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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비교 — 우리를 형성하고 또 해체하는 거울

I. 비교는 왜 피할 수 없는가

우리는 흔히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는다. 이 충고는 대체로 실패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 비교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습관이 아니라, 자기의식이 성립하기 위한 구조적 조건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곧 비교를 변호하지는 않는다. 바로 그 불가피성 때문에 비교는 인간을 세우기도 하고 허무는 데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것은 비교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다. 어떤 조건에서 비교는 자기 형성의 계기가 되고, 어떤 조건에서 자기 소모의 기제로 전락하는가이다. 이 글은 사회적 비교가 작동하는 서로 다른 층위 — 발생론적 층위(어떤 현상이 어떻게 처음 성립하는가의 층위), 구조와 정동의 층위, 제도와 환경의 층위, 해석의 층위 — 를 차례로 구분한 뒤, 그 층위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한 인간의 존재 감각을 조직하고 또 훼손하는지를 추적한다. 결론에서는 이 추적의 결과를, 비교를 회피하는 처방이 왜 무력한가, 그리고 어떤 다른 응답이 가능한가에 관한 단일한 명제로 수렴시킬 것이다.

II. 비교의 발생론 — 좌표는 어떻게 위계로 변하는가

1. 자기 이해의 절차로서의 비교

페스팅거(Leon Festinger)가 1954년에 제안한 사회적 비교 이론은,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과 의견을 평가할 때 절대적 기준이 없을 경우 유사한 타인을 참조한다고 주장한다. 이 설명은 이후 여러 수정과 보완을 거쳤지만, 그 핵심 직관은 오늘날까지 유지된다. 인간은 자기를 직접 지각할 수 없고, 자기에 대한 판단은 항상 비교의 매개를 통해서만 안정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교는 우선 허영이 아니라 인식의 절차이다. 내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졌는지,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답은 내면의 독백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나는 늘 타인을 참조하여 자기의 좌표를 얻는다. 비교는 이 좌표화의 문법이다. 다만 페스팅거의 가설이 주로 자기 평가의 안정화에 집중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제의 비교는 그 경계선에서 멈추지 않고, 좌표화를 넘어 가치 판정의 영역으로 흘러든다. 이 흘러듦이야말로 철학적 분석이 요청되는 지점이다.

2. 정보에서 위계로의 미끄러짐

내가 어떤 영역에서 다른 사람보다 뒤처져 있다는 정보는 쉽게 나는 더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감각으로 번져 간다. 정보의 차원에서 가치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이 이행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 않다. 흄(David Hume)이 일찍이 지적한 '이다(is)'와 '이어야 한다(ought)' 사이의 간극은 여기서도 엄연하다. 어떤 사실의 차이로부터 존재의 위계라는 규범적 결론은 자동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의 자기 감각은 이 간극을 거의 반사적으로 뛰어넘는다. 더 많이 가진 자는 더 나은 존재이고, 덜 가진 자는 덜 가치 있는 존재라는 번역이 무심결에 이루어진다. 이 번역은 지나치게 매끄럽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받지 않는다. 사회적 비교의 파괴성은 차이를 발견한다는 데 있지 않고, 그 차이를 존재의 위계로 무심히 옮겨 적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옮겨 적음이 왜 그토록 집요한지는 개인 심리의 수준에서만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주체의 안쪽이 아니라 주체가 놓인 관계 구조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III. 비교의 구조와 정동 — 그 미끄러짐은 왜 집요한가

3. 인정의 질서와 상대적 박탈

앞 장의 분석이 정보에서 위계로의 미끄러짐을 개인의 자기 감각 안에 위치시켰다면, 이제 그 미끄러짐의 사회적 발판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헤겔(G. W. F. Hegel)에 따르면 자기의식은 혼자 성립할 수 없다. 다른 자기의식에 의해 인정받음을 통해서만, 나는 단순한 생명에서 정신으로 올라선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보여 주는 바는, 인정이 상호적이지 않을 때 인정 구조 자체가 기형화된다는 사실이다. 이 통찰을 현대의 사회적 비교에 대입하면, 비교의 격렬함은 자원이나 성취의 객관적 차이보다 인정 질서(개인의 가치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인정받는가의 사회적 배열) 안에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예민함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절대적 결핍보다 상대적 박탈에 더 쉽게 분노한다. 스토퍼(Samuel A. Stouffer) 등의 미군 연구와 런시먼(W. G. Runciman)의 후속 논의가 오래 전에 경험적으로 시사했듯이, 어떤 집단의 불만은 그들이 얼마나 부족한가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타인과 비교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 관계는 모든 집단에서 동일한 강도로 관찰되지 않으며, 결정론적 인과보다는 조건적 경향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 경향이 반복적으로 관찰된다는 사실 자체는 의미가 작지 않다. 비교는 단순한 질투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존재 의의를 인정 질서 안에서 확인하려는 인간의 기본 구조가 특정 사회 배열과 만났을 때 자주 산출하는 결과물이다.

4. 원한과 정동의 경제

헤겔이 인정의 구조적 조건을 문제 삼는다면,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그 조건이 주체 안에 남기는 정서적 지층을 드러낸다. 사회적 비교는 순수한 인식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분비한다. 정동의 경제(어떤 감정이 어떤 사회 구조 안에서 어떻게 발생·순환·전이되는가의 분배 양식)라는 표현을 빌릴 수 있다면, 비교는 그 경제에서 가장 활발한 시장이다. 나보다 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자를 바라볼 때, 나는 경탄만 느끼지 않는다. 거기에는 숨은 적의와 무력감이 섞여 있다. 나보다 아래에 있다고 여겨지는 자를 바라볼 때, 나는 연민만 느끼지 않는다. 거기에는 안도와 은밀한 우월감이 섞여 있다. 니체가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 이름 붙인 이 정동의 반전 구조는, 비교가 왜 그렇게 쉽게 도덕의 언어로 포장되는지를 설명해 준다. 나는 단순히 덜 가졌다고 말하는 대신 저 사람은 부당하게 가졌다고 말한다. 나는 단순히 더 가졌다고 인정하는 대신 나는 그만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한다. 비교는 이 이중의 번역을 통해 도덕 판단을 가장한 자기 정당화의 무대가 된다. 여기서 헤겔과 니체는 중복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을 분담한다. 헤겔은 인정 구조의 실패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를 보여 주고, 니체는 그 실패가 어떤 감정의 침전물을 남기는가를 보여 준다. 전자는 구조의 층위이고 후자는 정동의 층위이다.

IV. 비교의 제도와 환경 — 왜 개인의 수양만으로는 부족한가

5. 규율에서 성과로

앞 장이 비교의 정동을 주체와 그 인정 환경 사이의 관계 안에 정박시켰다면, 그 환경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는가는 또 다른 층위의 물음이다. 사회적 비교가 순전히 주체 내부의 문제라면, 그것은 개인의 수양으로 상당 부분 제어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비교는 개인이 선택하는 행위이기 이전에 사회가 개인을 조직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푸코(Michel Foucault)가 근대 규율 권력을 분석하면서 드러낸 바 있듯이, 학교·군대·병원·공장은 사람들을 서로 비교 가능한 단위로 배치하고, 가시성의 격자 안에서 각자를 등급화한다. 비교는 이 제도적 장치의 부산물이 아니라 그 핵심 기술이다.

한병철(Byung-Chul Han)은 이러한 외적 규율이 후기 자본주의에서 내면화된 성과 강박으로 전이되었음을 지적한다. 오늘날 개인은 타인과의 비교를 외부에서 강요받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측정하고 최적화한다. 외적 감시자가 사라진 자리에 자발적 감시자가 들어서는 셈이다. 이때 흔히 자기 비교라 불리는 현상이 등장한다.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을 견주고, 목표한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견주는 그 운동은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비교와 분리된 별개의 기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기 비교의 척도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한 번 더 물으면 사정은 달라진다. 어제의 자신은 사회가 어제의 자신에게 부여한 위치에서 자유롭지 않고, 목표한 자신은 사회가 가치 있다고 표시한 좌표를 자기 안에 옮겨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비교는 사회적 비교의 외부에 있는 다른 종류의 운동이 아니라, 사회적 비교가 주체 내부로 접혀 들어와 자기 감시의 형태로 재가공된 판본이다. 이 내면화의 단계에서 비교는 자기 이해의 방식이기를 넘어, 한병철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착취의 문법이 된다. 푸코의 분석이 비교의 외적 구조를 드러낸다면, 한병철의 분석은 그 구조가 내면으로 접히는 순간을 포착한다. 양자는 같은 현상의 바깥과 안쪽을 맞물리는 두 축이다.

6. 플랫폼 시대의 상시적 비교

이 내면화는 디지털 플랫폼에서 가속된다. 과거에는 비교가 삶의 특정 장면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났다면, 오늘날에는 손안의 화면을 통해 상시적으로 공급된다. 게다가 플랫폼은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않는다. 그것은 정제된 성공, 편집된 외모, 반응이 쉬운 이미지들을 우선 배열한다. 사용자는 타인의 하이라이트와 자기의 비편집된 일상을 비교하게 된다.

이 환경에서 일어나는 비교는 모두 같은 종류가 아니다. 사회심리학은 오래전부터 상향 비교(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대상과의 비교)와 하향 비교(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대상과의 비교)를 구분해 왔다. 맥콤(Carly A. McComb), 반만(Eric J. Vanman), 토빈(Stephanie J. Tobin)이 2023년에 발표한 메타분석은 소셜미디어에서 상향 비교 표적에 노출되는 것이 자기 평가, 자존감, 신체 이미지, 주관적 안녕에 일관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 효과가 연령과 성별에 따라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이 결과는 플랫폼이 우월한 표적을 일상적으로 공급하는 환경 자체가 평균적 자기 평가의 하강 압력으로 작용함을 시사한다. 반면 하향 비교는 일시적인 안도를 줄 수 있으나 그 효과의 크기와 일관성은 상향 비교의 부정적 효과보다 약하다는 보고가 누적되어 있다.

비교의 효과는 그러나 비교 방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무스바일러(Thomas Mussweiler)가 정식화한 동화-대조(assimilation–contrast) 모델에 따르면, 같은 상향 비교라도 비교자가 표적과의 유사성에 주의를 두는가, 차이에 주의를 두는가에 따라 결과가 갈린다. 유사성에 초점이 맞을 때는 자기 평가가 표적 쪽으로 끌려가는 동화가 일어나 영감과 동기 부여가 산출되고, 차이에 초점이 맞을 때는 자기 평가가 표적에서 멀어지는 대조가 일어나 자존이 깎인다. 즉 같은 자극이 누구에게는 학습이 되고 누구에게는 박탈이 된다. 그리고 그 갈림의 자리에는 비교자의 해석 양식이 놓여 있다. 무스바일러의 분석이 가진 함의는 사회적 비교가 환경의 단순한 출력이 아니라, 환경과 주체의 인지적 초점이 결합한 결과라는 점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는 비교 성향의 개인차이다. 깁슨(Frederick X. Gibbons)과 부우닉(Bram P. Buunk)이 1999년에 개발한 사회적 비교 성향 척도(INCOM, Iowa–Netherlands Comparison Orientation Measure)는, 사람들이 사회적 비교에 관여하는 정도가 안정된 개인 성향으로 측정 가능함을 보였다. 후속 연구들은 이 성향이 우울, 사회 불안, 낮은 자존감과 약하지만 일관된 상관을 가진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고했다. 다시 말해 같은 플랫폼 환경에 노출되어도 어떤 사람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떤 사람은 깊이 흔들린다. 다만 이 상관은 인과의 방향을 한쪽으로 고정해 주지 않는다. 비교 성향이 우울을 유발하는지, 우울이 비교 성향을 강화하는지, 혹은 제3의 변수가 둘 모두를 견인하는지는 별도의 종단 연구에서야 결정될 사안이다.

이 세 변수 — 비교 방향, 동화/대조 양식, 비교 성향의 개인차 — 를 함께 놓으면, 한때 학계에서 유행했던 능동/수동 사용의 단순한 이분법이 왜 한계에 부딪혔는지 이해할 수 있다. 베르됭(Philippe Verduyn) 등이 2017년에 정식화한 초기 모델은 능동적 사용이 자존을 떠받치고 수동적 사용이 자존을 갉아먹는다고 보았으나, 이후 발칸부르흐(Patti M. Valkenburg) 등의 비판적 검토와 마이어(Adrian Meier)의 연구는 이 이분법이 너무 거칠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베르됭 자신도 2022년의 확장 모델에서, 수동적 사용 가운데서도 자기 관련성이 높은 타인의 성취 콘텐츠를 둘러볼 때에만 일관된 부정적 효과가 관찰된다고 단서를 단다. 즉 플랫폼이 자존감을 훼손한다는 명제는 사용자, 콘텐츠, 비교 양식의 결합 위에서만 책임 있게 말해질 수 있다. 무차별적인 단정은 경험 연구의 실제 분포를 왜곡한다.

이 단서들은 그러나 플랫폼 환경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다. 비교의 빈도, 속도, 범위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고,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콘텐츠가 자기 관련성과 상향 표적 쪽으로 체계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며, 평균적으로 부정적인 자기 평가 효과가 안정적으로 보고된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 환경에서 남과 비교하지 말라는 충고는, 물속의 존재에게 젖지 말라고 말하는 것만큼 기능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미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닿지 않는 층위로 넘어가 있다.

V. 비교의 해석 — 어떻게 다시 조직할 것인가

7. 스토아의 재해석

여기서 스토아 전통은 하나의 대조점을 제공한다. 에픽테토스(Epictetus)는 우리에게 달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엄격히 구분하라고 말한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 타인의 성취는 원리적으로 내 통제 밖에 있다. 그러므로 거기에 자기 감정을 걸지 말라는 것이다. 이 태도가 사회적 비교의 해독제가 될 수 있다는 직관은 분명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직관은 두 가지 제약 아래에서만 작동한다. 첫째, 비교가 제도적으로 강제되지 않는 세계여야 한다. 둘째, 주체가 자기의 해석 권한을 적어도 일정 부분 회수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전제해야 한다. 현대의 비교 환경은 이 두 조건 모두에 대해 적대적이다. 따라서 스토아적 자족은 더 이상 기성의 처방으로 직접 이식될 수 없다. 그러나 그 통찰이 완전히 무효한 것은 아니다. 스토아가 정확히 가르쳐 주는 것은 비교를 없애는 법이 아니라, 비교의 결과를 자기 존재의 판결로 직접 번역하지 않는 법이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회피가 아닌 해석의 길이 열린다. 비교를 못 본 척하는 태도와, 비교를 보되 그 의미를 다르게 조직하는 태도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8. 존재의 비교와 과정의 비교

이 해석의 가능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 사회적 비교는 두 상이한 방식으로 수행된다. 하나는 존재의 비교이고 다른 하나는 과정의 비교이다. 존재의 비교는 저 사람은 나보다 우월하고 그러므로 나는 덜 가치 있다는 문장으로 수렴한다. 과정의 비교는 저 사람은 어떤 경로를 거쳐 저기에 도달했고, 그 경로에서 나는 무엇을 읽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간다. 전자는 차이를 위계로 번역하고, 후자는 차이를 정보로 되돌린다. 전자는 타인을 재판관으로 세우고, 후자는 타인을 단서로 삼는다.

이 구분은 단순한 심리적 기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관한 존재론적 선택(자기를 어떤 종류의 존재자로 정립할 것인가에 관한 근본적 결정)이다. 존재의 비교는 자기를 고정된 양으로, 측정되고 판정되는 덩어리로 상정한다. 과정의 비교는 자기를 시간 속에서 형성되는 어떤 궤적으로 상정한다. 전자의 인간은 순위표의 한 점이다. 후자의 인간은 경로의 담지자이다.

이 구분은 앞에서 살핀 동화-대조 모델과 우연히 닮은 것이 아니다. 무스바일러의 모델이 보여 준 바, 같은 상향 표적이 누구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되고 누구에게는 박탈의 증거가 되는 갈림은, 비교자가 표적과 자신 사이에서 무엇을 읽기로 선택하는가에 달려 있다. 유사성을 읽으면 표적은 자신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의 표지로 변하고, 비유사성을 읽으면 표적은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거리의 측정자로 변한다. 존재의 비교는 후자에 가깝고, 과정의 비교는 전자에 가깝다. 두 구분은 같은 현상을 인지심리와 존재론의 두 어휘로 각각 묘사한 것이다. 다만 둘 사이에는 일대일 대응이 아닌 가족 유사성이 있다. 동화-대조 모델이 단일 자극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다룬다면, 존재/과정의 구분은 비교 행위가 누적되어 형성되는 자기 이해의 양식 자체를 다룬다. 후자가 전자를 반복적으로 재산출하는 토대인 셈이다.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 두 번째 인간 이해가 차이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차이를 존재의 판결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좁은 통로를 연다는 사실이다.

9. 반론: 비교 없는 삶은 가능한가

여기서 한 가지 반론을 독립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가장 강한 형태로 재구성하면 이 반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인을 학습 자료로 참조하는 일과 타인을 자존의 척도로 삼는 일은 원리적으로 구별 가능하며, 진정한 자유는 후자를 끊어 내는 데 있다. 따라서 비교의 해석을 재조직하자는 처방은 결국 비교 안에 머무르는 또 다른 변종에 불과하며, 자기를 외부 척도로 측정하는 한 자기 형성은 이미 변질된다. 이 입장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자율의 회복으로 자기를 정식화한다. 학습은 부정하지 않되, 학습 자료로서의 타인과 판정자로서의 타인을 구분하고, 후자에 대해 단호한 거리를 두자는 것이다.

이렇게 강화된 형태에서 이 반론은 부분적으로 타당하다. 자존의 척도와 학습의 자료를 구별하려는 시도 자체는 이 글이 제시한 존재의 비교/과정의 비교 구분과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두 기능이 깔끔하게 분리될 수 있다는 가정은 회의될 만하다. 인간이 어떤 모델의 작업을 학습 자료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모델은 동시에 자기에게 가능한 도달 범위의 외곽선으로 작용한다. 학습은 늘 일정한 자기 평가를 수반한다. 거기에서 판정 기능을 외과적으로 절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실제 학습 경험과 잘 맞지 않는다. 학생은 뛰어난 동료를 보며 자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가늠하고, 예술가는 선배의 작업을 참조하며 자기 언어의 한계를 비로소 문제화한다. 이 가늠과 문제화 안에는 이미 자기에 대한 잠정적 평가가 묻어 있다. 그러므로 비교 없는 삶이라는 이상은 그것이 매혹적인 만큼 인간의 학습 구조에 대한 특정한 오해 위에 서 있다. 다만 그 오해가 가리키는 방향 — 판정자의 자리를 줄이려는 의지 — 은 이 글의 결론이 받아들이는 방향이기도 하다. 문제는 비교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비교를 어떤 해석 문법(어떤 사실을 어떤 의미로 번역하는 규칙) 아래에서 작동시키는가이다.

VI. 결론 — 세 층위의 수렴과 단일한 응답

지금까지의 분석은 다음의 단일한 명제로 수렴한다. 사회적 비교는 자기의식의 구조적 조건이므로 그것을 거부하는 처방은 무력하며, 비교를 다루는 과제는 주체·문화·제도라는 세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해석 문법의 재조직으로만 응답될 수 있다.

이 단일한 응답은 세 층위에서 풀어 쓸 때 비로소 손에 잡힌다. 주체의 층위에서는, 차이를 발견할 때마다 곧장 존재의 위계로 번역하는 반사를 의심하고, 존재의 비교에서 과정의 비교로 돌아가는 훈련이 요구된다. 무스바일러의 모델이 보여 주듯, 같은 표적도 어떤 주의의 양식 위에서 만나는가에 따라 영감이 되거나 박탈이 된다. 이 양식은 자동적이지 않으며, 일정 정도 길러질 수 있다. 문화의 층위에서는, 모든 성취를 즉각적으로 순위화하고 전시하는 정서적 관습이 문제가 된다. 비교 성향의 개인차 연구가 시사하듯 같은 환경도 같은 강도로 작동하지는 않지만, 환경 자체가 비교를 부추기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을 때 개인차의 보호 효과는 빠르게 잠식된다. 어떤 종류의 차이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관한 집합적 감수성이 재조정되지 않으면, 개인의 해석 훈련은 곧 외로운 노동으로 변한다. 제도의 층위에서는, 학교·직장·플랫폼이 사람을 비교 가능한 단위로 분쇄하는 방식 자체가 묻히지 않으면, 위의 두 노력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알고리즘이 자기 관련성과 상향 표적 쪽으로 체계적으로 편향된 환경에서, 개인의 해석과 공동체의 감수성만으로 균형을 회복하기는 어렵다. 이 세 층위는 서로 얽혀 있고, 어느 하나도 다른 층위를 대체하지 못한다.

여기서 이 글이 감행하는 이행 하나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앞의 절반이 비교가 인간의 조건이라는 서술적 진술이었다면, 여기서의 세 층위는 그 조건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관한 규범적 요청이다. 서술에서 규범으로의 이 이행이 자동적 추론이 아님은 이미 밝혔다. 그러나 인간이 이미 비교를 통해 자기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 구성 방식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요청한다. 바로 여기에 철학의 좁은 몫이 있다. 비교는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그 비교로 무엇을 보려 하는가, 그리고 어떤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보게 하는가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거울은 이미 우리 손에 있다. 그러나 그 거울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저당 잡힐 것인지, 혹은 그 거울에서 아직 걷지 않은 길의 윤곽을 읽어 낼 것인지는, 끝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자유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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