite. Paris: Éditions de Minuit, 1949.
Han, Byung-Chul. Müdigkeitsgesellschaft. Berlin: Matthes & Seitz, 2010.
Heidegger, Martin. Gelassenheit. Pfullingen: Neske, 1959.
Levinas, Emmanuel.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La Haye: Martinus Nijhoff, 1974.
Weil, Simone. La Pesanteur et la Grâce. Paris: Plon,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