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견디는 능력은 왜 지적 능력과 연결된다고 말할까
이 주장은 낡은 것 같지만 끈질기다. 쇼펜하우어는 사교성이 지적 가치에 대략 반비례한다고 썼고, 오늘의 몰입 작업 담론과 자기계발의 문법도 같은 구도를 변주한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깊이 사고할 수 있다는 명제는 철학에서 처세서까지 넓게 유통된다. 그러나 이 명제가 실제로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똑똑한 사람은 우연히 고독을 덜 힘들어한다는 경험적 관찰인가. 깊은 사고는 외부 자극의 차단을 요구한다는 기능적 조건인가. 아니면 사고 자체가 이미 고독의 형식을 가진다는 구조적 주장인가. 이 세 층위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며, 어느 층위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주장의 설득력과 한계가 다르게 드러난다. 이 글은 그 세 층위를 가려내고, 어디까지가 실질이고 어디부터가 이데올로기인지를 묻는다.
먼저 이 주장이 가장 선명하게 정식화된 자리를 확인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소품과 부록』에서 고독에 대한 사랑이 인간 본성의 원래적 특성이 아니라 경험과 반성의 결과이며, 그 경험과 반성은 지적 능력의 발달에 달려 있다고 적는다. 그의 논증 구조는 단순하다. 고독한 순간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되돌려진다. 이때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가가 드러난다. 내면에 사고, 이미지, 기억, 취향이 풍부한 사람에게 혼자 있음은 자기 정원을 거니는 일이 된다. 내면이 단조로운 사람에게 같은 시간은 벌로 경험된다. 따라서 사교성의 강도는 내면의 빈곤에 비례한다. 여기서 고독 내성은 지능 검사의 점수가 아니라 내면의 풍부함 자체이며, 그 풍부함은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재능이 아니라 긴 시간의 반성이 남긴 침전물이다. 쇼펜하우어의 주장이 엘리트주의적 어조를 띠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조 아래에는 가볍지 않은 구조적 관찰이 들어 있다. 내면의 운용 능력과 고독 내성은 같은 사태의 두 얼굴이라는 관찰이다.
이 관찰을 개인적 오만으로 치부하기 전에, 그 구조가 현대의 경험적 연구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살펴야 한다. Wilson과 동료들의 2014년 실험은 피험자에게 6–15분간 아무 과제 없이 자기 생각만으로 시간을 보내게 했다. 다수는 그 시간을 힘들어했고, 일부는 이전에 돈을 지불해서라도 피하고 싶다고 답했던 약한 전기충격을 스스로 선택했다. 이 결과는 흔히 "인간은 고독을 못 견딘다"는 강한 진단의 근거로 인용된다. 그러나 이 인용은 해석의 층을 생략한다. Fox 등이 2014년에 같은 데이터에 대해 제기한 비평은 그 과장을 지적한다. 피험자들이 실제로 기록한 사고 내용은 대체로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이었고, 평균 즐거움 평점도 "다소 즐거움" 구간에 가까웠다. 전기충격을 택한 사람들도 자신의 사고를 불쾌하게 서술하지 않았다. 원연구가 실제로 지지하는 명제는 훨씬 약하다. 즐거운 사고는 인지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며, 특정한 단서나 훈련이 주어질 때 더 쉬워진다. 이 약한 명제는 "인간은 자기와 함께 있기를 싫어한다"는 강한 진단과 다르다.
흥미롭게도 이 약한 명제는 쇼펜하우어의 직관을 부분적으로 구제한다. Wilson 팀의 보충 분석에서 사고 시간의 즐거움을 일관되게 예측한 변수는 피험자의 상상적 과정 척도 하위 요인들이었다. 풍부한 내적 서사를 구성할 수 있는 사람일수록 혼자 있는 시간을 견뎠다는 뜻이다. 이 결과는 고독 내성이 표준 지능검사 점수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특정 인지 자원—내적 표상을 지속시키는 능력, 외부 단서 없이 의미를 구성하는 능력—과는 연결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자리에서 한 가지 구분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두 능력이 함께 나타난다고 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고독 내성이 지적 활동의 원인이라거나, 지능이 고독 내성을 만든다는 인과 명제는 이 데이터로 성립하지 않는다. 더 정당한 추론은 두 능력이 공유하는 더 깊은 조건을 가정하는 쪽이다.
그 공유된 조건을 가장 명시적으로 사유한 사람이 한나 아렌트다. 그녀는 외로움(Verlassenheit)과 고독(Einsamkeit)을 엄밀히 구분한다. 외로움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상태이며, 고독은 내가 나 자신과 함께 있는 상태, 곧 둘-속의-하나다. 아렌트에게 사고는 본질적으로 자기가 자기와 나누는 침묵의 대화다. 고독 안에서는 언제나 대화가 일어난다. 고독 안에도 항상 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정식화가 우리 주제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사고 능력과 고독 내성은 두 개의 분리된 능력이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고라는 것이 이미 자기와 자기 사이의 내적 대화의 형식을 갖는다면, 자기와 함께 있지 못하는 사람은 단지 고독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일어날 공간 자체를 갖지 못한 것이다. 아렌트의 이 진단은 지능의 서열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고의 구조가 이미 고독의 구조를 포함한다는 점을 말한다.
아렌트의 직관은 뇌과학의 한 갈래에서 부분적으로 조명된다. 이른바 기본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는 외부 과제에 주의가 향할 때 억제되고, 자전적 회상, 미래 시뮬레이션, 자기 반성, 자발적 사고 같은 내부 지향적 처리가 일어날 때 활성화되는 뇌 네트워크다. Beaty 등의 확산적 사고 연구는 창의적 아이디어의 생성이 이 DMN의 자발적 처리와 전두두정 실행 통제 네트워크의 결합에서 나온다는 점을 반복해 보여준다. 즉 새로운 사고는 내부 지향적 모드를 유지하는 능력과 그것을 실행 통제로 조정하는 능력의 공동 작업에 의존한다. 외부 자극을 차단하고 내적 표상 위에 머무르는 조건이 고독의 행동적 형식이라면, 같은 조건이 일부 지적 작업의 신경적 형식이기도 하다. 이 대응은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DMN의 활성이 곧 사고인 것은 아니며, 모든 지적 활동이 DMN 의존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은 말할 수 있다. 내적 처리에 머무르는 능력과 어떤 종류의 사고 사이에는 구조적으로 공유된 조건이 실재한다. 고독 내성과 지적 능력의 연결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이 공유된 조건의 행동적 표현과 인지적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장을 더 밀고 나가기 전에 반대쪽을 살펴야 한다. 모든 지적 활동이 고독 안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사고는 아테네 거리의 대화 안에서 일어났고, 현대 과학의 대부분은 공동 저자와 실험실의 공동 작업이다. 이론의 진전은 종종 논쟁에서 온다. 아렌트 자신의 둘-속의-하나라는 정식도 이미 역설을 품는다. 자기와 대화할 수 있는 자기가 되려면 먼저 다른 사람과의 실제 대화 경험이 내면에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 내면의 복수성은 외부의 복수성에서 온다. 따라서 고독이 지성을 만든다는 강한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더 정확한 진술은 이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축적된 내적 복수성이 있을 때, 그 복수성을 혼자 있는 시간에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지적 작업의 한 조건이 된다. 고독과 사교성은 서로 대립하는 두 상태가 아니라 순환하는 두 계기다. 고독은 사교성이 남긴 재료를 소화하는 시간이며, 사교성은 고독이 다듬은 사고를 시험대에 올리는 시간이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지적 작업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 한계를 인정하면 쇼펜하우어의 강한 주장은 두 가지 방향에서 수정된다. 첫째, 사교성 자체가 지적 빈곤의 징표인 것이 아니다. 특정한 사교성—내적 소화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모든 불편을 외부 자극으로 즉시 메우는 사교성—이 그 징표다. 둘째, 고독 내성이 곧 지적 능력인 것이 아니다. 고독 내성과 지적 능력은 동일한 근본 조건의 두 가지 표현이다. 그 근본 조건은 외부 자극 없이 내적 표상 위에 머무를 수 있는 능력, 해결되지 않은 내용을 견디며 그것이 형식을 갖추기를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 읽기와 쓰기, 긴 대화, 반복되는 혼자 있음의 시간, 즉각적 만족을 유예하는 훈련을 통해 누적된다. 따라서 주장의 실질은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형성론이다. 누군가는 지적이기 때문에 고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 표상을 유지하는 능력이 형성되어 있을 때 그 동일한 능력이 한편으로는 고독 내성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지적 깊이로 나타난다.
이 재정식화는 현대의 상황에 대해 무겁지 않은 방식으로 무거운 함의를 갖는다. 스마트폰, 상시 알림, 짧은 피드백 루프로 이루어진 지금의 환경은 혼자 있는 시간 자체를 구조적으로 희소하게 만든다. 이것은 사람을 덜 똑똑하게 만든다기보다, 특정 종류의 지적 작업이 일어날 조건을 서서히 제거한다. 조건이 사라지면 고독을 못 견디는 것과 일정 깊이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같은 사태의 두 얼굴로 나타난다. 그 사태의 원인은 지능의 분포가 아니라 환경의 설계이며, 그 설계의 피해자는 특정 계층이 아니라 그 환경 안에서 살아가는 모두다. 쇼펜하우어의 명제가 오늘 다시 끈질기게 유통되는 까닭은 그의 엘리트주의가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묘사한 빈곤의 조건이 지금 훨씬 평등하게 분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이 제기한 질문—왜 고독 내성이 지적 능력과 연결된다고 말하는가—에 대한 수렴적 답은 다음과 같다. 그 연결은 경험적 상관의 우연도 아니고, 존재론적 등식도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 공유다. 외부 자극 없이 내적 표상 위에 머무를 수 있는 하나의 능력이 한편으로는 "고독을 견딘다"는 행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깊이 사고한다"는 수행으로 표현된다. 두 현상은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두 가지다. 이 정식은 쇼펜하우어의 오만을 걸러낸다. 지능이 고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근본 능력이 두 영역에서 이름을 바꿔 나타날 뿐이다. 이 정식은 동시에 고독 내성을 단순한 성격 특성으로 축소하는 관점도 걸러낸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상태는 지적 열등의 낙인이 아니지만, 그 상태를 방치하는 일은 특정한 종류의 사고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고독 내성은 지능의 증거가 아니라, 지능이 작동할 공간의 유지다. 인간이 깊이 생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먼저 재능이 아니라 자리이며, 그 자리의 이름이 고독이다.
참고자료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Harcourt, Brace & Co., 1951.
Hannah Arendt, The Life of the Mind.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8.
Roger E. Beaty, Mathias Benedek, Scott Barry Kaufman, and Paul J. Silvia, "Default and Executive Network Coupling Supports Creative Idea Production," Scientific Reports 5 (2015).
Kieran C. R. Fox, Kalina Christoff, Evan Thompson, et al., "Is Thinking Really Aversive? A Commentary on Wilson et al.'s 'Just Think: The Challenges of the Disengaged Mind,'" Frontiers in Psychology 5 (2014).
Arthur Schopenhauer, Parerga and Paralipomena, trans. E. F. J. Payne. Oxford University Press, 1974.
Timothy D. Wilson, David A. Reinhard, Erin C. Westgate, Daniel T. Gilbert, Nicole Ellerbeck, Cheryl Hahn, Casey L. Brown, and Adi Shaked, "Just Think: The Challenges of the Disengaged Mind," Science 345, no. 6192 (2014): 75–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