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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현실로 들어서는 방식의 계보

문학이 현실에 개입하는 방식은 시대마다 다르게 형성된다. 1898년 1월 13일 새벽 파리의 신문 가판대에 깔린 30만 부의 「로로르(L'Aurore)」와 2024년 12월 스톡홀름의 노벨상 시상식 단상에 오른 한강 사이에서, 문학과 현실의 관계는 어떤 단일한 본질도 가리키지 않는다. 미메시스에서 19세기 리얼리즘으로, 리얼리즘에서 사르트르의 앙가주망(engagement)으로, 앙가주망에서 랑시에르의 감성의 재분할로 이동해 온 단계마다 개입의 의미는 다시 쓰였다. 지금 한국 문학에서 개입은 작가가 현실로 나아가는 단방향 운동이 아니라, 작품이 마련해 둔 감각의 자리에 독자 공동체가 들어와 현실의 의미를 재배치하는 양방향 운동이다.

1898년 1월 13일, 「로로르」지의 새벽

1898년 1월 13일 이른 아침, 파리의 거리에는 평소의 열 배가 인쇄된 신문이 깔렸다. 「로로르」지 1면의 큰 활자 제목은 「나는 고발한다…!(J'accuse...!)」였다. 에밀 졸라(Émile Zola)가 펠릭스 포르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형식의 4천 단어짜리 글이었다.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 에스테라지 소령이 무죄 석방된 사흘 뒤 이 글을 썼고, 일곱 명의 군부 인사를 실명으로 공격했다. 그날 「로로르」는 30만 부가 팔렸다. 군부 지지자들이 거리에서 불태우려고 산 부수까지 포함된 숫자였다. 졸라는 이 글로 명예훼손 유죄 판결을 받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1898년 8월 증거 조작자였던 앙리 중령이 자살했고, 1899년 6월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이 결정되었다. 한 편의 글이 한 사람의 형무소 문을 열었다.

이 장면은 문학이 현실 안의 사건이 된 시점을 가리킨다. 작품이 현실을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고 현실의 정치적 국면 자체를 변형시킨 사건이다. 이 글의 출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장면을 가능하게 한 조건은 무엇이었으며, 그 조건은 그 이후 어떻게 변형되었는가.

미메시스, 모방과 작용의 두 얼굴

「로로르」의 새벽이 가능했던 첫 번째 조건은 문학이 처음부터 현실을 모방하는 동시에 현실에 작용하는 활동이었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미메시스(mimēsis)는 사물의 외관을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행동의 재현(praxeōs mimēsis)"이다. 행동이 재현되는 자리에서 관객은 정념을 경험하고, 카타르시스를 통해 정념의 배출을 겪는다. 모방은 작용을 동반한다.

다만 고대 그리스의 미메시스는 도시국가(polis)의 정치 질서 안에서 작동했다. 비극은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자리를 확인하는 의례의 일부였다. 작품은 도시국가의 한 부분이었지, 도시국가의 외부에서 그 구조 자체를 흔드는 위치에 서지는 않았다. 미메시스 안에 "현실 반영"과 "현실에 대한 작용"의 두 얼굴이 잠재해 있었지만, 그 두 얼굴이 분리되어 작품이 현실 안의 사건으로 등장하기까지는 다른 조건들이 필요했다.

19세기 자연주의와 신문의 시대 — 작품이 사건이 되는 조건

작품이 현실 안의 사건이 될 수 있는 조건은 19세기 후반에 형성되었다. 졸라가 1871년부터 출판한 20권 분량의 「루공-마카르 총서(Les Rougon-Macquart)」는 자연주의를 표방하며 제2제정 시기 한 가족의 사회사를 다뤘다. 「목로주점」, 「제르미날」, 「나나」 같은 작품은 노동자 거주지의 가난, 광부의 파업, 매춘 산업의 구조를 직접 재현했다. 자연주의는 작품을 사회의 모순을 진단하는 도구로 자임했다.

이 자임이 가능했던 데에는 세 가지 제도적 조건이 있다. 첫째, 도시 인구의 증가와 의무 교육의 확산으로 대규모 독자층이 형성되었다. 둘째, 신문과 잡지의 대량 인쇄가 가능해졌고, 신문 연재 소설(roman-feuilleton)이라는 매체 형식이 등장했다. 셋째, 작가가 정치적 발언을 하는 직업적 위치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의미에서 「지식인(intellectuel)」이라는 말 자체가 드레퓌스 사건의 와중에 자리를 잡았다. 졸라는 이 세 조건을 자기 안에 결집한 인물이었다. 「나는 고발한다」가 30만 부를 찍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졸라의 결단만이 아니라, 신문이라는 매체와 도시 독자라는 새로운 공중(public)이 그 결단을 받아들일 자리를 이미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문학이 현실에 개입한다"는 명제는 처음으로 제도적 무게를 갖게 된다. 1898년의 새벽은 이 단계의 절정이다.

사르트르의 결단, 그리고 결단 모델의 한계

문학의 개입성은 20세기에 들어 작가의 윤리적 결단으로 다시 규정되었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1945년 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를 창간하고, 이 잡지에 「문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littérature?)」를 1947년부터 연재했다. 1948년 갈리마르(Gallimard)에서 단행본으로 묶인 이 글에서 사르트르는 글쓰기를 「앙가주망(engagement)」으로 규정한다. 작가는 자신이 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유롭게 글을 쓰기를 선택하고, 그 글은 독자의 자유에 호소함으로써 세계를 드러낸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이미 세계에 대한 입장 선언이며, 작가는 자신이 무엇에 대해 침묵하는지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이 모델은 19세기 자연주의가 마련한 제도적 조건을 작가의 주체적 결단이라는 윤리적 차원으로 옮긴다. 한국에서는 이 모델이 1960년대 이후 1966년 창간된 「창작과 비평」을 중심으로 한 참여문학 논쟁으로 수용되었고, 1970~80년대 민중문학 운동으로 이어졌다.

결단 모델의 한계는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효과를 직선으로 연결한다는 데 있다. 작가가 결단하면 작품이 개입한다는 도식은 작품이 작동하는 더 복잡한 회로를 단순화한다. 작품이 개입의 효력을 발휘하는 자리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매체, 독자 공동체, 기억의 구조다. 사르트르 자신도 후기 「집안의 천치(L'Idiot de la famille)」(1971~1972)에서 플로베르를 분석하며 작품의 정치성이 작가의 결단보다 훨씬 무의식적인 층위에서 작동함을 인정한 바 있다.

감성의 재분할 — 작품 자체의 정치성

20세기 후반의 사상가들은 작품의 개입성을 작가의 결단에서 분리해 작품 자체의 작동 방식으로 옮겼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Le partage du sensible: esthétique et politique)」(2000)는 정치를 「감성의 분할(le partage du sensible)」, 곧 무엇이 보일 수 있고 무엇이 들릴 수 있으며 무엇이 말해질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분배 체계로 정의한다. 정치는 이 분할을 재배치하는 행위이며, 예술은 이 재배치가 일어나는 한 자리다.

이 모델에서 작품의 정치성은 작가가 어떤 메시지를 담느냐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정치성은 작품이 어떤 감각을 가시화하고 어떤 침묵을 깨는지에서 나온다. 졸라의 「제르미날」이 정치적인 까닭은 광부에 대한 동정을 표현해서가 아니라, 그때까지 문학의 정당한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던 광부의 신체와 광부의 시간을 문학적 가시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작품은 직접 발언하지 않고도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경계선을 옮김으로써 정치적이 된다.

이 전환은 결단 모델의 한계가 막아 두었던 자리를 열어 준다.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효과 사이에 직선 대신 작품 자체의 작동 회로가 들어선다. 작품은 그 자체로 감각의 분배를 흔드는 사건이며, 그 사건의 효과는 독자 공동체가 작품이 마련한 새로운 감각의 자리에 들어설 때 발생한다.

「소년이 온다」와 한국 문학의 현재

한강의 「소년이 온다」(2014)는 이 후기 단계의 작동 방식을 한국적 조건 속에서 보여 준다. 이 소설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계엄군에 의해 살해된 중학생 동호와 그 주변 인물들의 시점을 교차시킨다. 작품은 5·18을 직접 고발의 형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작품이 하는 일은 공식 기억의 외부에 남아 있던 신체들의 자리, 곧 죽은 자와 산 자가 서로를 부르는 자리를 새로 만드는 것이다. 깃발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하는 동호의 입과, 죽은 자의 부재 앞에서 자기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고 응답하는 산 자들의 자리는, 5·18을 둘러싼 감각의 분할을 다시 그리는 작업이다.

2024년 10월 10일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하며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수상 이유로 들었다. 노벨위원회의 안나 카린 팜(Anna-Karin Palm)은 한강의 작품 중 「소년이 온다」를 가장 먼저 추천한다고 밝히며, "트라우마가 어떻게 세대를 넘어 계승되는지를 다룬, 역사적 사실을 아주 특별하게 다룬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수상 두 달 뒤인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사태가 일어났을 때, 무장한 계엄군 앞에서 비폭력으로 국회를 막아선 시민들의 장면을 두고 「소년이 온다」의 구절이 사회관계망 위에서 다시 인용되었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현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 진입의 작동 방식은 앞선 두 단계의 회로를 그대로 거치지 않는다. 작품이 마련해 둔 감각의 자리에 독자 공동체가 들어가 그 자리를 통해 현실의 한 국면을 재배치한다. 「소년이 온다」가 2014년 출간 시점에 한 일과 2024년 12월 거리에서 한 일은 다르지만, 같은 작품의 같은 작동 방식이 다른 조건에서 다른 효과를 낸 결과다.

단계의 누적, 양방향의 개입

문학과 현실의 관계는 비역사적 본질이 아니라 단계별로 형성된 역사적 구성물이다. 미메시스, 19세기 리얼리즘,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랑시에르의 감성의 재분할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폐기한 단계가 아니라 누적되며 각자 다른 조건에서 함께 작동하는 층위들이다. 「소년이 온다」가 1980년 광주의 죽은 자들을 재현할 때, 그 작품에는 미메시스의 충실성, 자연주의의 사회사적 시야, 앙가주망의 윤리적 무게, 감성의 재분할이라는 작동 방식이 함께 들어 있다.

현재 한국 문학에서 개입은 작품과 독자 공동체 사이의 양방향 운동으로 작동한다. 이 운동은 작가의 결단을 무효화하지 않으며, 자연주의의 사회 진단을 폐기하지도 않는다. 그 운동은 결단과 진단이 작동하는 매체적·감각적 조건을 함께 묶어 작품의 효력을 결정한다.

문학은 현실을 배경으로 삼아 현실을 반영한다. 그 반영의 자리에서 작품은 새로운 감각의 분배를 만든다. 그 분배의 자리에 독자 공동체가 들어설 때 작품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 세 동작이 한 사이클을 이룬다.

참고자료

  • 에밀 졸라(Émile Zola), 「나는 고발한다…!(J'accuse...!)」, 「로로르(L'Aurore)」, 1898년 1월 13일.
  • 에밀 졸라, 「루공-마카르 총서(Les Rougon-Macquart)」, 20권, Charpentier, 1871–1893.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Poetica)」.
  •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문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littérature?)」, Gallimard, 1948 (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 1947년 연재 후 단행본).
  • 장-폴 사르트르, 「집안의 천치(L'Idiot de la famille)」, Gallimard, 1971–1972.
  •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Le partage du sensible: esthétique et politique)」, La Fabrique, 2000. 한국어판: 오윤성 옮김, 도서출판b, 2008.
  •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 스웨덴 한림원,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2024년 10월 10일), 마츠 말름(Mats Malm) 사무총장 성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