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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가 흐려질 때: 숭고 경험의 구조에 대하여

자아의 경계가 흐려질 때, 우리는 더 큰 무언가에 일시적으로 속하게 된다. 이 속함이 고양의 실체다.


세 장면이 공유하는 구조

절벽 끝에 선 사람을 생각해보자. 발아래로 수백 미터의 공기가 펼쳐지고, 시야는 수평선까지 열린다. 그는 자신의 몸과 공간 사이의 비율이 갑자기 체감되는 것을 느낀다. 두렵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래를 향해 시선을 붙들어두는 무언가가 있다.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교향곡 9번 4악장이 절정에 다다른 뒤 마지막 음이 사라지는 순간의 침묵을 생각해보자. 3분간의 폭발적 상승 이후 홀 전체가 정지한다. 그 침묵은 방금까지 울려퍼지던 음들이 공기 안에 아직 남아있는 것 같은, 어딘가에 자신도 녹아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만든다. 박수가 터지기 직전, 청중은 개별 신체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 있다.

허블 망원경이 촬영한 딥 필드(Hubble Deep Field) 사진 앞에 선 사람을 생각해보자. 사진 한 장 안에 수천 개의 은하가 담겨 있고, 각각의 은하 안에 수천억 개의 별이 있다. 그 수를 인간의 인식 능력은 처리하지 못한다. 수를 감각하려는 시도 자체가 실패한다. 그 실패의 순간에 사람들은 대개 침묵하고, 침묵 안에서 낯선 평온함을 보고한다.

세 장면은 서로 다른 감각 양식을 통해 작동한다. 시각적 공간, 청각적 시간, 수적 무한. 세 장면 모두에서 동일한 구조가 반복된다. 주체의 인식 능력이 대상의 규모를 감당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고, 그 지점에서 주체는 저항을 포기하고 이완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완 이후에 자아와 대상 사이의 경계가 변해 있다.


인식이 실패하는 방식

세 장면에서 반복되는 패턴은 인식의 구조적 붕괴다.

절벽 앞의 사람은 높이를 수치로 알더라도 그 수치가 신체적 실감으로 전환되지 않는 지점을 만난다. 300미터라는 숫자는 계산 가능하지만, 그 아래의 공기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신체가 파악하려 할 때 파악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파악 실패가 현기증의 일부다.

허블 딥 필드 앞에서의 실패는 더 명시적이다. 관측 가능한 우주 안에 약 2조 개의 은하가 있다는 추정치(Conselice et al., 2016)는 문장으로 읽힐 수 있다. 그 수를 상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2조 개를 머릿속에 그리려는 시도—는 시작과 동시에 실패한다. 숫자는 언어로 존재하고, 상상은 이미지를 요구하는데, 그 규모의 이미지를 생성하는 인간 인지 장치가 없다.

칸트(Immanuel Kant)는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이 현상을 '수학적 숭고(das Mathematisch-Erhabene)'라는 이름으로 기술했다. 상상력(Einbildungskraft)이 감각적 파악에 실패할 때, 이성(Vernunft)은 그 실패를 통해 자신이 감각을 초과하는 능력임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분석은 이 실패 경험이 왜 쾌감을 동반하는지를 설명한다. 실패는 한계의 증거이고, 한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한계 바깥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설명은 이성의 자기 확인에 집중한다. 그것은 여전히 자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세 장면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패턴—이완, 수용, 평온함—은 자아의 이완을 가리킨다. 무언가에 속하게 되는 감각이다.


경계 이완의 세 조건

인식 실패는 특정 조건들이 갖춰졌을 때만 이완으로 전환된다. 동일한 규모의 대상이 공포나 마비로 귀결되는 경우는 이 조건들 중 하나 이상이 빠진 경우에 해당한다.

첫 번째 조건은 안전거리다. 버크(Edmund Burke)는 『숭고와 미의 관념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에서 이 조건을 명시했다. 위험이 실제적이면 공포가 숭고를 소멸시킨다. 위험이 감지되되 신체에 직접 닥치지 않을 때, 공포의 에너지가 미적 경험으로 전환될 공간이 생긴다.

두 번째 조건은 인식 실패의 완전성이다. 파악이 완전히 포기될 때—"이 규모는 내 인식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확정될 때—저항이 사라지고 이완이 시작된다. 부분적 실패는 오히려 불쾌감을 만든다. 이해될 듯 말 듯 한 규모는 인지적 긴장만을 유발한다.

세 번째 조건은 자아가 이완된 상태에서도 경험의 주체로 존속한다는 것이다. 경계가 흐려지는 것은 경계가 사라지는 것과 다르다.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면 속함을 경험하는 주체도 사라진다. 흐려진 경계를 통해 더 큰 무언가와 잠시 접촉하지만, 그 접촉을 감지하는 얇은 막은 남아 있다.

이 세 조건이 동시에 충족될 때—실제 위험 없이 안전하게 노출되고, 인식이 완전히 포기되고, 자아가 얇아진 채로 남아 있을 때—경계의 이완이 일어난다.


속함이 고양인 이유

경계가 이완되면 자아는 더 큰 구조 안에 일시적으로 포함된다. 이것이 고양이다.

세 장면의 경험자들이 보고하는 것은 자신이 무언가의 일부가 되었다는 감각이다. 절벽 앞에서 공간의 일부가 되고, 교향곡의 마지막 침묵 안에서 음악의 일부가 되고, 은하 사진 앞에서 우주적 규모의 일부가 된다. 숭고를 이성적 우월성의 확인으로 기술한 칸트의 서술과 달리, 이 경험은 자아의 재배치를 가리킨다.

속함과 굴복은 구조가 다르다. 굴복은 자아가 타자에게 종속되어 축소되는 것이다. 속함은 자아의 경계가 일시적으로 투과적이 되어 더 큰 단위의 일부로 재배치되는 것이다. 절벽 앞의 사람은 잠시 동안 그 공간의 일부로 존재하게 된다. 그 존재 방식은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이 왜 고양인가. 일상적 자아는 피부와 감각 기관의 경계 안에 제한된다. 그 경계는 기능적으로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고립을 만든다. 숭고 경험에서 그 경계가 일시적으로 투과성을 갖게 될 때, 자아는 자신보다 큰 구조와 잠시 연속된다. 베토벤의 마지막 침묵 안에서 청중이 개별 신체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은, 그 순간 그들이 음악이 만든 집단적 시간의 구조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포함이 끝나고 박수가 터질 때, 그들은 더 작은 단위로 되돌아온다. 그 복귀가 기억으로 남고, 기억이 고양이라고 불린다.


스펙터클이 경계를 강화하는 방식

현대의 시각 환경은 규모의 인식 실패를 반복적으로 유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초고화질의 자연 영상, 수십억 화소의 천체 사진, 아이맥스(IMAX) 스크린을 채우는 우주 시뮬레이션. 그럼에도 이것들이 세 장면이 만들어내는 속함의 감각을 드물게만 만드는 것은, 스펙터클이 숭고의 조건들을 하나씩 차단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펙터클은 자아와 대상 사이의 경계를 강화하는 조건 위에서 작동한다. 초고화질 자연 영상은 시청자에게 명확한 거리를 유지시킨다. 화면 테두리가 있고, 스크린과 관람자 사이에 조작된 공간이 있다. 그 거리는 안전하지만, 동시에 자아와 대상의 경계를 고정시킨다. 경계가 고정된 상태에서 인식은 규모에 압도될 뿐 구조적 붕괴에 이르지 못한다.

스펙터클은 인식 실패 자체를 차단하는 방식으로도 작동한다. 다큐멘터리 화면에는 내레이션이 있고, 자막이 있고, 숫자가 있다. 규모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규모를 이해 가능한 단위로 변환해서 제공한다. 이것은 정보 전달의 효율성을 위한 설계이지만, 그 설계가 인식 실패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해될 수 있는 것은 경계 안에 수용되고, 경계 안에 수용된 것은 자아를 이완시키지 못한다.

인식 실패가 완전히 일어나려면 대상이 매개 없이 현전해야 한다. 절벽 앞의 사람은 절벽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교향곡 앞의 청중은 같은 공간의 음파에 노출된다. 허블 딥 필드 사진이 숭고 경험을 유발하는 것은 수십억 광년 거리의 빛이 실제로 지구의 필름에 닿았기 때문이다. 스펙터클은 대상을 재현하고, 재현은 대상과 주체 사이에 항상 해석의 층을 삽입한다. 그 층이 인식 실패를 흡수한다.


항복을 허용하는 것에 대하여

경계가 흐려지는 경험은 여전히 발생한다. 그것이 발생하는 장소는 설계된 미디어 환경보다 덜 통제된 공간이다. 실제로 산 위에 서는 것, 오케스트라 연주를 현장에서 듣는 것, 밤하늘을 맨눈으로 보는 것. 또는 더 미시적인 수준에서—언어가 자신의 경험을 담아내지 못하는 순간,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이해 범위를 초과하는 순간, 수학적 증명이 직관의 능력을 완전히 넘어서는 순간.

이 순간들의 공통점은 인식이 항복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현대적 자아는 항복을 실패로 해석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더 공부해야 할 것이고,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더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 훈련이 인식의 완전한 포기를 어렵게 만든다.

숭고 경험이 점점 드물어지는 것은 자아가 경계 이완을 점점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부 여부가 곧 우리가 더 큰 무언가에 속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물음은 미학의 물음에서 시작했지만, 자아의 투과성에 관한 물음으로 끝난다. 그 투과성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는 아직 열린 채로 남는 질문이다.


참고자료

  • Kant, Immanuel. Kritik der Urteilskraft (1790). 한국어 번역: 이석윤 역, 『판단력 비판』, 박영사, 2003.
  • Burke, Edmund.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 (1757). Oxford University Press, 1990.
  • Conselice, Christopher J. et al. "The Evolution of Galaxy Number Density at z < 8 and Its Implications." The Astrophysical Journal, 830(2), 2016. (관측 가능한 우주의 은하 수 재추정 연구)
  • Lyotard, Jean-François. Leçons sur l'Analytique du sublime (1991). 영역: Elizabeth Rottenberg, Lessons on the Analytic of the Sublim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4.
  • Hertz, Neil. "The Notion of Blockage in the Literature of the Sublime." In Psychoanalysis and the Question of the Text, ed. Geoffrey Hartman.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