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원인이 아니라 조명이다
―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부치는 주석
1. 부고 앞에서 시작되는 예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의 장면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은 사람의 고통이 아니라 산 사람들의 반응으로 시작한다. 이 점이 잔인하다. 이반 일리치가 죽었다는 소식은 동료들에게 슬픔보다 먼저 계산을 불러온다. 누가 승진할 것인가. 어떤 자리가 비는가. 장례에는 가야 하는가. 가야 한다면 어느 정도의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톨스토이는 인간을 괴물로 그리지 않는다. 그래서 더 불편하다. 그들은 이반 일리치를 미워한 것도 아니다. 다만 죽음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들여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죽음은 잠시 예절의 형식 안에 보관된다. 조문, 위로, 적당한 침묵, 체면 있는 표정. 사회는 죽음조차 다룰 수 있는 절차를 가지고 있다. 그 절차는 필요하다. 그러나 절차는 때때로 진실을 중화한다.
죽은 사람 앞에서 산 사람들은 묻지 않는다. 저 사람의 죽음이 나에게 무엇을 묻는가. 대신 이렇게 생각한다. 아직은 내가 아니다. 이것이 인간이 죽음을 다루는 첫 번째 방식이다. 죽음은 보편 명제로는 인정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 문장은 참이다. 너무 참이어서 아무것도 찌르지 못한다. 문제는 다른 문장이다.
내가 죽는다.
이 문장은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칼날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문장은 지식이다. 두 번째 문장은 통보다. 이반 일리치의 동료들은 첫 번째 문장을 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은 피한다. 그 회피가 작품 전체의 문턱이다.
이 문턱을 넘기 위해 한 가지 시선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기만, 익명적 순응, 계급의 거짓말, 분주함, 병의 독립성, 돌봄, 타자, 회심과 부조리. 이 글은 이 렌즈들을 차례로 통과한다. 어떤 렌즈는 다른 렌즈를 보강하고, 어떤 렌즈는 다른 렌즈를 반증한다. 그 충돌은 빨리 봉합되지 않을 것이다. 봉합되지 않은 채로 남는 부분이 작품의 정직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죽음은 아직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사실 죽음은 이미 방 안에 있다. 다만 모두가 그것을 예절이라는 천으로 덮고 있을 뿐이다.
2. 잘못 산 악인이 아니라, 제대로 산 빈 사람
이반 일리치는 특별히 악한 인간이 아니다. 이 사실을 빼면 작품은 거의 무너진다. 그는 살인자도 아니고, 탐욕의 괴물도 아니며, 특별한 죄를 저지른 인물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사회가 인정하는 방향으로 충실히 살아간다. 좋은 직업을 얻고, 적절한 결혼을 하고, 집을 꾸미고, 필요한 관계를 만들고, 지위를 확보한다. 그는 실패자가 아니다. 그는 꽤 성공한 사람이다.
바로 그 성공이 문제다.
만약 이반 일리치가 명백한 악인이었다면 독자는 쉽게 안심했을 것이다. 그는 잘못 살았으므로 고통받는다. 이렇게 정리하면 된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그런 값싼 판결문을 쓰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의 비극은 악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평범한 적응에서 온다. 그는 사회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었다. 너무 잘 걸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지 않게 되었다.
그의 삶에는 외부 기준이 과잉되어 있다. 직위, 평판, 품위, 가구, 손님의 시선, 아내와의 체면, 동료들의 평가. 반대로 내부 감각은 결핍되어 있다. 내가 정말 원하는가. 이 삶이 내 것인가. 이 불쾌함을 왜 견디는가. 이 성공은 무엇을 대신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그의 일상에서 밀려난다.
삶은 단순히 시간이 이어지는 일이 아니다. 삶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긴 것에 몸을 지불하는 일이다. 이반 일리치는 무엇을 지불했는가. 그는 자기 자신을 지불했다. 대신 얻은 것은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생애였다.
그의 삶은 밖에서 보면 질서였다. 안에서 보면 공백이었다.
3. 익명의 복종, 그리고 계급이라는 좌표
작품에서 집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이반 일리치는 집을 꾸미는 일에 몰두한다. 가구, 장식, 배치, 분위기. 그는 자기 삶의 형식을 세심하게 조정한다. 그런데 그 형식은 그가 누구인지를 드러내기보다, 그가 누구처럼 보이고 싶은지를 드러낸다. 집은 취향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위장의 공간이다.
그가 병의 계기가 되는 부상을 입는 장면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집을 꾸미는 과정에서 생긴 사소한 사고가 점차 그의 삶 전체를 무너뜨린다. 이것은 우연한 사건이지만, 문학적으로는 거의 잔혹한 반례처럼 작동한다. 그가 붙잡고 있던 품위의 장식이 그의 몸을 찌른다. 외부의 질서를 완성하려는 손짓이 내부의 균열을 열어버린다.
여기서 사회적 순응의 구조를 본다. 사람은 혼자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타인의 기준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문제는 타인의 기준을 참고하는 것과 그것에 자신을 위탁하는 것이 다르다는 데 있다. 전자는 관계의 조건이다. 후자는 자기 상실이다. 두 상태의 경계는 미묘하다. 이반 일리치도 어느 시점까지는 참고였을 것이다. 어느 순간 그것이 위탁으로 미끄러진다. 작품은 그 미끄러짐의 정확한 좌표를 알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알려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반 일리치는 남들이 사는 대로 살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들이 괜찮다고 부르는 방식으로 자신을 구성했다. 이 삶의 위험은 그것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데 있다. 아무도 그에게 노골적으로 명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따랐다. 명시적 명령이 없는 환경에서,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는, 복종이 더 깊어지는 일이 있다. 모든 인간이 항상 그렇다는 보편 명제로 다룰 수는 없다. 다만 외부 승인을 자기 좌표로 삼는 사람일수록, 명령이 명령처럼 보이지 않을수록 더 깊이 따른다. 이반 일리치는 이 조건을 거의 완전하게 충족한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세인(das Man)은 여기서 단순한 인용이 아닌 분석 도구로 들어온다. 세인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가상의 주체다.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정확히 누구인가. 답이 없다. 답이 없는 주체는 책임을 분산시킨다. 다들 그렇게 결혼하고, 그렇게 승진하고, 그렇게 집을 꾸미고, 그렇게 불행을 견디고, 그렇게 죽음을 남의 일로 처리한다. 세인은 설명이라기보다 방패다. 누구의 결정이냐고 물으면 끝내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
여기에 한 층을 더해야 한다. 이반 일리치의 세인은 추상적 익명성이 아니다. 그것은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상류 관료 계급이라는 매우 구체적 좌표를 가진다. 직위 서열, 응접실 예절, 카드 게임, 적당한 결혼이 만들어내는 경제적 안정. 이 작품은 보편적 인간 조건을 다루지만, 동시에 매우 특정한 계급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잊으면 톨스토이의 비판이 누구를 향하는지 놓친다. 그가 그리는 자기기만은 아무 데서나 같은 강도로 발생하지 않는다. 일정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더 정교한 형태로 발생하는 자기기만이다. 직위가 자기 자신과 가장 잘 결합할 수 있는 자리, 절차가 진실을 가장 매끄럽게 대신할 수 있는 자리에서, 그것은 가장 깊어진다.
이반 일리치는 방을 잘 꾸몄다. 그러나 그 방 안에 정작 자신이 없었다.
4. 자기기만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쓸 것인가
병은 이반 일리치의 몸만 공격하지 않는다. 병은 그의 세계를 공격한다. 그는 처음에는 의학적 설명을 원한다. 병명이 무엇인가. 어떤 장기가 문제인가. 어떤 치료를 해야 하는가. 의사들은 전문적 언어로 말한다. 그 언어는 정확해 보이지만, 이반 일리치가 정말 묻고 있는 질문에는 닿지 못한다.
그가 묻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왜 나인가. 나는 죽는가. 내가 살아온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이 질문을 견디지 못한다. 아내는 불편해하고, 딸은 자기 삶의 일정 속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방해물처럼 느끼며, 동료들은 예절의 거리에서 물러선다. 그들은 잔인한 악인이 아니다. 그래서 더 정확하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주 무력하고, 그 무력함을 예절로 포장한다. 정면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배려라고 부른다.
이반 일리치 자신도 오래도록 그렇게 살아왔다. 그는 자기 삶을 직접 선택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선택들 안에는 늘 하나의 숨은 전제가 있었다. 남들이 보기 좋으면 괜찮다. 모양이 빠지지 않으면 괜찮다. 실패자로 보이지 않으면 괜찮다. 이 “괜찮음”은 내면에서 나온 판단이 아니라 사회적 문법이 허락한 안정감이었다.
여기서 자기기만(mauvaise foi)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쓸 것인지 정해두는 편이 좋다. 자기기만은 일상어의 거짓말과 구분되어야 한다. 거짓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타인에게 숨기는 행위다. 자기기만은 자기 자신에게 진실의 일부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일종의 상시적 회피 구조를 운영하는 일이다. 즉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다. 단발성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이 구조의 역설을 지적했다.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동일 인격이라면, 속임이 어떻게 가능한가. 답은, 인간이 자기 안에 모순적 두 시선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한쪽은 알고 있다. 다른 한쪽은 알지 않기로 한다. 두 쪽은 합의 없이 공존한다.
이반 일리치는 자기 삶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직위 사이의 권태, 가구를 사는 일에 몰두하는 자기 자신을 잠깐 바라본 순간, 아내와의 의무적 대화 끝에 남은 피로. 이런 신호들이 그의 삶에 없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는 이 신호들을 진단으로 모으지 않았다. 그것이 자기기만의 작업 방식이다. 신호는 받되, 결합시키지 않는다. 단편으로는 인정하되, 명제로는 만들지 않는다. 명제가 되지 않은 단편은 삶을 흔들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의 병상은 이 마취가 풀리는 자리다. 그는 더 이상 집, 직위, 예절, 품위 뒤로 숨을 수 없다. 죽음은 사회적 승인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죽음은 묻는다. 너는 살았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괜찮았다”는 답은 너무 얇다.
그가 마주한 것은 병만이 아니다. 그는 평생 복용해온 자기기만의 효과가 끝나는 순간을 맞이한다.
5. 분주함은 언제 도피가 되는가
자기기만은 구조다. 그러나 구조는 매일 운영되어야 유지된다. 운영의 가장 흔한 형태가 분주함이다. 그래서 §4의 자기기만 분석 다음에 §5의 분주함이 와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단둘이 남는 일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일하고, 꾸미고, 만나고, 말하고, 계획하고, 평가받는다. 이런 활동은 모두 삶에 필요하다. 문제는 필요하다는 말이 언제나 진실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데 있다. 필요한 일도 도피가 될 수 있다. 책임과 회피는 때때로 같은 외형을 가진다.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기분전환(divertissement)이라는 개념은 이 구분에 쓸 수 있는 도구다. 파스칼이 말한 기분전환은 가벼운 오락만을 뜻하지 않는다. 명예, 일, 사교, 성공, 심지어 성실함까지도 기분전환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이 자기 자신을 보지 않기 위한 장치가 될 때 그렇다. 핵심은 활동의 종류가 아니라 활동의 기능이다. 같은 일이 누군가에게는 노동이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분전환이 된다. 차이는 그 일을 멈추었을 때 무엇이 드러나는가에 있다. 멈추었을 때 견딜 수 없는 무언가가 드러나는 일이라면, 그 일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기분전환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 정의를 적용하면, 도피와 책임을 가르는 기준은 외형이 아니라 그 활동의 정지 가능성이다. 책임 있는 활동은 멈추어도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이 그 자체로 무너지지 않는다. 도피로 작동하는 활동은 멈추는 순간 자기 자신과의 만남을 견디지 못한다. 이것은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작동 분석이다. 같은 사람의 같은 활동이 어떤 시기에는 책임이고 다른 시기에는 도피일 수 있다.
여기서 시간의 양과 삶의 진실성을 한 번 분리해 두어야 한다. 더 오래 살았다면 그는 무엇을 더 했을까. 같은 종류의 분주함을 더 오래 운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시간은 삶의 재료지만, 재료가 곧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긴 생애가 깊은 생애를 보장하지 않는다. 짧은 생애가 반드시 실패를 뜻하지도 않는다. 이반 일리치의 비극은 그가 너무 일찍 죽었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는 더 오래 살았더라도 같은 구조 안에서 같은 회피를 반복했을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일상은 분주하다. 그는 사회적으로 기능한다. 직무를 수행하고, 집안을 정비하고, 관계를 관리한다. 그런데 그 분주함은 그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중심을 보지 않도록 돕는다. 침묵이 생기면 질문이 올라온다. 질문이 올라오면 삶의 구조가 흔들린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 소음을 만든다. 모든 인간이 항상 그렇다는 보편 명제가 아니다. 다만 자기 삶의 구조가 견딜 수 없는 사람일수록, 그 구조를 흔들 침묵을 더 부지런히 막는다.
물론 이 도식 전체에 대한 더 강한 반론이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분주함 아래에는 어떤 본래적 자기도 없다. “자기 자신을 만난다”는 표현은 낭만적 허구다. 인간은 활동의 다발이지 활동 뒤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피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 설정된 문제다. 회피의 대상이 없는데 무엇을 회피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반론은 가볍지 않다. 본래적 자기라는 가정 없이 인간을 설명하는 입장은 현대 사상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 반론을 인정해도 이반 일리치의 사례는 살아남는다. 본래적 자기가 없더라도, 자기 활동의 구조에 대한 무지는 여전히 작동한다. 즉 “본래의 나”를 찾지 못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활동이 무엇을 회피하고 있는지를 끝까지 검토하지 못해 무너진다. 도피의 반대는 본래성이 아니다. 도피의 반대는 자기 활동을 정확히 명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반 일리치는 그 명명의 작업을 평생 미루었다. 그것이 결정적 결함이지, 본래적 자기를 잃었다는 사실 자체가 결함은 아니다.
이반 일리치는 오래 바빴다. 그러나 그 바쁨은 그를 살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살고 있다는 착각을 유지해주었다.
6. 병은 회피된 삶의 거울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병을 일종의 폭로 장치로 다루어왔다. 병은 이반 일리치가 회피해온 삶의 구조를 드러낸다. 이 독법은 강력하다. 그러나 강력한 만큼 위험하다. 모든 것을 의미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
여기서 한 번 멈추고 반례를 들여놓아야 한다. 어린아이의 백혈병은 무엇을 폭로하는가. 회피된 삶의 진실인가. 누군가 이 질문 앞에서 “그 아이는 살아갈 시간이 없었으니 회피할 삶도 없었다”고 답한다면, 그 답은 이미 톨스토이 독법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병이 항상 영적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어떤 통증은 의미가 아니라 사건이다. 어떤 죽음은 폭로가 아니라 박탈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병자에게 영적 회계를 추궁하는 폭력에 빠진다.
이 반례는 작품 자체에도 압력을 가한다. 이반 일리치의 병은 정말 그의 회피된 삶을 드러낸 것인가, 아니면 그저 우연한 통증이 그의 정신적 질문을 가속한 것인가. 두 해석은 미묘하게 다르다. 전자는 병에 의미를 부여하고, 후자는 병의 무의미를 인정한 채 그 안에서 일어난 사유의 변화만을 본다. 톨스토이의 텍스트는 이 두 해석을 모두 허용한다. 어쩌면 그 모호성이야말로 작품의 정직함이다.
이 절도가 필요하다. 병에는 제 나름의 물리학이 있다. 통증, 마비, 호흡의 어려움, 신경의 불꽃들. 이것들은 자기기만이나 회피의 은유로 환원되지 않는다. 톨스토이의 독자는 종종 이반 일리치의 병을 부도덕한 삶의 결과 비슷한 것으로 읽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가 부상을 입은 것은 도덕적 인과 때문이 아니다. 단지 커튼을 달다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우연이 그의 몸 안에 들어와 자라고 그를 죽인다. 의미는 그 우연 위에 사후적으로 부여된 것이지, 우연 자체가 의미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3∼§5의 논의는 무너지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적용 범위가 좁아진다. 병은 회피된 삶을 자동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이반 일리치 같은 사람의 경우, 병이 만들어낸 정지 시간이 그가 회피해온 질문들을 강제로 마주하게 했다. 이는 병의 본질이 아니라 병이 한 인간에게 우연히 만들어준 조건이다. 이 차이를 잊으면 안 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회피된 삶의 폭로로 읽되, 병 자체를 그 폭로의 도구로 신성화하지 않는 일. 작품은 이 좁은 통로를 요구한다.
7. 게라심, 또는 거짓말이 줄어든 방
병이 의미가 아니라 사건이라면, 병자 곁에 있는 사람의 위치는 더 분명해진다. 그는 의미를 해석하는 자가 아니라 사건을 견디게 돕는 자다. 이 좌표에 게라심(Gerasim)이 있다.
작품에서 게라심은 이상한 평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반 일리치의 다리를 받쳐주고, 병든 몸을 돌보며, 죽음을 과장하지도 회피하지도 않는다. 그는 죽음을 말할 때 불필요한 예절을 덧붙이지 않는다.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몸으로 알고 있다.
게라심은 철학적 개념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품 안에서 그는 가장 강한 반례다. 그는 이반 일리치가 속한 세계의 바깥에서 온 사람처럼 보인다. 상류 사회의 예절, 직위, 체면, 장식, 계산의 언어가 그에게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덜 거짓말한다.
이 점을 낭만화해서는 안 된다. 게라심이 단순한 순수성의 상징으로 소비되는 순간, 우리는 다시 편한 도덕극을 만든다. 가난한 사람은 진실하고, 높은 사람은 허위적이라는 식의 구도는 너무 쉽다. 톨스토이 안에 농민에 대한 일종의 이상화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상화를 그대로 수입할 필요는 없다. 가난이 자동으로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가난은 다른 형태의 거짓말과 회피를 발명할 수도 있다. 문제는 계급의 자동 판결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삶의 형식이 죽음 앞에서 덜 거짓말하게 만드는가이다.
게라심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선함이 아니라, 회피하지 않는 단순성이다. 그는 죽음을 삶의 질서 밖으로 추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에게 잠시 숨 쉴 공간을 준다. 여기서 돌봄이라는 형식의 윤곽이 잠깐 드러난다. 돌봄은 설명을 줄이고 곁을 늘리는 형식이다. 의사들은 설명을 늘렸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에게 닿지 못했다. 게라심은 설명을 줄였다. 그래서 그가 닿았다. 이 차이는 직업의 차이가 아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다르게 추정한 차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늘 설명이 아니다. 때로는 그의 고통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지 않고 곁에 있어주는 몸이다. 게라심은 이반 일리치에게 위로를 제공한다기보다, 거짓말이 줄어든 방을 제공한다. 그 방에서 이반 일리치는 처음으로 자기 고통을 덜 연기할 수 있다.
이 방이 작품 내부의 작은 윤리적 좌표다. 톨스토이는 이 좌표를 영웅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게라심은 구원자가 아니다. 단지 거짓말을 덜 하는 한 사람이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머무는 자리는 다른 자리보다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된다. 작품이 게라심에게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 점에서 의미 있다. 그를 영웅으로 키우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게라심이 아니다.
8. 타인의 얼굴이 나를 중단시킬 때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변화는 자기 고통에만 갇혀 있던 시선이 타인을 향해 열리는 순간에 일어난다. 그는 아내와 아들,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의식한다. 이 장면은 중요하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 나의 고통, 나의 억울함, 나의 공포가 세계 전체를 차지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통증은 인간을 좁힌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자신만을 보던 시선에서 벗어난다. 특히 아들의 얼굴은 그의 닫힌 세계에 균열을 낸다. 타자의 얼굴은 거울과 다르다. 거울은 나를 돌려준다. 얼굴은 나를 중단시킨다. 나의 고통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내가 고통받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윤리는 여기서 단순한 인용이 아니다. 그는 정확한 분석 도구를 제공한다. 자기중심성은 인지적 실수가 아니라 의식의 기본 구조다. 의식은 자기를 중심에 두고 세계를 정렬한다. 이 구조는 외부의 충격 없이는 잘 흔들리지 않는다. 레비나스가 말한 얼굴은 이 충격을 일으키는 외부다. 타자의 얼굴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의식 안에 다 담기지 않는 잉여로 나타난다. 그 잉여 앞에서 자기중심적 정렬이 잠시 작동을 멈춘다.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깨달음도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는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신이 타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놓여 있었는지를 본다. 평생 그는 아내를 자신의 사회적 무대 안의 인물로 다루어왔다. 자식들을 자신의 성공의 연속으로 다루어왔다. 그들이 그를 어떻게 견뎌왔는지는 본 적이 없다. 마지막 순간, 그 시선이 짧게 열린다.
이것을 쉽게 구원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늦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늦은 깨달음은 생애 전체를 자동으로 보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늦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어떤 빛은 폐허를 복구하지 못한다. 다만 폐허가 폐허였다는 사실을 보이게 한다.
그가 마지막에 본 것은 행복한 결론이 아니다. 그것은 방향의 변화다. 자기 자신만을 향하던 고통이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잠시 멈춘다. 인간에게 가능한 회심이 있다면, 그것은 이처럼 장엄한 선언이 아니라 시선의 작은 이동일지도 모른다.
9. 회심인가, 마지막 자기위안인가
여기서 회심(回心, conversion)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쓸 것인지 정해야 한다. 종교 전통에서 회심은 단지 마음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하던 중심을 다른 중심으로 옮기는 사건이다. 외부의 부름이 있고, 그 부름 앞에서 자기를 내어놓는 일이 발생한다. 회심은 작은 시선의 이동과 다르다. 그것은 구조적 이동이다.
작품의 마지막은 이 강한 의미의 회심을 암시한다. 톨스토이 자신이 후기에 종교적 위기를 거쳐 일종의 평신도적 기독교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이 텍스트에 무게를 더한다. 그가 그리는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빛은 단순한 심리적 안도가 아니라 영적 사건일 수 있다. 실제로 작품의 가장 영향력 있는 독해 가운데 하나는 이 결말을 기독교적 회심의 문학적 형상화로 읽는다. 이 독법은 가볍지 않다. 작품 안에서 빛, 어둠, 자식의 손, 용서 같은 모티프가 종교적 함의를 분명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말의 “죽음은 끝났다, 죽음은 더 이상 없다”라는 감각은 단순한 진통의 종결이 아니라, 죽음 자체의 위치가 재정렬되는 순간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이 독법은 또 다른 부담을 진다. 만약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순간이 진짜 회심이라면, 평생의 자기기만은 마지막 순간의 은총으로 사후적으로 정산되는가. 이 구도는 어떤 종교적 전통에서는 자연스럽다. 다른 시각에서는 너무 가볍다. 죽음 직전의 정산은 도덕적 회계로서 의심스럽다. 평생 거짓말을 한 사람과 평생 정직했던 사람이 마지막 한 시간의 회심으로 같아진다면, 회심은 일종의 자기위안 장치로 미끄러질 위험이 있다. 회심을 강하게 긍정하는 사람이 답해야 할 부담은 바로 이 회계의 정당성이다.
여기서 또 다른 독법이 들어온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정식화한 부조리(absurd)의 문제다. 카뮈에게 부조리는 의미를 요구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불일치다. 이 입장에서 보면, 죽음 직전의 종교적 깨달음은 부조리를 직면하지 못하고 도주하는 마지막 형태일 수 있다. 인간은 의미 없는 죽음을 견딜 수 없어서 마지막 순간 의미를 발명한다. 이 발명은 정직한가. 카뮈의 시선에서 그것은 종종 정직하지 않다. 진정한 직면은 의미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일이지, 직면 직전 의미를 다시 부르는 일이 아니다.
두 독법은 서로 환원되지 않는다. 종교적 독법은 카뮈를 영적 둔감으로 본다. 부조리적 독법은 회심을 신경학적 안도와 종교적 언어의 결합으로 본다. 작품 자체는 어느 쪽으로도 결단하지 않는다. 이것을 작품의 약점이라고 보는 비평가도 있다. 그 모호성을 강점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마지막 순간이 실제로 어느 쪽인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인간 안에서 회심과 자기위안이 서로 깨끗이 분리되지 않을 수도 있다. 둘이 같은 빛 안에 섞여 있다는 가정이 더 인간적이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단어도 정의가 필요하다. 강한 의미의 구원은 한 생애의 무게를 다른 무게로 바꾸는 일이다. 약한 의미의 구원은 거짓말의 구조에 미세한 균열이 발생하는 일이다. 작품이 끝까지 보여주는 것은, 적어도 약한 의미의 구원이다. 강한 의미의 구원이 거기에 더해져 있는지는 독자 각자가 결정할 영역이다. 텍스트는 강한 구원을 강요하지 않는다. 강한 구원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마지막에 깨달았으니 괜찮다”는 말은 너무 가볍다. 반대로 “너무 늦었으니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도 지나치게 단단하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작품이 서 있다. 작품의 힘은 어느 한쪽에도 정착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다. 이반 일리치는 마지막에 자신이 붙들고 있던 삶의 문법을 놓친다. 아니, 놓는다. 그가 평생 믿었던 괜찮은 삶의 기준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 무력화 자체가 이미 사건이다. 그 사건을 회심이라 부를 것인지, 부조리의 마지막 자기위안이라 부를 것인지는 우리가 어떤 인간학을 미리 가지고 들어가는가에 달려 있다. 텍스트는 그 결정을 텍스트 안에서 끝내지 않는다.
10. 죽음보다 차가운 확인
여기까지 우리는 여러 렌즈를 통과했다. 자기기만의 구조, 익명적 순응, 계급의 좌표, 분주함의 기능, 병의 독립성, 돌봄이라는 형식, 타자의 얼굴, 회심과 부조리의 충돌. 각각의 렌즈는 다른 것을 보여준다. 어떤 것은 서로 강화하고, 어떤 것은 서로 반증한다. 이 충돌을 작품은 봉합하지 않는다. 우리도 봉합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렌즈를 거쳤을 때 한 가지 명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 작품이 묻는 것은 죽음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 삶의 형식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라”는 식의 교훈은 너무 약해 보인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생각한다. 다만 그것을 삶을 바꿀 만큼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 죽는다”는 명제는 너무 자주 반복되어 닳았다. 닳은 진실은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작품이 건드리는 질문들은 모두 죽음 그 자체보다 한 단계 안쪽에 있다. 나는 어떤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괜찮다고 부르는 삶은 누구의 언어로 괜찮은가. 나는 책임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책임의 외형을 빌려 도피하고 있는가. 나는 바쁜가, 아니면 나를 보지 않기 위해 바쁜가. 나는 타인과 함께 사는가, 아니면 타인의 시선을 빌려 나를 장식하는가. 내가 마지막에 만들 깨달음은 회심인가, 자기위안인가. 그 차이를 미리 알 수 있는가.
이 질문들 가운데 어느 것도 죽음에 의해 발명되지 않았다. 모두 이미 있던 질문이다. 죽음은 발명자가 아니라 조명이다. 빛은 사물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숨겨져 있던 윤곽을 드러낸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잔인한 이유는 그가 죽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죽음 앞에서야 자신이 어떻게 살아오지 않았는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반 일리치를 비웃을 수 없다. 그는 너무 평범하다. 그는 잘 차려입은 불안이고, 예의 바른 공허이며, 승인받은 자기기만이다. 그는 우리와 먼 인물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의 내부에 앉아 있다.
문제는 아직 남아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후에도 풀리지 않는 매듭이 몇 개 있다. 회피된 삶을 폭로하는 빛은 회피되지 않은 삶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늦은 깨달음의 가치는 측정 가능한 단위가 아니다. 게라심처럼 거짓말이 적은 사람의 자리는 따로 있지만, 그 자리가 어떻게 구성되고 누구에게 가능한지를 작품은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회심과 자기위안 사이의 경계는 끝까지 미정이다. 병이 회피된 삶의 거울인지 그저 우연한 사건인지도 단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단순히 죽음이 아니다.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살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조금 더 차갑다. 그리고 그 차가움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론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회피하고 있는지를 더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우리는 이제 그것을 더 정확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참고 작품과 사유의 배경
-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 『이반 일리치의 죽음』
-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존재와 시간』, 죽음에의 존재(Sein zum Tode), 세인(das Man)
-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자기기만(mauvaise foi, bad faith)
-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기분전환(divertissement)
-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타자의 얼굴(visage)과 윤리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부조리(absurd)와 죽음 앞의 명료성
- 작품의 종교적 회심 독법과 부조리적 독법의 비교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수용사 가운데 두 주된 해석 축을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