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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라는 미끼, 전망이라는 긴장

희망은 대개 인간을 살리는 말로 불린다. 절망하지 말라는 말,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 언젠가 지금의 고통이 보상될 것이라는 말. 인간은 희망을 통해 버티고, 다음 날을 기다리며,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에게 희망은 그렇게 순진한 말이 아니었다. 희망은 인간을 일으키는 힘일 수 있지만, 동시에 인간을 고통의 구조 안에 더 오래 묶어두는 미끼일 수도 있다.

이 글에서 말하는 희망은 단순한 미래 기대가 아니다. 희망은 현재의 고통을 어떤 미래의 약속과 연결해 견디게 만드는 정서적·해석적 장치다. 이 정의는 희망을 생존 의지나 낙관성 일반과 동일시하는 통념과 다르다. 니체에게 결정적인 것은 인간이 미래를 상상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미래가 현재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게 만드는가이다. 희망이 지금의 삶을 더 깊게 살게 하는가, 아니면 지금의 삶을 나중의 보상 앞에 잠정적인 것으로 만드는가. 바로 이 차이에서 니체의 희망 비판은 단순한 염세주의와 갈라진다.

이 차이는 니체의 텍스트 안에서 세 차례에 걸쳐 다른 강도로 변주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71절은 희망을 가장 교묘한 악으로 진단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서문은 그 비판이 거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령의 형식으로 드러내며,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 268절은 그 비판이 닫지 않고 남겨두는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윤곽 짓는다. 이 글의 구조는 이 세 텍스트의 순서를 따른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71절에서 니체는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읽는다. 일반적 해석에서 상자 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은 인간에게 주어진 위안처럼 보인다. 온갖 악이 세상에 퍼진 뒤에도 인간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남겨진 작은 빛처럼 보인다. 그러나 니체는 이 해석을 뒤집는다. 희망은 마지막 선물이 아니라 가장 교묘한 악이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남겨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고통의 조건을 직면하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는 장치다.

이때 희망은 고통을 없애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다른 의미로 미룬다. 인간은 희망 때문에 아직 보상받을 수 있다고 믿고, 아직 구원될 수 있다고 믿고, 아직 기다려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희망은 위로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현재의 삶을 다른 곳의 약속에 종속시킨다. 니체가 판도라의 상자에서 본 희망은 빛이 아니라 미끼다. 인간은 그 미끼를 물고, 고통의 조건을 바꾸는 대신 다음 가능성을 기다린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니체의 사유는 좁아진다. 71절이 비판하는 것은 미래를 향하는 모든 태도가 아니다. 문제는 미래가 현재를 어떻게 가난하게 만드는가이다. 미래를 갖는 것과 현재를 미래의 보상에 종속시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삶의 방향일 수 있지만, 후자는 삶의 유예다.

도피적 희망은 바로 이 유예의 구조를 갖는다. 그것은 지금의 고통을 직접 보게 하지 않는다. 대신 언젠가 이 고통이 보상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 못하고, 나중에 도착할 의미의 대기실이 된다. 인간은 현재를 살지 않고, 현재를 참는다. 고통은 변형되어야 할 현실이 아니라, 언젠가 보상받기 위해 견뎌야 할 시험으로 바뀐다.

이런 희망이 위험한 까닭은 인간에게 미래를 주기 때문이 아니다. 위험은 그 미래가 현재를 비방한다는 데 있다. 희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아직 이 삶은 충분하지 않다”고 속삭인다. 더 나은 세계, 더 높은 보상, 더 완전한 구원이 따로 있다고 암시한다. 그 순간 희망은 삶을 살게 하는 힘이 아니라, 삶을 다른 곳으로 미루게 하는 힘이 된다.

이 지점에서 71절의 진단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의 명령으로 이어진다. 차라투스트라는 산에서 내려와 군중에게 “지상에 충실하라(bleibt der Erde treu)”고 외친다. 이 명령은 71절이 진단한 미끼의 정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미끼가 작동하기 위해 어떤 형이상학을 필요로 했는지를 폭로한다. 니체가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내세 신앙이라는 하나의 교리만이 아니다. 그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방식이 이 세계를 이미 결함 있는 것으로 판정하는 태도라고 본다. 내세적 희망은 고통받는 인간에게 위안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위안은 대가를 요구한다. 이 세계는 견딜 수 없는 곳, 임시적 통과 지점, 진정한 의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장소로 낮아진다. 그래서 다른 세계의 약속은 삶을 높이는 언어가 아니라, 삶을 비방하는 언어가 된다.

지상에 충실하라는 말은 현실에 순응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계 밖의 위안 없이 이 세계를 감당하라는 요구다. 삶의 고통을 초월적 보상으로 처리하지 말고, 이 삶 안에서 해석하고, 견디고, 다시 조직하라는 요구다. 희망이라는 이름을 계속 쓴다면, 그것은 다른 세계를 향한 위안으로는 남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지상적 전망이라는 다른 형식으로만 남을 수 있다.

창조적 전망은 긍정적 사고가 아니다. 고통에도 의미가 있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위로도 아니다. 고통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태도는 니체적인 강함이 아니라 또 다른 마취일 수 있다. 창조적 전망이란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고통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삶 전체를 포기하지 않는 힘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의 조건을 직면한 뒤에도 삶의 형식을 새로 조직하려는 능력이다.

이 전망은 고통을 제거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고통을 포함한 조건 속에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인간은 이때 고통을 부정하지도 않고, 고통 앞에 무릎 꿇지도 않는다. 그는 고통을 자기 형식을 다시 짜는 조건의 하나로 끌어들인다. 이것은 고통을 미적 재료로 소모한다는 뜻이 아니며, 피해의 윤리적·사회적 무게를 개인의 창조성으로 흡수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고, 줄여야 할 것은 줄여야 한다. 다만 고통이 남는다는 사실이 곧 삶 전체의 포기 사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니체가 열어두는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상처받은 존재이면서도, 그 상처가 자기 삶의 전부를 대신 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수 있다.

『즐거운 학문』 268절은 이 전망의 내적 긴장을 한 줄의 정식으로 압축한다. 니체는 그 절에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가장 큰 고통을 가장 높은 희망과 함께 견딜 수 있는 능력이라고 답한다. 영웅적인 것은 고통을 모르는 낙관이 아니다. 가장 큰 고통을 보면서도 가장 높은 가능성을 함께 마주하는 것이다. 희망이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눈을 가리는 약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심연을 보지 않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심연을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게 만드는 긴장이어야 한다. 71절의 미끼와 268절의 긴장 사이의 거리가, 니체가 희망이라는 단어 하나를 두고 그어 놓은 절단선이다.

이 긴장은 안락하지 않다. 도피적 희망은 인간을 편안하게 만든다. 기다리면 된다고 말하고, 보상은 나중에 온다고 말하고, 지금의 삶이 가난해도 언젠가 의미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적 전망은 그런 위로를 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게 고통을 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묻는다. 그 고통을 본 뒤에도 너는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어떤 삶의 형식을 다시 세울 수 있는가. 어디까지 너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가.

이 지상적 전망은 훗날 니체의 운명애(Amor Fati)와도 연결될 수 있다. 다만 운명애는 이 논의의 중심이 아니라 심화된 방향이다. 『즐거운 학문』 276절과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의 짧은 자기 진술에서 니체가 자신의 정식으로 제시하는 운명애는 모든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을 제거해야 할 결함으로만 보지 않고, 삶 전체의 일부로 끌어안으며, 그 조건 속에서 자신을 다시 형성하려는 능동적 태도에 가깝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유로 삶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희망론은 “희망의 부정에서 희망의 긍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도식은 너무 단순하다. 니체는 끝까지 삶을 부정하는 희망을 의심한다. 특히 내세, 보상, 구원, 다른 세계의 약속으로 현재를 견디게 만드는 희망은 여전히 위험하다. 그것은 삶을 사랑하게 하지 않고, 삶을 참게 한다. 그것은 인간을 강하게 만들기보다, 고통을 견디는 방식으로 길들인다.

그럼에도 희망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려면, 그것은 자신을 거의 다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른 세계의 약속을 버리고, 이 세계 안의 가능성을 향해야 한다. 고통을 가리는 위안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서는 힘이 되어야 한다. 고통의 구조를 바꾸지 못하게 하는 미끼가 아니라, 고통의 조건을 직면한 뒤에도 삶의 형식을 새로 세우는 전망이 되어야 한다.

니체에게 희망은 구원의 문이 아니라 시험대다. 그것이 인간을 다른 세계로 데려가려 할 때 희망은 미끼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계를 견디고 넘어가게 할 때, 희망은 더 이상 희망이라는 낡은 이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전망이다. 낮은 위안이 아니라, 지상적 자기극복을 향하는 높은 긴장이다.


참고 텍스트

  • Friedrich Nietzsche,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71.
  • Friedrich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Vorrede(서문).
  • Friedrich Nietzsche, Die fröhliche Wissenschaft (『즐거운 학문』), §268, §276.
  • Friedrich Nietzsche,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Warum ich so klug bin"(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운명애 관련 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