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마지막 우상
"나의 행복의 공식: 하나의 예, 하나의 아니오, 하나의 직선, 하나의 목표."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서론
행복은 근대 이후 가장 공손한 우상이다. 그것은 잔인한 신의 얼굴로 오지 않는다. 오히려 부드러운 위생의 언어로 오고, 자기계발의 조언으로 오며, '삶의 질'이라는 통계의 외투를 입고 도착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떻게 위대해질 것인가"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 편안해질 것인가"를 묻는다. 더 이상 "무엇을 위해 견딜 것인가"를 묻지 않는다. "어떻게 덜 상처받을 것인가"를 묻는다. 행복은 이렇게 하여 선의 이름으로 군림한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더 위험하다. 폭군은 저항을 낳지만, 위생은 복종을 습관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하나의 망치를 들고자 한다. 이 글의 논지는 단순하다. 행복은 삶에서 중요한 선일 수 있으나, 삶 전체를 조직하는 최고 목적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세 겹이다. 첫째, 행복은 가치의 기준이라기보다 어떤 삶이 잘 형성되었을 때 뒤따르는 정서적 표지에 가깝다. 둘째,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세우는 순간 인간은 자기 상태를 끊임없이 측정하게 되고, 그 측정이 오히려 삶의 밀도를 갉아먹는다. 셋째, 인간에게는 행복보다 더 높은 가치들이 있다—진실, 창조, 책임, 사랑, 자기극복 같은 것들은 자주 행복과 긴장 속에서만 성립한다. 나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행복은 삶의 주권자가 아니라, 더 높은 형식이 남기는 잔광이다.
1. 행복을 척도로 삼는 순간 삶은 축소된다
행복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사고는 단지 한 가지 목표를 채택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가치평가의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모든 사물을 쾌와 불쾌, 만족과 불만족, 편안함과 불편함의 눈금으로 환산하는 습관—이것이 진짜 문제다. 내가 『선악의 저편』 225절에서 헤도니즘, 공리주의, 비관주의, 에우다이모니즘을 한데 묶어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쾌와 고통에 따라 사물의 가치를 재는 사유를 "부수적 사정"에 대한 소박한 집착으로 보았다. 왜 부수적인가. 쾌와 고통은 어떤 행위나 삶의 양식에 따라 뒤따르는 효과일 수는 있어도, 그 행위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최종적으로 판정하는 법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삶의 상태를 알려주는 징후일 수는 있어도,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지, 어떤 진실 앞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입법자는 아니다. 최고 목적이라 함은 자기 자신의 기분을 넘어 삶의 방향을 정하고, 때로는 손해와 고통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더 큰 기준이어야 한다. 그러나 행복은 대개 "지금 나는 어떤 상태인가"를 묻는 정서적 자기점검의 형식으로만 나타난다. 그것은 위계를 세우지 못한다.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지 못한다.
행복이 최고의 선으로 선포되는 순간 벌어지는 평준화를 보라. 진실을 말하다가 관계를 잃는 일, 오래 배워도 아직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공부, 아이를 기르며 반복적 피로를 감수하는 시간, 아름다운 작품 하나를 위해 수년을 견디는 창작, 부당한 질서에 맞서 안전을 포기하는 정치적 용기—이 모든 것은 즉각적인 행복의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행복을 최고선으로 두는 순간 이 모든 것은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방어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바로 그 "그렇게까지"가 인간의 고도이다! 인간은 단지 만족하는 동물이 아니라,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형식에 충실할 수 있는 존재다. 그 능력을 행복의 저울 위에 올려놓는 순간 인간은 자기 자신의 가장 높은 가능성을 포기하는 셈이 된다.
2. 고통은 반박이 아니라 재료다
행복 중심의 세계관이 삶을 축소한다면, 그 축소가 가장 먼저 삭제하는 것은 고통이다. 행복을 최고의 목적으로 놓는 순간, 고통은 삶의 결함으로만 해석된다. 사라져야 할 것, 치료되어야 할 것, 우회되어야 할 것, 늦기 전에 제거되어야 할 것. 그러나 나에게 고통은 그런 단순한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즐거운 학문』 서문 3절에서 이렇게 썼다—"커다란 고통만이 정신의 최종적 해방자"라고. 그런 고통이 인간을 더 낫게 만드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더 심오하게 만든다는 점만은 안다고. 여기서 고통은 미화되지 않는다. 고통이 선이라고 찬양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 존재의 어떤 심도는 고통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생기지 않는다.
『즐거운 학문』 338절에서 나는 이 문제를 더 밀고 나갔다. 동정과 연민이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얄팍하게 해석하는가. 타인이 나의 불행을 보고 곧장 그것을 제거해야 할 악으로 판단할 때, 그는 내 영혼 내부에서 그 불행이 어떻게 다른 힘들을 조직하고, 낡은 상처를 닫고, 새로운 욕망과 필요를 낳는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의 하늘로 가는 길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지옥의 황홀을 통과한다. 어떤 불행은 단순한 파손이 아니라 재구성의 장치다.
물론 여기서 즉시 반론이 나선다. 그렇다면 모든 고통이 가치 있는가? 학대와 빈곤과 전쟁도 인간을 깊게 만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반론은 정당하다. 나의 통찰을 값싼 영웅주의로 오독해서는 안 된다. 고통 일반을 숭배하는 것은 또 다른 우상숭배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고통 그 자체의 신성함이 아니라, 인간이 고통과 맺는 해석의 형식이다. 어떤 고통은 파괴적이며, 어떤 고통은 되돌릴 수 없는 손상을 남긴다. "고통이 있으니 좋다"는 명제는 거짓이다. 그러나 "고통이 있으니 틀렸다"는 명제 역시 성급하다. 내가 겨냥하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성급함이다. 삶의 가치는 고통의 부재로 환원될 수 없으며, 어떤 가치들은 오히려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능력 위에서만 성립한다.
사랑이 좋은 예다. 안전한 사랑, 상처 없는 사랑, 부담 없는 사랑, 언제든 철회 가능한 사랑은 분명 덜 아플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덜 깊다. 책임 역시 그렇다. 책임은 늘 시간을 잡아먹고 자유를 제한하고 피로를 낳는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은 대체로 바로 그 소모 속에서 생긴다. 진실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 세계에 대한 불편한 통찰, 자기기만을 깨뜨리는 지식은 대체로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진실을 끝까지 견디는 자가 더 넓은 시야를 얻는다. 행복을 최고 목적에 올려놓는 순간, 우리는 사랑을 관리하려 하고, 책임을 최소화하려 하고, 진실을 진정제의 복용량만큼만 받아들이려 한다. 그때 삶은 덜 고통스러울 수는 있어도, 더 빈약해진다.
3. 행복의 역설—직접 추구할수록 멀어지는 것
지금까지의 논의가 주로 철학적이었다면, 같은 문제를 현대 경험연구가 어디까지 뒷받침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오해하지 마라—나는 철학적 통찰을 실험실의 통계표로 환원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고, 위대한 인식은 데이터의 양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행복을 직접 숭배하는 태도가 오히려 행복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나의 오랜 의심이 심리학에서도 반복적으로 관찰된다는 점이다. 실험실이 나를 확인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망치가 두드린 곳에서 이미 균열이 있었다는 뜻일 뿐이다.
아이리스 마우스와 동료들의 연구는 이 역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행복을 강하게 가치화하는 성향이 낮은 스트레스 조건에서도 오히려 더 낮은 주관적 안녕감, 더 낮은 심리적 안녕감, 더 높은 우울 증상과 연결된다고 보고했다. 물론 첫 번째 연구는 상관 연구였고, 역인과나 제3변수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후속 실험은 행복을 과도하게 기대하도록 유도받은 사람들이 긍정적 상황에서 오히려 더 큰 실망을 경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요컨대 행복은 목표가 될수록 측정된다. 측정될수록 기대가 붙는다. 기대가 붙을수록 현재의 경험은 언제나 부족한 것으로 판정된다. 행복의 추구가 실망의 기술로 변하는 것이다.
로이 바우마이스터와 동료들이 행복과 의미를 구분한 연구도 주목할 만하다. 그들에 따르면 행복과 의미는 겹치지만 동일하지 않다. 욕구 충족은 행복을 높이는 경향이 있었으나 의미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고, 행복은 현재 중심적이지만 의미는 과거, 현재, 미래를 엮는 시간적 통합과 관련되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스트레스와 걱정, 불안이 행복에는 불리하지만 의미에는 오히려 더 자주 동반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어떤 삶은 더 불안하고 더 무겁지만 동시에 더 의미 있을 수 있다. 나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높은 형식은 언제나 낮은 안락과 쉽게 화해하지 않는다.
라이언과 데시가 정리한 헤도닉 웰빙과 에우다이모닉 웰빙의 구분도 유익하다. 쾌락과 불쾌의 균형, 곧 기분의 합계로서 행복을 이해하는 관점은 분명 명료하다. 그러나 그들은 심리적 웰빙을 쾌락의 극대화만으로 정의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며, 의미, 자기실현, 충분히 기능하는 삶의 차원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좋게 느끼는 것"과 "잘 사는 것"은 중첩되지만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한편 디너, 루카스, 스콜론의 적응 연구는 또 다른 문제를 드러낸다. 인간은 긍정적 변화에도 일정 정도 적응하며, 따라서 어제의 성취가 오늘의 평범함으로 가라앉는 일이 반복된다. 행복을 최고 목적으로 세우는 삶이 쉽게 소모전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더 많이 얻을수록 더 오래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자주 새로운 자극을 요구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인간"의 심리학이 아닌가?
이 모든 연구가 말해 주는 것은 단 하나다. 행복은 중요한 현상이지만 안정적인 입법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 쉽게 적응되고, 너무 쉽게 자기감시에 오염되며, 너무 쉽게 현재의 만족으로만 수축된다. 내가 본능적으로 경멸한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작아진 인간—자기의 안락을 삶 전체의 법으로 승격시키는 인간이었다. 나는 이를 단지 약함이라고 보지 않았다. 가치 창조 능력의 쇠퇴로 보았다. 쾌적함의 노예가 된 인간은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세우지 못한다. 그는 단지 기존의 쾌락을 더 효율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4. 행복보다 높은 것들, 혹은 삶의 형식에 대하여
행복이 안정적인 최고 목적이 될 수 없다면, 남는 질문은 하나다. 그렇다면 인간은-무엇을-중심에-놓고-살아야-하는가? 나의 대답은 교리의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보편도덕의 설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사유 전반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방향은 분명하다. 인간은 안락을 최대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형식을 부여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는 자신 안의 충동들을 배열하고, 견딤과 절제와 넘침의 비율을 조정하며, 우연한 생을 하나의 스타일로 만들어야 한다.
이때 형식이란 단순한 미학적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를 수 있는가의 문제다. 진실을 택한다면 평온을 잃을 수 있다. 사랑을 택한다면 취약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창조를 택한다면 오랜 무명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자유를 택한다면 책임이 따라오고, 자기극복을 택한다면 자기혐오와 자기수정의 시기를 통과해야 한다. 행복은 이 모든 경우에 보상으로 잠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작점이 될 수는 없다. 시작점은 언제나 가치의 선택이다. 더 정확히 말해, 자기 형식의 선택이다.
내가 『우상의 황혼』에서 나의 행복의 공식을 "하나의 예, 하나의 아니오, 하나의 직선, 하나의 목표"라고 요약했을 때, 거기서 중요한 것은 '행복'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형식의 단호함이다. 예와 아니오가 있다는 것은 구별이 있다는 뜻이다. 직선이 있다는 것은 방향이 있다는 뜻이다. 목표가 있다는 것은 삶이 단순한 감정관리의 누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행복은 여기서 목적 자체가 아니라, 방향 있는 삶이 내부에서 느끼는 긴장의 특정한 음색에 가깝다. 활시위가 팽팽할 때 울리는 소리—그것이 나의 행복이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반론 하나를 다루어야 한다. 행복을 낮추고 형식이나 위대함을 높이는 논의는 엘리트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영웅적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가? 물론 아니다. 인간의 삶은 계급화된 경기장이 아니다. 다만 문제는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질서의 차이다. 평범한 삶 역시 행복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아이를 돌보는 부모, 작은 가게를 꾸려 가는 상인, 오랜 우정을 지키는 벗, 병든 이를 간호하는 가족, 자기 일에 묵묵히 숙련을 쌓는 노동자—이들 모두 행복의 총량만으로 환산될 수 없는 삶을 산다. 그들을 지탱하는 것은 대개 만족의 강도가 아니라, 관계와 책임과 성실이 만들어 내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행복에 대한 나의 비판은 인간을 영웅으로 몰아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소비자의 척도에서 구출하기 위한 것이다.
결론—삶의 왕관이 아니라 싸움 이후의 빛
이제 결론은 명확하다. 행복은 삶의 최대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너무 쉽게 상태로 축소되고, 너무 쉽게 측정의 대상이 되며, 너무 쉽게 적응과 권태 속으로 미끄러진다. 무엇보다 행복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바깥의 더 큰 가치들을 선택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다. 인간은 행복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 행복하다. 인간은 행복해서 진실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견디는 과정에서 드물게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순간을 얻는다. 인간은 행복해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긴 통과 끝에서 짧은 환희를 맛본다.
그러므로 올바른 문장은 이것이다. "행복이 삶의 목적이다"가 아니라, "행복은 잘 정향된 삶이 남기는 하나의 징후다." 삶이 진실, 사랑, 책임, 창조, 자기극복이라는 더 높은 기준에 의해 조직될 때, 행복은 때때로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정복된 왕좌가 아니라 스쳐 가는 빛이다. 그것을 붙잡아 왕으로 세우는 순간, 인간은 오히려 왜소해진다. 그는 더 이상 목표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기분을 관리하는 존재가 된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만 태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형식을 발명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오직 그런 삶의 도중에서만—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자신의 직선을 긋고, 목표를 향해 자신을 단련하는 도중에서만—행복은 비로소 제 자리를 얻는다. 그것은 삶의 왕관이 아니다. 그것은 싸움 이후 이마에 잠시 맺히는 빛이다. 그리고 그 빛은 오직 싸운 자만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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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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