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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작용하는 결과

주체는 원인인가 결과인가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선택했다." "내가 원했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이 말들은 일상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 법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관계 속에서도 인간은 자기 행위의 주어로 불린다. 그러나 조금만 더 엄밀하게 묻기 시작하면 이 문장은 흔들린다. 내가 선택했다고 말하는 그 욕망은 어디서 왔는가. 내가 원했다고 말하는 그 의지는 어떤 몸, 어떤 기억, 어떤 언어, 어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졌는가. "내가 했다"는 말은 정말 행위의 원인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이미 일어난 힘들의 경합 뒤에 붙는 사후 보고서인가.

이 글에서 주체란 고정된 자아의 실체가 아니다. 주체는 자신의 행위를 완전히 투명하게 소유하는 내면의 왕도 아니고, 외부 조건이 찍어낸 수동적 산물만도 아니다. 이 글에서 주체는 자신을 형성한 조건을 인식하고, 그 조건이 자신 안에서 반복되는 방식을 해석하며, 그 반복을 가능한 범위에서 변형하는 실천적 능력의 이름이다. 이 정의는 데카르트적 주체, 곧 의심 뒤에도 남는 확실한 사고의 중심과 다르다. 동시에 흄이 말한 것처럼 지각들의 묶음만으로 해소되는 자아와도 다르다. 주체는 실체가 아니라 발생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체는 결과가 자신을 만든 원인에 다시 개입하는 순간 발생한다.

이 논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주체는 원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몸·언어·역사·타인의 시선 속에서 형성된 결과가 자신을 형성한 조건을 해석하고 재배열할 때 발생하는, 되돌아 작용하는 결과다.

1. 출발점으로서의 주체

주체를 원인으로 보는 가장 강한 모델은 데카르트적 주체다. 감각이 속일 수 있고 세계가 기만일 수 있어도, 의심을 수행하는 "나"는 의심 뒤에도 남는다. 이 모델의 강점은 단순하다. 그것은 판단과 책임의 중심을 확보한다. 누가 오류를 범하는가, 누가 자기 행위에 책임지는가. 데카르트는 이 물음에 단호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출발점은 너무 깨끗하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몸으로 태어났는지, 어떤 언어로 세계를 배웠는지, 어떤 계급적 조건에서 욕망을 배치했는지, 어떤 무의식에 의해 자기 자신을 속이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주체가 모든 것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실제로 주체를 가능하게 한 조건들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나는 생각한다"는 문장은 확실성의 문장이지만,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침묵한다.

주체를 단순히 원인으로 세우는 모델은 인간의 책임을 방어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인간의 형성을 설명하는 데는 빈약하다. 주체가 행위의 주어로 불릴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주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문제는 같은 질문이 아니다. 바로 여기서 반대 방향의 사유가 요청된다.

2. 산물로서의 주체

앞 장에서 원인 모델의 공백이 드러났다면, 이제 주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물어야 한다. 흄, 프로이트, 푸코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주체의 자명성을 해체한다. 셋을 하나의 입장으로 묶을 수는 없다. 이 글에서 그들은 각자 하나의 기능을 맡는다.

흄에게 자아는 발견되는 실체가 아니라 묶이는 효과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때 마주치는 것은 지각·감정·기억·관념의 흐름이며, "나"라는 이름은 그 흐름에 사후적으로 붙는다. 프로이트에게 의식은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다. 억압된 욕망, 어린 시절의 흔적, 반복 강박, 방어 기제는 "내가 선택했다"는 말의 배후를 어둡게 만든다. 내가 "내 이유"라고 부르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사후에 정리된 설명이다. 푸코에게 주체는 자연적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학교·병원·감옥·고백의 절차 속에서 생산된다. 어떤 사람은 정상으로, 어떤 사람은 비정상으로 분류되고, 사람들은 그 분류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감시하고, 말하고, 고백한다.

세 방향은 각도는 다르지만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한다. 자아는 실체가 아니라 묶음일 수 있고, 의식은 투명한 주인이 아니라 사후 해석일 수 있으며, 개인은 제도와 담론이 생산한 효과일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면 "내가 선택했다"는 말은 더 이상 순진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 말은 사실 이렇게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 안에서 선택이라고 불릴 만한 사건이 발생했고, 나는 그 사건에 나의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다른 함정이 열린다. 주체가 단지 지각·무의식·권력 장치의 결과라면, 인간은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행위가 조건의 산물이라면, 윤리적 판단은 사회학과 정신분석으로 대체되는가. 결과 모델은 인간의 허구적 자율성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주체가 다시 작동하는 순간을 설명하지 못하면 결정론의 평면으로 미끄러진다.

3. 조직 형식으로서의 주체

결과 모델이 주체를 해체한다면, 이제 문제는 주체가 단순한 내용 이상의 무엇일 수 있는가로 이동한다. 여기서 칸트는 길게 머물 목적지가 아니라 짧게 지나갈 다리다.

우리는 감각과 기억과 판단을 흩어진 조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경험"으로 묶인다. 이 통일이 없다면 세계는 하나의 세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칸트의 의미에서 주체는 경험 속에 등장하는 대상이 아니라, 경험이 하나의 질서를 갖도록 묶는 조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월론적 인식론을 재구성하는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다. 주체가 결과라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경험을 조직하는 형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 주체는 형성된 것이지만, 형성된 것들을 다시 묶는 자리이기도 하다.

4. 인정 속에서 발생하는 주체

앞 장에서 주체가 경험을 조직하는 형식일 수 있음이 드러났다면, 이제 그 형식이 고립된 내면에서 완성되지 않고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물어야 한다. 헤겔은 여기서 푸코와 구별된다.

헤겔에게 자기의식은 혼자서 완성되지 않는다. 타자는 나를 제한하고 부정하며, 동시에 내가 나로 인정받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매개다. 주체는 자기 안에 갇힌 점이 아니라, 타자와의 갈등과 인정을 우회해서만 자신을 획득하는 운동이다. 푸코가 제도와 담론이 주체를 생산하는 방식을 보여준다면, 헤겔은 주체가 타자와의 부정과 인정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둘 다 주체를 고립된 원인으로 보지 않지만, 하나는 장치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인정의 문제다.

이제 주체는 단순한 출발점도, 단순한 결과도 아니다. 주체는 만들어진다. 그러나 만들어진 주체는 다시 경험을 묶고, 타자에게 응답하며, 자신이 받은 이름과 위치를 해석한다. 사후 보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종이가 아니다. 그것은 다음 결정의 근거가 되고, 다음 변명의 문장이 되며, 다음 저항의 언어가 된다.

5. 책임이라는 가장 강한 반론

지금까지의 논의가 주체의 형성성과 관계성을 강조한다면, 이제 가장 치명적인 반론을 정면으로 세워야 한다. 만약 인간이 몸·언어·무의식·계급·제도·타인의 시선의 결과라면, 책임은 무엇인가. 폭력도 조건의 결과인가. 배신도 상처의 산물인가. 범죄도 사회적 생산의 효과인가. 설명은 면제가 되는가.

이 반론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날아든다. 두 방향 모두 가볍지 않다.

한쪽에서 반론은 이렇게 말한다. 설명은 면제가 아니다. 누군가가 타인을 파괴했을 때 우리는 그의 어린 시절, 계급적 조건, 신경증, 사회적 배제, 제도적 실패를 말할 수 있다. 그런 설명은 때로 실제로 필요하다. 그러나 설명이 곧 면제가 된다면 윤리의 공간은 사라진다. 피해자 앞에서 가해자를 조건의 산물로만 말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폭력을 저지른다. 모든 행위를 형성 조건으로 환원하는 언어는 가해자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피해자에게 두 번째 침묵을 강요한다. 주체를 결과로 보는 이론이 이 지점에서 멈추면, 그것은 인간을 이해 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대신 응답 불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그러나 반대쪽 반론도 같은 무게로 돌아온다. 책임을 순수한 자유의 이름으로만 말하는 것도 부정확하다.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정도로 자기 자신을 재배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선택지가 넓고, 어떤 사람에게는 선택지가 거의 없다. 교육·질병·가난·폭력의 경험·차별·트라우마는 단지 배경이 아니다. 그것들은 선택 능력 자체를 변형한다. 책임을 조건과 무관한 순수한 자유에 정초시키는 언어는 반대로 폭력적이다. 그것은 같은 잣대를 들고 전혀 다른 출발선에 선 사람들을 재는 일이며, 불평등을 도덕의 이름으로 완성하는 일이다.

이 반론이 중요한 이유는 두 방향 중 하나만 성립하기 때문이 아니다. 두 방향이 함께 성립하기 때문이다. 설명이 곧 면제가 아니라는 요청과, 책임이 조건의 불평등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요청은 양립 불가능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없으면 각각 처벌주의와 면책주의로 무너진다. 주체를 방어하는 언어는 이 양쪽 긴장을 끝까지 지고 있어야 한다. 주체가 결과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체가 다시 원인처럼 작동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진짜 문제는 다른 층위에 있다. 어떤 조건에서, 어느 정도로, 어떤 방식으로 다시 작동할 수 있는가.

6. 되돌아 작용하는 결과

앞 장의 이중 반론이 타당하다면, 책임과 주체의 기준은 처음부터 다시 세워져야 한다. 책임은 무조건적 기원에서 나오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의 몸, 모국어, 출생 조건, 어린 시절, 최초의 상처, 시대의 담론을 선택하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는 언제나 결과로 시작한다.

그러나 결과로 시작한다는 말이 결과로 끝난다는 뜻은 아니다. 주체의 되돌아 작용은 세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자신이 조건의 결과임을 인식한다. 나는 순수한 내가 아니라 어떤 말들, 어떤 시선들, 어떤 반복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본다. 둘째, 그 조건이 자신 안에서 반복되는 방식을 해석한다. 셋째, 그 반복을 중단하거나 변형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조직한다.

한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관계의 갈등 앞에서 매번 물러난다. 그는 이것을 "나는 원래 평화를 좋아한다"는 문장으로 정리한다. 이 문장은 그에게 오래된 자기 이해이고, 때로는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평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가 반복해 온 것은 평화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갈등에 대한 공포였다. 그리고 그 공포는 아주 오래된 장면들 — 소리치는 어른의 목소리, 특정한 종류의 침묵이 파국으로 이어지던 경험, 자신을 드러내자마자 관계가 끊어지던 기억 — 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는 원래 그렇다"는 문장은 그동안 그의 해석이었지만, 그 해석은 실제로는 설명이 아니라 방어였다. 이 순간부터 그는 같은 상황에서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물러나지 않을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자신이 물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릴 수 있고, 그 한 박자의 지연이 이후 대응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여기서 재배열은 낙관적 자유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제한된 개입이다. 이 점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신을 만든 조건 전체를 마음대로 바꾸지 않는다. 계급은 결심만으로 사라지지 않고, 트라우마는 통찰만으로 해소되지 않으며, 권력 장치는 개인의 의지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앞서 든 사례에서도 한 번의 자각이 반복을 즉시 해제하지는 않는다. 다음에도 그는 물러날 것이고, 그다음에도 그럴 것이다. 다만 매번 조금 더 일찍 자신의 반복을 알아차리고, 때때로 조금 다른 선택지를 시도할 뿐이다.

따라서 주체의 재배열 능력은 차등적이다. 어떤 사람은 넓은 여백을 가지고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거의 닫힌 방에서 시작한다. 심리치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자기 반복을 다시 읽을 언어를 가진 사람과 그 언어마저 박탈당한 사람, 돌아볼 시간을 가진 사람과 생존의 속도 속에서 틈이 없는 사람 사이의 간격은 개인적 자질의 간격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 간격이다. 윤리는 이 불평등을 지워서는 안 된다. 같은 재배열을 모든 사람에게 같은 강도로 요구하는 언어는 그 자체로 또 다른 폭력이다.

그럼에도 주체를 말해야 하는 이유는 이 작은 여백 때문이다. 주체는 절대적 원인이 아니라 부분적 변형의 자리다. 주체는 자신을 만든 원인들을 없애는 힘이 아니라, 그 원인들이 자신을 통해 그대로 반복되지 않도록 비트는 힘이다. 의식이 사후 보고서라면, 주체는 그 보고서를 다음 행위의 각본으로 그대로 제출하지 않는 능력이다. 이미 쓰인 문장을 다시 읽고, 그 문장이 나를 계속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가능한 한 다른 문장으로 고쳐 쓰는 일. 주체는 그 고쳐 쓰기의 자리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자리는 작다.

이렇게 보면 책임도 새롭게 정의된다. 책임은 "너는 아무 조건 없이 그렇게 했다"는 비난이 아니다. 책임은 "너를 그렇게 만든 조건이 있더라도, 그것이 너를 통해 어떻게 반복되는지 묻고, 가능한 범위에서 그 반복을 변형해야 한다"는 요구다. 이 요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강도로 부과될 수 없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질 수도 없다. 책임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은 설명될 수는 있지만 응답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7. 결론 — 처음부터 원인이었던 것은 없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주체는 원인인가 결과인가. 이 질문은 필요하지만 그대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체는 원인과 결과 중 하나에 배치되는 대상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질문 자체를 옮기는 일이다. "인간은 자유로운가, 결정되어 있는가"는 너무 크고 너무 빨리 닫힌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렇다. 인간은 자신을 만든 조건을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는가. 그 조건이 자신 안에서 반복되는 방식을 어디까지 해석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반복을 어느 만큼 변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자유와 결정론의 이분법을 대체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이분법이 처음부터 잘못 설정된 좌표였음을 드러낸다.

주체는 처음부터 원인이었던 것이 아니다. 주체는 자신을 만든 원인들을 다시 원인으로 만들지 않을 때, 비로소 발생한다.

참고자료

René Descartes, Meditations on First Philosophy.

David Hume, A Treatise of Human Nature.

Immanuel Kant, Critique of Pure Reason.

G. W. F. Hegel, Phenomenology of Spirit.

Sigmund Freud, The Ego and the Id.

Michel Foucault, Discipline and Punish.

Michel Foucault, The History of Sexuality, Volume 1.

Judith Butler, The Psychic Life of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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