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모순을 품으면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서론
인간이 의미를 요구하는 까닭은 세계가 그 요구에 대답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대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가 자명하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공기처럼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의미가 문제로 떠오르는 순간은 언제나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는 순간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과 실제로 선택한 것이 어긋날 때, 믿음과 행동이 어긋날 때, 가치들이 서로를 밀어낼 때. 그런데 바로 이 어긋남이 인간의 예외적 상태가 아니라 일상적 구조라면, 의미의 문제는 처음부터 어떤 난처함 위에서 출발하게 된다.
오랜 사유의 한 전통은 의미를 일관성의 문제로 다루어 왔다. 삶이 하나의 원리로 묶이고 자아가 자기 자신에게 투명해질 때 비로소 의미가 주어진다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전제하는 통일된 자아는 경험적 인간과 자주 어긋난다. 실제의 인간은 자기 안의 충돌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살아가고, 오히려 그 충돌을 감당하는 방식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비로소 결정한다. 그렇다면 모순은 의미의 장애물인가, 아니면 의미가 형태를 얻는 장(場)인가.
이 글이 다룰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모순을 품으면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순이 왜 인간 실존의 우연한 결함이 아니라 구조적 조건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그다음에 모순을 대하는 두 가지 기본 태도—통합의 길과 감당의 길—을 구분하고, 양자의 설득력이 갈리는 지점을 짚어야 한다. 이어서 감당의 길이 어떻게 자기기만과 구별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내면을 넘어 사회적 조건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살필 것이다. 이 글은 최종 답을 서두에 미리 닫아 두기보다, 논증이 수렴하는 지점에서 그 답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두고자 한다.
1. 모순은 왜 구조인가
인간이 모순적이라는 관찰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 모순이 무엇의 증상인가이다. 만일 모순이 단지 성숙의 부족이나 자기지식의 결핍이라면, 충분한 반성과 교육을 통해 점차 해소될 수 있는 결함이 된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경로를 밟은 여러 사상가들이 도달한 결론은 그렇지 않다. 모순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의 형식 자체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원리적으로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
키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제시한 절망 개념이 한 예다. 그에게 자기(das Selbst)는 단순한 실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다. 이 자기관계는 유한성과 무한성, 필연성과 가능성 같은 대립 항을 끊임없이 종합해야 하는 동적 구조이며, 그 종합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뒤틀릴 때 절망이 발생한다. 중요한 것은 절망이 특수한 병리가 아니라 인간의 일반 조건이라는 점이다. 자기 자신이 되려 하지 않는 약함의 절망과 자기 자신이 되려 하는 반항의 절망은 서로 정반대의 방향이지만, 두 경우 모두 인간이 자기 자신과 온전히 일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분열은 병리가 아니라 자기됨의 조건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기만(mauvaise foi)은 다른 각도에서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인간은 주어진 사실성의 즉자(être-en-soi)와 자신을 넘어서는 자유의 대자(être-pour-soi) 사이에 존재한다. 이 분열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어느 한쪽으로 환원하려는 순간 자기기만이 발생한다. 사르트르의 카페 웨이터 예에서, 자신을 오직 웨이터라는 역할로 고정하려는 태도와 자신이 상황의 무게와 무관하게 순수한 자유라고 주장하는 태도는 모두 자기기만이다. 모순을 없애려는 시도가 오히려 진실에서 멀어지는 경로가 되는 셈이다. 이는 모순이 단순히 해소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표식임을 시사한다.
파스칼이 인간을 위대하면서도 비참한 존재라고 부른 것, 니체가 인간을 초극되어야 할 무엇으로 파악한 것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니체에게 인간은 완성된 본질이 아니라 극복의 장이며, 그 극복은 대립하는 힘들이 길항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모순은 결함이 아니라 생성의 재료다. 세 사상가의 언어는 서로 다르지만 공통된 통찰이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단일하고 투명한 존재로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이어지는 논의의 출발점이다. 모순이 구조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더 이상 모순을 어떻게 없애느냐가 아니라 모순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로 전환된다.
2. 두 길: 통합과 감당
앞 절이 모순을 구조적 조건으로 규정했다면, 이제 그 조건을 대하는 두 가지 대조적 태도를 살필 차례다. 이 구분은 사상사의 오래된 분기이기도 하다.
첫째 길은 모순을 통합으로 해소하려 한다. 이 입장은 삶의 충돌을 더 높은 질서 속으로 흡수할 수 있다고 본다. 헤겔 변증법의 단순화된 판본이 자주 이렇게 읽힌다. 모순은 지양(Aufhebung)을 통해 더 높은 종합으로 이행하며, 그 종합은 이전 단계의 긴장을 보존하면서도 해소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구원 서사나 이념적 세계관, 현대의 자기계발 담론도 형식은 다르지만 유사한 기대를 공유한다. 충분히 깊은 통찰이나 올바른 실천에 도달하면 삶의 어긋남은 하나의 의미 질서 속에 정돈된다는 기대다. 경험적 심리학의 인지부조화 이론 역시 인간이 태도와 행동의 불일치를 줄이려는 경향을 오랫동안 관찰해 왔다. 다만 이 경향이 진정한 통합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합리화와 회피로 기울어지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경험적으로도 후자의 결과가 드물지 않다. 따라서 불일치 축소 경향의 존재를 곧 통합 가능성의 증거로 읽는 것은 해석상의 비약이다.
통합의 길은 강력하다. 그것은 삶에 방향과 질서를 주고, 파편화된 경험을 해석 가능한 전체로 만든다. 그러나 이 길에는 두 가지 구조적 한계가 있다. 첫째, 모든 모순이 같은 층위에 있지 않다. 어떤 모순은 더 높은 관점에서 정리될 수 있지만, 어떤 모순은 그 어떤 관점에서도 해소되지 않는다. 둘째, 통합이 이상으로 승격될 때, 해소되지 않은 모순은 결함이나 실패로 간주된다. 이는 통합에 실패한 삶을 불완전한 삶으로 격하시키는 규범적 효과를 낳는다.
둘째 길은 모순을 감당의 문제로 본다. 이 입장은 인간 실존의 중요한 모순들이 원리적으로 해소 불가능하다고 보며, 의미는 그 해소 이후가 아니라 해소 없이도 살아가는 방식 속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카뮈의 부조리는 이 방향의 대표적 사유다. 부조리는 세계 자체에 있지도, 인간 자체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에 대해 의미를 요구하고 세계가 그 요구에 답하지 않는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카뮈는 이 관계를 해소하려는 두 가지 유혹—자살과 희망—을 모두 거부한다. 그가 '철학적 자살'이라 부른 것, 즉 부조리의 의식을 어떤 궁극적 의미로 포섭시키는 몸짓은, 부조리를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는 태도다. 반대로 부조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반항(révolte)의 태도가 의미의 다른 형태를 연다.
이 두 길의 차이는 단지 낙관과 비관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의미를 일관성의 산물로 보는가, 아니면 일관성의 불가능성 안에서 구성되는 형식으로 보는가의 차이다. 다음 절에서는 두 번째 입장이 설득력을 얻는 결정적 이유를 살펴본다. 삶의 중요한 가치들 가운데 일부는 원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며, 이 불가능성이 모순을 단지 해소될 문제로 취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3. 양립 불가능한 가치와 잔여
통합의 길이 근본적 제한에 부딪히는 지점은 가치의 다원성에 대한 성찰에서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이사야 벌린이 오랜 작업을 통해 정교화한 가치 다원주의는, 인간이 추구할 만한 궁극적 가치들이 하나의 단일한 척도로 비교되거나 서열화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자비, 충성과 진실, 공동체적 소속과 개인적 자율은 서로 공존할 수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쪽의 정당한 요구가 남겨진다. 이 남겨짐은 더 높은 원리의 계산 착오가 아니라, 가치들이 통약 불가능(incommensurable)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벌린에게 이 통약 불가능성은 인간 조건의 비극적 차원을 구성한다. 그것은 충분히 현명하면 피할 수 있는 일시적 곤경이 아니라, 인간 삶이 본질적으로 가치의 복수성 위에서 영위된다는 구조적 사실의 표현이다.
버나드 윌리엄스는 같은 통찰을 윤리적 경험의 내부 구조에서 발견한다. 그가 말하는 도덕적 잔여(moral remainder)는, 두 요구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한 뒤에도 포기된 쪽의 요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중요한 회의에 빠진 사람은, 설령 자신의 선택이 올바르다고 판단하더라도 회의를 놓친 것에 대한 유감이나 책임감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 윌리엄스의 주장은, 이 잔여의 감각이 비합리적 감정이 아니라 양립 불가능한 요구들을 동시에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의 정당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잔여 없이 깔끔한 양심은 의심받아야 한다. 그것은 선택의 무게를 인지하지 못했거나, 포기된 가치를 애초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의는 앞 절의 구도에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온다. 모순이 단지 인식의 불완전성에서 오는 것이라면 반성을 통해 점차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모순이 가치들 자체의 통약 불가능성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반성의 깊이와 무관하게 남는다. 이 경우 의미의 문제는 구조적으로 재정의된다. 의미 있는 삶이란 잔여 없는 삶, 어느 가치도 포기하지 않은 삶이 아니다. 그런 삶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감당할 것인지 의식하며, 그 결정에 책임지는 삶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감당은 체념이 아니다. 체념은 해소할 수 없는 모순 앞에서 의미 형성 자체를 포기하는 태도다. 감당은 모순을 해소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는 적극적 행위다. 이 차이는 다음 절에서 다룰 서사적 자기이해의 문제로 이어진다. 의미는 모순을 덮거나 수동적으로 견디는 태도가 아니라, 모순을 자기 삶의 이야기로 번역해 내는 해석 활동 속에서 형성된다.
4. 서사적 자기이해와 의미의 잠정성
앞 절에서 제시된 감당의 관념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살필 필요가 있다. 폴 리쾨르는 『타자로서 자기 자신』에서 정체성을 두 층위로 구분한다. 시간 속에서의 연속성을 뜻하는 idem(동일성)과, 약속하고 책임지는 실천적 자기를 뜻하는 ipse(자기성)다. idem이 성격이나 습관의 지속성이라면, ipse는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유지하려는 약속의 주체다. 리쾨르의 핵심 주장은 이 둘이 서사(récit)를 통해 매개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직접 투명하게 소유하지 못하며, 자신의 기억, 행위, 관계를 이야기로 엮는 해석 과정을 통해서만 자기에게 도달한다.
이 관점이 모순의 문제에 던지는 빛은 중요하다. 서사는 본래 모순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사는 이질적 요소들—우연한 사건, 상반된 욕망, 선택과 잔여—을 단일한 논리적 체계가 아니라 견딜 만한 형식으로 엮어 낸다. 의미는 이 해석 활동의 결과물이며, 따라서 언제나 잠정적이다. 새로운 경험은 이전의 이야기를 다시 쓰게 만들고, 이전에 의미 있었던 것이 더 이상 의미 있지 않게 되거나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이 잠정성은 의미의 약점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표식이다. 완전히 닫힌 의미는 더 이상 실존의 운동을 따라가지 못한다.
빅터 프랭클의 통찰은 이 관점을 실존의 극한 상황으로 확장한다. 그는 의미의 원천을 세 가지로 구분한 바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 태도적 가치다. 태도적 가치는 변경할 수 없는 고통이나 상실 앞에서 인간이 취하는 태도 속에서 성립한다. 이는 의미를 외적 성취나 쾌락의 결과로 보지 않고, 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가의 문제로 돌려놓는다. 프랭클의 주장은 경험적 일반화라기보다 실존적 가능성의 제시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모든 고통이 의미화될 수 있다는 과장된 읽기는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해소 불가능해 보이는 모순—고통과 그 고통의 이유 없음 사이의 모순—속에서도 인간이 의미를 구성할 여지가 있다는 그의 관찰은, 앞 절의 논의와 함께 읽을 때 설득력을 얻는다.
이렇게 보면 의미는 모순이 제거된 상태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모순을 떠안겠다는 결단과 그 결단을 자기 이야기로 통합하는 해석 활동의 결과물이다.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며, 구성되지만 자의적이지 않다. 구성의 재료가 되는 경험, 관계, 책임은 구성하는 주체의 임의로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 비자의성은 다음 절의 반론을 검토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5. 반론: 모순은 언제 자기기만이 되는가
지금까지의 논의는 모순을 의미의 조건으로 재평가해 왔다. 그러나 이 방향에는 중요한 위험이 있다. 모순을 품는 삶을 의미 있는 삶의 표식으로 보는 순간, 자기기만적 삶 또한 '모순을 품는 삶'이라는 외양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 타자를 존중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만 관계를 설계하는 사람은 외형상 모순을 품고 있다. 이들의 모순은 통합을 거부하는 깊이의 증거인가, 아니면 정직성의 결여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생산적 모순과 자기기만적 모순을 구분할 기준이 필요하다. 사르트르가 분석한 자기기만의 구조가 여기서 유용하다. 자기기만은 모순을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덮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자기기만적 인간은 자신의 모순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그것을 책임의 대상이 아닌 외부 조건의 산물로 전가한다. 반면 생산적 모순은 모순을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려 자기에게 귀속시키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긴장을 회피하지 않는다. 윌리엄스의 도덕적 잔여 개념이 여기서 다시 유효한 까닭이 이것이다. 잔여를 느낀다는 것은 포기된 가치를 진지하게 인식했다는 증거이며, 이 인식이 없는 모순은 '모순을 품는다'기보다 모순을 무디게 만드는 태도에 가깝다.
이 구분은 또 다른 근본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모순이 인간의 구조적 조건이라는 기술적 사실에서, 모순을 품는 삶이 좋다거나 올바르다는 규범적 주장이 곧바로 따라 나오는가. 그렇지 않다. 흄이 지적했듯 존재에 관한 진술에서 당위에 관한 진술이 논리적으로 직접 도출되지는 않는다. 인간이 모순적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모순을 방치해도 좋다거나 모순이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 글이 논증하려는 것도 그런 주장이 아니다. 주장은 오히려 조건적이다. 첫째, 인간의 중요한 가치들 가운데 일부는 원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 둘째, 이 조건 아래서 완전한 정합성을 의미의 필요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셋째, 따라서 의미는 정합성의 회복이 아니라 정합성 불가능성 안에서의 책임 있는 구성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이 세 단계는 규범적 주장을 포함하지만, 그 주장은 인간 조건에 관한 기술적 관찰에서 직접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찰과 의미 개념의 재정의 사이의 매개를 통해 정당화된다.
이 반론 검토는 앞 절들의 논증을 좁힌다. 모순을 품는 삶이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것은 무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기만이 아닌 한에서, 포기된 가치가 잔여로 인식되는 한에서 그렇다. 이 조건적 제한이 느슨한 실존주의적 찬양과 이 글의 논지를 구별해 준다.
6. 사회적 조건: 복수성과 행위
지금까지의 논의는 주로 개인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모순과 의미의 역학을 다루었다. 그러나 인간의 모순은 개인 안에 갇혀 있지 않다. 그것은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들의 구조와 긴밀하게 엮여 있다. 현대 사회는 한 사람에게 경쟁적이면서도 협력적일 것, 독창적이면서도 규범에 부합할 것, 자기답게 살면서도 끊임없이 인정받을 것을 요구한다. 이 요구들은 단순히 충족하기 어려운 수준이 아니라 서로를 부분적으로 배제한다. 따라서 개인이 경험하는 모순은 상당 부분 구조적 산물이며, 이를 순전히 내면의 성숙 문제로만 다루는 것은 원인의 일부를 은폐한다.
한나 아렌트의 구분이 여기서 유용한 시각을 제공한다. 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나누었다. 노동은 생명 유지에 속하고, 작업은 세계 안에 지속적 대상을 만드는 일이며, 행위는 타인과의 복수성(plurality)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아렌트가 특히 주목한 것은 행위인데, 행위는 예측 불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으며 언제나 타인의 반응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이 관점이 모순과 의미의 관계에 주는 함의는 분명하다. 의미는 단독의 내면이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타인 앞에서 자신이 무엇을 시작하고 무엇에 응답하는가 속에서 형성된다.
이 점은 앞 절들의 논의를 보완한다. 서사적 자기이해는 독백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해석이며, 도덕적 잔여는 타인에 대한 책임의 감각과 분리되지 않는다. 모순을 감당한다는 것이 단지 개인적 내구의 문제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약속을 지켜 나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회가 모순을 은폐한 채 기능적 적응만을 요구할 때, 개인은 자신의 잔여를 언어화할 자원을 잃는다. 반대로 모순을 성찰할 수 있는 공적 언어가 살아 있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미 구성이 고립된 내면의 작업이 아니라 공유된 해석 활동이 된다.
다만 이 사회적 차원을 개인 차원의 대안으로 과장해서는 안 된다. 공동체가 개인의 모순을 대신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의미는 여전히 개별 삶 속에서 구성되며, 사회는 그 구성이 가능한 조건을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이 조건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순이 구조적 산물이라는 사실에서 이미 드러난다.
결론: 의미의 형식
이 글은 인간이 모순을 품으면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했다. 여러 절을 거치며 확인된 것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단순한 긍정이나 부정이 아니라 의미 개념 자체의 재정의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의미를 완전한 정합성의 도달로 이해하는 한 답은 부정이다. 인간 실존의 구조, 가치들의 통약 불가능성, 자기이해의 서사적 성격은 모두 그러한 정합성을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의미를 다르게 정의한다면—모순 해소의 상태가 아니라 모순 속에서의 해석과 책임의 형식으로—답은 긍정이 된다.
이 재정의가 수렴하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의미는 삶의 모순이 제거된 자리에서 피어나는 결과물이 아니라, 해소되지 않는 긴장을 자기 이야기로 번역하고 그 번역에 책임지는 과정에서 형태를 얻는 실천이다. 이 실천은 완전한 통합이라는 이상을 포기하지만 자의성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잔여를 인식하고, 포기된 가치를 잊지 않으며, 자기기만과 생산적 모순을 구분하려는 긴장 속에서 작동한다. 또한 이 실천은 내면의 독백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사회적 조건,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해석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모순이 의미의 재료라는 단순한 명제보다 미묘하다. 모순 자체는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혼란이 의미의 원천이 될 것이며, 자기기만 또한 의미의 형식이 될 것이다. 의미를 만드는 것은 모순을 인식하고, 그 인식에서 물러서지 않으며, 무엇을 감당할지 결정하고, 그 결정을 자기 삶의 이야기로 엮으려는 일관된 노력이다. 이 노력은 모순이 없는 곳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바로 그 점에서 모순은 의미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 비대칭이 이 글이 도달한 지점이다.
인간이 의미를 찾는다는 말은 세계와 자신이 완전히 화해했다는 뜻이 아니다. 화해가 도달 가능한 종결이라면, 그 화해 이후의 삶은 더 이상 의미를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의미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엇인가가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표식이며, 그 해소 불가능성 안에서도 계속 살아가려는 의지의 증거다. 따라서 모순을 품으면서 의미를 찾는다는 말은 역설이 아니다. 그것은 의미라는 말이 유한한 존재에게 지닐 수 있는 본래의 형식을 가리킨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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