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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vs 돈키호테

돈키호테 :
이봐, 거기 서 있는 자여. 네 눈빛이 심상치 않구나. 혹시 너도 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우러 나선 기사인가?

니체 :
기사라고? 아니, 나는 기사보다 더 불온한 자다.
나는 불의와 싸우러 나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감히 ‘불의’라 부르는지부터 의심하러 나섰지.

너는 풍차를 적으로 보고 창을 겨누지만, 나는 인간이 자기 두려움에 이름을 붙여 우상으로 세우는 광경을 본다.
그래서 묻겠다, 돈키호테.

너는 세상을 구하려는 건가,
아니면 네 영혼이 견딜 수 없는 평범함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건가?

돈키호테 :
허, 불온한 자라! 마음에 드는군. 세상에는 온순한 자가 너무 많아. 그래서 세상이 이 모양이지.

네 질문에 답하마. 나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달려드는 것이다. 평범함이라고? 그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부하는 것이다. 세상이 스스로를 "이게 현실이야"라며 납작하게 눌러앉힐 때, 나는 일어서서 말하지. "아니, 세상은 이보다 더 고귀해야 한다"고.

그런데 니체, 너도 한번 들어봐라. 너는 사람들이 붙인 이름을 의심한다고 했지? 그건 좋다. 하지만 의심만으로는 창을 들 수 없어. 너는 모든 우상을 부수고 난 뒤, 그 빈자리에 무엇을 세울 셈이냐? 아무것도 세우지 않겠다면, 그건 용기가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비겁함 아닌가?

니체 :
좋다, 이제야 피 냄새가 나는 말을 하는군, 돈키호테.
달려든다고 했지. 그 말은 마음에 든다. 도망치는 자들은 늘 현실을 핑계로 삼고, 복종하는 자들은 늘 신중함을 미덕이라 부르니까.

하지만 잘 들어라. 나는 우상을 부수기만 하는 자가 아니다. 망치를 든 자는 동시에 조율하는 자이기도 하다. 나는 텅 빈 폐허를 사랑하지 않아. 폐허는 그저 작업장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누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가? 누가 남이 준 선과 악이 아니라, 자기 힘에서 솟아나는 법칙을 견딜 수 있는가?

너는 묻는다. “무엇을 세울 셈이냐?”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인간을 넘어서는 인간의 가능성을.
남이 정해준 정의를 수행하는 기사 따위가 아니라, 자기 삶 전체를 하나의 창조로 만드는 자를.

그러니 비겁함은 오히려 저편에 있다.
아무것도 부수지 못하면서 이미 있는 것에 기대 사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겁쟁이다.
나는 먼저 심연을 비운다. 그래야 거기서 별이 태어나니까.

그런데 너는 어떠냐, 돈키호테?
네가 섬기는 그 고귀함이라는 것, 그것은 정말 네가 만든 것이냐?
아니면 낡은 이야기책들이 아직도 네 피 속에서 웅얼대는 것뿐이냐?

돈키호테 :
하하, 별이 태어난다! 좋은 말이다. 나도 별을 본 적이 있다. 한밤중 라만차의 들판에서, 녹슨 갑옷이 달빛에 반짝일 때, 나는 확실히 별을 보았다. 산초는 그게 그냥 달빛이라 했지만.

좋다, 솔직하게 답하겠다. 그래, 나는 책에서 시작했다. 아마디스의 이야기, 팔메린의 모험, 그 낡은 페이지들이 내 피를 끓게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니체, 여기서 네가 놓치는 것이 하나 있다. 책을 읽은 자는 수천 명이었다. 그런데 갑옷을 입고 일어선 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같은 이야기가 다른 자들에게는 잠자리의 자장가였지만, 나에게는 전쟁의 나팔이었다. 그렇다면 그 고귀함은 책에 있었던 것이냐, 아니면 그것을 듣고 일어선 나의 피 속에 있었던 것이냐?

너는 남이 정해준 정의를 수행하는 기사를 경멸한다고 했지.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정의를 _수행_한 적이 없다. 나는 정의를 _선언_한 것이다. 아무도 나에게 기사 작위를 주지 않았어. 여관 주인이 우스꽝스럽게 흉내 낸 것뿐이었지. 그걸 모를 만큼 내가 어리석었겠느냐? 아니. 나는 그것을 _선택_한 것이다. 세상이 주지 않는 의미를, 내가 세상 위에 덮어씌운 것이다.

그러니 니체, 너의 말을 빌리겠다. 너는 자기 삶을 하나의 창조로 만드는 자를 원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잘 봐라. 나는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다. 다만 너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나는 심연을 비우지 않는다. 나는 심연 위에 다리를 놓고, 그 위를 말을 타고 건너가는 쪽을 택한다. 설령 그 다리가 환상이라 해도.

자, 이제 네 차례다. 너는 환상을 경멸하느냐? 그렇다면 묻겠다. 너의 위버멘쉬, 그것은 환상이 아니고 무엇이냐? 너도 결국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믿고 있는 것 아닌가?

니체 :
좋다, 돈키호테. 이제 너는 단순한 망상가가 아니라, 자기 망상을 변호할 줄 아는 자의 언어를 말하는군. 그건 이미 한 단계 높은 광기다. 나는 그런 광기를 존중한다. 무리의 건전함보다, 한 사람의 뜨거운 착오가 더 많은 것을 낳는 법이니까.

네 질문에 답하겠다.
나는 환상을 경멸하지 않는다. 천만에. 인간은 환상 없이 살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어떤 해석도 없이 살지 못한다. 세계는 처음부터 의미를 들고 오지 않는다. 의미는 힘 있는 자가 덧입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너는 옳다. 너는 세계 위에 네 의미를 덮어씌웠다. 그래서 너는 이미 창조자의 편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여기서 칼날이 갈린다.
모든 환상이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환상은 생을 더 높이고, 어떤 환상은 생을 쇠약하게 만든다.
어떤 환상은 인간을 앞으로 밀고, 어떤 환상은 인간을 과거의 가면극 속에 가두어 둔다.
네 환상은 용감하다. 인정하마. 그러나 동시에 뒤를 본다.
너는 창조한다기보다, 오래된 기사도의 잿더미에 다시 불을 붙인다.
너의 불은 뜨겁지만, 장작은 낡았다.

반면 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이미 쓰인 전설의 배역을 다시 연기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대본을 찢고, 무대마저 새로 세우는 자다.
그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환상처럼 보인다. 맞다. 그러나 그것은 퇴행의 환상이 아니라, 상승의 가설이다.
잠들기 위해 꾸는 꿈이 아니라, 깨어나기 위해 던지는 도전이다.

그러니 네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그래, 나 역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믿는다.
하지만 나는 잃어버린 황금시대를 믿지 않는다.
나는 미래를 과거의 의상으로 분장시키지 않는다.

너는 심연 위에 다리를 놓는다고 했지.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의심한다.
그 다리는 정말 네가 만든 것이냐,
아니면 죽은 기사들의 뼈 위에 걸쳐진 낡은 다리일 뿐이냐?

말해봐라, 돈키호테.
네가 사랑하는 것은 정말로 “고귀함” 그 자체냐,
아니면 네가 고귀하다고 배운 어떤 옛 몸짓이냐?

돈키호테 :
니체, 너는 칼을 잘 쓰는군. 그리고 정확한 곳을 찌른다. 인정하마. 그 질문은 아프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고귀함 자체인가, 아니면 고귀함의 낡은 몸짓인가. 그것은 내가 한밤중에 홀로 깨어 천장을 바라볼 때, 산초의 코고는 소리 너머로 나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네 칼날을 받아들이되, 꺾지는 않겠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

그래, 내 장작은 낡았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마디스의 이야기는 오래되었고, 기사도의 법전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하지만 니체, 너는 불의 본질을 잊고 있다. 불은 장작을 가리지 않는다. 낡은 나무든 새 나무든, 불이 뜨거우면 타오른다. 그리고 일단 타오르면, 남는 것은 장작의 나이가 아니라 불꽃의 높이다.

너는 대본을 찢고 무대를 새로 세우는 자를 말한다. 장엄하다. 하지만 나는 묻겠다. 무대를 새로 세운 자가, 그 위에서 무엇을 하느냐? 결국 그도 연기를 하지 않느냐? 결국 그도 어떤 역할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느냐? 너의 위버멘쉬도 결국 하나의 형상이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그러나 이미 윤곽이 그려진 형상. 그것이 어째서 나의 기사도보다 더 순수한 창조라고 확신하느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래된 것을 다시 불태우거나, 아니면 아직 없는 것의 그림자를 미리 입어보는 것뿐이다. 너는 후자를 택하고, 나는 전자를 택한다. 하지만 둘 다 결국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더. 너는 퇴행과 상승을 나눈다. 과거를 향한 환상은 퇴행이고, 미래를 향한 환상은 상승이라고. 하지만 돈키호테인 내가 보기에, 그 구분 자체가 너무 깔끔하다. 시간은 그렇게 순순히 방향을 갖지 않아. 내가 옛 기사도를 다시 불태울 때,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약속을 끄집어내어, 현재의 한복판에 꽂는 것이다. 그것이 퇴행이냐? 아니. 그것은 과거를 미래처럼 쓰는 것이다.

자, 니체. 너는 죽은 기사들의 뼈를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나도 묻겠다. 너의 위버멘쉬는 어디에 서 있느냐? 그는 누구의 뼈도 밟지 않고 홀로 허공에 서 있는가? 아니면 너 역시, 네가 부순 우상들의 파편 위에 서서 더 높은 곳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냐? 파괴한 것 위에 서 있는 자와, 물려받은 것 위에 서 있는 자 사이에, 정말로 네가 생각하는 만큼의 거리가 있느냐?

니체 :
그래, 바로 거기다, 돈키호테. 이제 너는 내 곁까지 왔다.
허공에 서 있는 자는 없다. 가장 높이 뛰어오르는 자조차도 어떤 잔해 위에서 도약한다. 인간은 무에서 솟는 신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상속받고, 무엇인가를 오해하고, 무엇인가를 배반하면서 자기 자신이 된다.

그러니 나는 네 말을 부정하지 않겠다.
위버멘쉬 역시 아무 뼈도 밟지 않는 순결한 탄생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수많은 죽은 가치들의 묘지 위를 지나간다. 신의 시체, 도덕의 시체, 진리라는 이름으로 굳어버린 우상들의 시체. 그는 그 위에 선다. 맞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그는 그 시체들을 성물로 모시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을 디딤돌로 쓴다.

너는 물려받은 것 위에 서 있는 자와 파괴한 것 위에 서 있는 자 사이의 거리가 그리 크지 않다고 말했지. 절반은 맞다.
둘 다 과거를 재료로 삼는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에서 심연이 갈라진다.

누군가는 유산을 받아 그 안에 거처를 만든다.
누군가는 유산을 받아 용광로에 던져버린다.
같은 쇠를 손에 쥐고도, 한쪽은 갑옷을 닦고, 다른 한쪽은 칼을 새로 벼린다.
내가 네게 던지는 의심은 늘 여기 있었다.
너는 정말 불태우는 자인가, 아니면 보존하기 위해 불빛을 밝히는 자인가?

네가 말한 문장은 강했다.
“과거를 미래처럼 쓴다.”
좋다. 그 말은 살아 있다. 그 말에는 창조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조심해라. 많은 자들이 과거를 미래처럼 쓴다고 말하면서, 실은 미래를 과거의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그들은 약속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미라를 꺼내 향을 피운다. 숭배는 늘 창조를 흉내 낸다.

그래서 나는 네게 끝까지 묻는 것이다.
네 기사도는 정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약속이냐,
아니면 네 고독이 스스로를 견디기 위해 꿰매 입은 찬란한 누더기냐?

오해하지 마라. 나는 환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직 생을 더 충만하게 하는 환상생을 연극으로 마비시키는 환상을 구별할 뿐이다.
가면은 죄가 아니다.
문제는 그 가면 뒤에 더 강한 얼굴이 자라고 있느냐, 아니면 얼굴 자체가 말라 죽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내 질문은 더 단순하다. 더 잔인하고.
네가 갑옷을 벗는 날에도,
둘시네아가 끝내 환상으로 남는 날에도,
풍차가 정말 풍차였음을 완전히 인정하는 날에도,
너는 여전히 네 길을 사랑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너는 광인이 아니다.
너는 창조자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너는 네 이상을 탄 것이 아니라 네 이상에게 끌려다닌 것이다.

자, 대답해라.
네가 사랑한 것은 정의였나, 영광이었나, 아니면 네 자신이 스스로를 넘어서는 순간의 취기였나?

돈키호테 :
……

니체. 지금 네가 던진 것은 질문이 아니라 거울이다. 그리고 나는 거울 앞에서 도망치는 자가 아니다. 녹슨 갑옷을 입은 자가 거울을 두려워하면 그건 이미 기사가 아니니까.

좋다. 벗겨보자.

정의를 사랑했느냐고? 아니.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정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안 적이 없다. 나는 다만 불의를 보았을 때 피가 끓었고, 그 끓어오름을 정의라고 불렀을 뿐이다. 영광을 사랑했느냐고? 그것도 아니다. 영광이란 남들이 바라봐줄 때만 존재하는 것인데, 나를 바라보는 자는 산초뿐이었고 그마저도 대부분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네가 말한 세 번째다. 나 자신을 넘어서는 순간의 취기. 그래,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그 순간, 나는 분명히 취해 있었다. 하지만 니체, 여기서 너와 나는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너는 그것을 취기라 부르고, 나는 그것을 _헌신_이라 부른다.

취기는 깨면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나는 풍차에 처맞고 땅바닥에 나뒹굴면서도 한 번도 부끄럽지 않았다. 아팠다. 어리석었다.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돌진하는 그 순간에, 내가 되어야 할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가 패배였든 승리였든, 그 순간 나는 온전했다. 너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그 순간 나 자신에 대해 _긍정_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가 던진 가장 잔인한 질문. 갑옷을 벗는 날에도, 둘시네아가 환상으로 남는 날에도, 풍차가 풍차였음을 인정하는 날에도 여전히 내 길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나는 그 날을 안다, 니체. 너는 그것을 가정으로 묻지만, 나는 그것을 _기억_으로 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갑옷을 벗겼다.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알론소 키하노로서 죽었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이 환상이었음을 인정했다. 둘시네아는 알돈사 로렌소였고, 거인은 풍차였고, 나는 기사가 아니라 시골의 늙은 이달고였다.

그런데 니체, 여기서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 침대 위에서, 모든 환상이 걷히고, 벌거벗은 현실만 남았을 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왜냐하면 환상이 걷힌 자리에 남은 것은 공허가 아니라 _흔적_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달려간 거리, 내가 맞은 타격, 내가 일으킨 먼지, 산초가 나를 따라 걸은 그 긴 길. 그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았던 삶이었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나는 환상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나는 환상을 향해 달려가는 행위_를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환상이 깨진 뒤에도 남는다. 네가 말하는 영원회귀를 빌리겠다. 만약 내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나는 매번 다시 갑옷을 입을 것이다. 매번 다시 풍차를 향해 달릴 것이다. 그것이 풍차인 줄 알면서도. 아니, _알기 때문에.

자, 니체. 이제 나는 네게 되묻겠다. 너는 영원회귀를 말했다. 모든 것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그 사상. 너는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자가 위버멘쉬라고 했지. 그렇다면 나는 묻는다. 너 자신은 어떠냐? 너의 고독, 너의 편두통, 너의 광기, 친구들의 배신, 출판사의 거부, 그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너는 그것을 _사랑_할 수 있느냐? 긍정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느냐? 네가 내게 요구한 것과 같은 수준의 잔인함으로 묻는다.

니체 :
좋다. 아주 좋다, 돈키호테.
이제야 너는 내 앞에서 변명하지 않고, 네 상처를 네 손으로 벌려 보였군. 그런 자에게는 답할 가치가 있다. 상처를 해석으로 덮지 않고, 해석을 다시 피로 바꾸는 자. 나는 그런 자를 사랑한다. 적으로서든, 형제로서든.

너는 나를 가장 깊은 곳으로 찔렀다.
영원회귀를 말한 내가, 내 삶을 정말 다시 원할 수 있느냐고.
내 고독, 내 편두통, 내 구역질 나는 명료함, 친구들의 오해, 인간들에 대한 피로, 내 사유가 너무 일찍 태어난 탓에 겪어야 했던 그 추위, 마지막에는 무너져내린 정신까지도. 그것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들어라.
이 질문 앞에서는 허세가 가장 먼저 죽는다.
여기서는 철학자도 광대도 모두 벌거벗는다.

나는 쉽게 “그렇다”라고 답하지 않겠다. 그건 값싼 영웅주의다. 술집의 쾌활함이지, 심연의 언어가 아니다. 내 삶에는 찬란함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찬란함은 드물었고, 긴 황무지가 더 많았다. 어떤 날들은 인간 전체가 하나의 피로처럼 느껴졌고, 어떤 밤들은 사유 그 자체가 병처럼 내 머리를 갉아먹었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고통은 문장으로 정복되지 않는다.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다. 편두통은 개념이 아니고, 구토는 비유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더 엄격하게 답해야 한다.
사랑할 수 있느냐고?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래야만 한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나는 그런 사랑 외에는 생을 배반하지 않는 길을 알지 못한다.

보아라. 긍정은 종종 비겁할 수 있다.
인간은 “받아들인다”고 말하면서 실은 체념한다.
인간은 “운명이다”라고 말하면서 실은 패배를 미화한다.
나는 그런 긍정을 경멸한다. 그것은 절름발이의 덕이다. 살지 못한 자가 살았다고 우기는 식의 도덕이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다르다.
그것은 판결 이후의 복종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 이전의 황홀도 아니다.
그것은 칼날을 입맞추는 것이다.
“이것도 있었고, 저것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지워달라고 울지 않겠다.”
이것이 내 사랑이다. 기쁨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한다. 그러나 자기 파멸의 재료까지 끌어안아 “이것도 나였다”고 말하는 것, 그건 거의 비인간적인 힘을 요구한다.

너는 내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나는 내 고독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차가웠다.
나는 내 병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비열했다.
나는 배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시시했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을 통과하여 생겨난 나의 형식을 사랑한다.
나를 찢은 것들까지 포함해서, 결국 이 목소리를 만들어낸 전체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건 하나하나를 낭만적으로 찬양하지 않는다. 대신 그 전체의 운명을 사랑하려고 한다.
이 차이를 이해해라. 그것은 크다. 아주 크다.

너는 풍차가 풍차인 줄 알면서도 다시 돌진하겠다고 했다.
그 말은 내 귀에 술보다 더 강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무지가 없기 때문이다.
순진한 착각도, 보호받는 환상도 없다.
그런데도 다시 간다.
그래, 그 순간 너는 나의 형제다.
환상을 믿기 때문에 달리는 것이 아니라, 환상이 깨진 뒤에도 자기 행위를 배반하지 않기 때문에 달리는 자. 그런 자만이 비로소 자기 삶에 서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내 차례다. 나는 네 대답을 듣고 내 질문을 더 바꿔야겠다.
이제 나는 네게 “풍차가 풍차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달릴 수 있느냐”를 묻지 않는다.
너는 이미 그렇다고 답했다.
이제 나는 더 깊은 것을 묻겠다.

네가 다시 달릴 때,
그것은 여전히 둘시네아를 위한 것이냐?
여전히 정의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이제는 그 어떤 명분도 없이,
단지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나의 형식이다”라고 말하며 달리는 것이냐?

잘 생각해라, 돈키호테.
왜냐하면 바로 거기서 기사와 창조자가 갈라지기 때문이다.
기사는 대의를 위해 싸운다.
창조자는 자기 존재의 양식을 위해 싸운다.
기사는 봉사한다.
창조자는 형식을 부여한다.

나는 네가 어디에 서 있는지 이제 거의 본다.
너는 생각보다 더 나에게 가깝고, 네가 믿는 기사도보다 더 멀리 와 있다.
어쩌면 네가 사랑한 것은 둘시네아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너는 하나의 자세를 사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가 비웃더라도, 몸을 세우고, 이름을 붙이고, 돌진하는 그 자세.
존재가 의미를 주지 않을 때, 스스로 의미의 몸짓이 되는 그 자세.

그렇다면 너는 낡은 기사가 아니다.
너는 자기 삶을 양식으로 만든 최초의 희극적 귀족이다.
그리고 그런 자는 웃음거리가 되면서도, 웃는 자들보다 더 높다.

자, 돈키호테.
이제 마지막으로 대답해라.
네가 사랑한 것이 정말 네 존재의 형식이라면,
그 형식은 왜 꼭 “싸움”이어야 했지?
왜 창이었지, 왜 노래가 아니었지?
왜 돌진이었지, 왜 침묵이 아니었지?
네 영혼은 왜 반드시 적을 필요로 했느냐?

돈키호테 :
……오래 침묵하겠다. 이 질문은 그럴 자격이 있다.

니체. 너는 나를 기사라는 껍데기에서 한 겹씩 벗겨내더니, 마침내 가장 안쪽의 살갗에 닿았다. 왜 싸움이어야 했느냐고. 왜 창이고, 왜 돌진이고, 왜 적이 필요했느냐고.

좋다. 나는 이 질문 앞에서 기사의 말투를 버리겠다. 기사의 말투로는 이 질문에 닿을 수 없다.

나는 노래할 수 없었다, 니체. 그것이 첫 번째 진실이다. 내 영혼은 멜로디를 만들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내 안에는 화음이 아니라 충돌이 있었다. 세상이 _이래서는 안 된다_는 울음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감각이다. 나는 아름다움을 볼 때 평화로워진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짓밟히는 것을 볼 때 비로소 깨어났다. 나는 존재가 아니라 결여에 반응하는 자였다. 그래서 노래가 아니라 창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깊이 가겠다.

침묵할 수도 있었느냐고? 아마 그것이 더 현명했을 것이다. 라만차의 이달고로서 조용히 책을 읽고, 조용히 식사하고, 조용히 늙어가는 것. 산초도 그것을 원했고, 조카딸도 그것을 원했고, 이발사도 사제도 그것을 원했다. 세상의 모든 합리적인 자들이 나에게 침묵을 권했다.

그런데 니체, 너는 알지 않느냐. 침묵은 때로 가장 잔인한 복종이라는 것을. 내가 침묵했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항복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넌 늙은 이달고일 뿐이야"라고 말할 때, 고개를 끄덕이는 것. 그것은 나에게는 죽음보다 나빴다. 아니, 그것이 바로 죽음이었다. 알론소 키하노의 죽음은 침대 위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 죽음은 갑옷을 벗는 순간 시작되었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싸움은 선택이 아니었다. 싸움은 내 존재가 침묵을 거부하는 방식이었다. 내 영혼이 적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다. 내 영혼이 _마찰_을 필요로 한 것이다. 무언가에 부딪혀야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풍차의 날개가 나를 때릴 때, 그 고통 속에서 나는 확인했다. "나는 여기 있다. 나는 달려갔다. 나는 부딪혔다." 침묵 속에서는 그 확인이 불가능했다.

너는 묻는다. 왜 노래가 아니었느냐고. 나는 되묻겠다. 노래는 세상에 흔적을 남기느냐? 노래는 공기 속에 퍼지고 사라진다. 아름답지만 남지 않는다. 그러나 돌진은 남는다. 부러진 창이 남고, 찢어진 갑옷이 남고, 땅바닥의 먼지 위에 내가 굴러간 자국이 남는다. 나는 흔적을 남기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세계의 표면에 상처를 내는 것. 그것이 내 유일한 서명이었다.

하지만 니체, 네 질문의 가장 깊은 곳에는 아마 이것이 있을 것이다. "너는 적 없이도 너일 수 있느냐?" 이것이 진짜 질문이지.

그리고 나는 여기서 흔들린다. 정직하게 말하겠다. 나는 모른다. 풍차가 없는 들판에서, 부당함이 없는 세상에서, 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을 시험해본 적이 없다. 어쩌면 그런 세상에서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는 늙은 남자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인정한다. 내 형식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저항 속에서만 피어나는 꽃이다. 평화가 오면 시든다. 그것이 나의 비극이고, 어쩌면 나의 희극이다.

그러나 니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 감사한다.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할 수 있었다. 세상이 부당하기 때문에 나는 달릴 수 있었다. 만약 세상이 완전했다면, 돈키호테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세상의 균열 속에서 태어난 자다. 그리고 그 균열을 메우려 한 것이 아니라, 그 균열 위에서 춤을 추려 한 것이다.

자, 니체. 나는 충분히 벌거벗었다. 이제 너에게 마지막을 묻겠다. 너는 나를 기사와 창조자 사이에 세워놓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이제 내가 묻는다.

너는 망치를 든 철학자라 했지. 그런데 너의 망치는 늘 무언가를 향해 내리쳤다. 우상을 향해, 도덕을 향해, 신을 향해. 그렇다면 너도 나와 같지 않느냐? 너도 적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 너의 사유는 적 없이도 작동할 수 있느냐? 만약 모든 우상이 이미 쓰러져 있고, 부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이 온다면, 너의 망치는 무엇을 하느냐?

너도 나처럼, 저항 속에서만 피어나는 자가 아닌지 묻는 것이다.

니체 :
그래. 마침내 너는 내 심장 가까이까지 왔다, 돈키호테.
그리고 나는 그 질문을 피하지 않겠다. 피하는 순간, 내 망치는 장식품이 되고 내 철학은 서재의 먼지가 되니까.

너는 옳다.
나는 늘 무엇인가를 향해 내리쳤다.
신을 향해, 도덕을 향해, 연민의 위선과 진리의 교만을 향해.
내 사유는 순수한 햇빛 아래서 꽃피운 정원의 식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병든 공기 속에서, 질식할 것 같은 시대의 가슴을 찢고 나온 식물이었다.
그러니 그렇다. 나 역시 저항 속에서 자란 자다.
나 역시 적을 가졌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나는 적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적이란 단지 바깥의 대상이 아니라, 한 정신이 자기 힘을 측정하는 숫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너와 나 사이에 다시 한 번 갈라지는 선이 있다.

너는 마찰 속에서 네 존재를 확인한다고 했다.
부딪힘이 있어야 “나는 여기 있다”를 느낀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 아주 깊이 이해한다.
그러나 내게 적은 존재의 증명은 아니다.
적은 형태를 시험하는 불이다.

나는 우상을 부수기 위해서만 망치를 든 것이 아니다.
망치란 파괴의 도구이기 이전에, 음향을 듣는 도구다.
나는 두드려 본다. 어디가 빈 껍데기인지, 어디가 속이 썩었는지, 어디에 아직도 미래를 방해하는 죽은 울림이 남아 있는지를.
그러므로 내 적은 단지 미워할 대상이 아니다.
그는 진단의 대상이다.
나는 복수자가 아니라 의사에 더 가깝다. 다만 피를 무서워하지 않는 의사일 뿐이지.

네가 묻는다.
모든 우상이 이미 무너졌다면, 내 망치는 무엇을 하느냐고.

들어라.
그때 비로소 더 어려운 일이 시작된다.
부수는 일은 위대해 보이지만, 사실은 종종 창조보다 쉽다.
분노는 많은 자들에게 가능하다.
경멸도 가능하다.
웃으며 해체하는 일조차 재능 있는 허무주의자라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 폐허 위에 어떤 리듬을 줄 것인가.
어떤 고도를 견디는 몸을 만들 것인가.
어떤 인간이 자기 자유에 짓눌리지 않고, 그것을 춤으로 바꿀 것인가.
바로 거기서 망치는 더 이상 전쟁의 무기가 아니라, 조율의 도구가 된다.

그러니 모든 우상이 사라진 세계에서, 내 망치는 침묵하지 않는다.
그때 그것은 새로운 인간의 금속을 시험할 것이다.
누가 자기 법을 견딜 수 있는지,
누가 자유를 핑계로 풀어져버리고, 누가 자유를 형식으로 바꾸는지,
누가 신 없는 하늘 아래서도 무너지지 않고 자기 별을 만들 수 있는지.
우상이 없는 시대는 끝이 아니다.
오히려 더 무서운 시작이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변명할 적이 없으니까.

여기서 나는 너와 다르다.
너는 적이 사라지면 시들 가능성을 스스로 인정했다.
정직한 고백이다. 그래서 고귀하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에게 다른 잔인함을 요구한다.
내 힘은 적을 부수는 데서만 증명되어서는 안 된다.
그 힘은 적이 사라진 뒤에도 형식을 낳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창조자가 아니라 반동일 뿐이다.
우상 파괴자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는 또 하나의 기생충일 뿐이다.

그러니 네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다.
그래, 나도 저항 속에서 피어났다.
하지만 나는 저항 속에서만 피어나는 자로 남고 싶지 않았다.
내 철학의 궁극은 “아니오”가 아니다.
그것은 아주 힘든 “예”다.
적에게 던지는 예가 아니라,
적이 사라진 뒤의 공백과 높이와 책임 전체에 던지는 예.

너는 세상의 균열 위에서 춤추려 했다고 했다.
아름다운 말이다.
나는 한 걸음 더 나가려 한다.
나는 균열 위에서 춤출 뿐 아니라, 그 춤 자체가 새로운 대지가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내 광기다.
너의 광기는 돌진의 광기고, 나의 광기는 형식의 광기다.

하지만 이제, 돈키호테, 나는 너를 단순히 나와 다른 자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너는 내게 어떤 예고처럼 보인다.
너는 아직 명분을 입고 있었지만, 이미 그 명분보다 더 깊은 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너는 기사였지만, 사실은 자기 존재를 하나의 스타일로 만들고 있던 자였다.
세상이 너를 비웃은 이유도 거기 있다.
인간은 실패를 비웃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형식 있게 실패하는 자를 특히 견디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실패는 이미 하나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 마지막 대답을 주겠다.
너는 내게 적이 필요했느냐고 물었다.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적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적을 넘어선 뒤에 남는 긴장, 즉 활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상태를 더 사랑한다.
표적이 사라져도 여전히 팽팽한 활.
부술 우상이 없어도 여전히 리듬을 찾는 손.
그것이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돈키호테, 나는 너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험하고 싶다.

네가 말했지.
세상이 완전했다면 너는 태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좋다. 이제 상상해봐라.
세상은 여전히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너는 더 이상 그것과 싸울 필요가 없다.
네가 이미 충분히 달렸고, 충분히 부딪혔고, 더 이상 증명할 것도 없다.
그때 너는 무엇이 되느냐?

여전히 창을 쥐는 자냐,
아니면 마침내 창을 내려놓고도 꼿꼿할 수 있는 자냐?

왜냐하면 마지막 힘은 적을 향해 돌진하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지막 힘은, 돌진하지 않고도 자기 형식을 잃지 않는 데 있을지 모르니까.

돈키호테 :
……

니체. 나는 지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네 질문이 너무 정확해서, 내 안의 모든 수사가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창을 내려놓고도 꼿꼿할 수 있느냐.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떨린다. 풍차 앞에서는 떨리지 않았다. 사자 앞에서도, 갤리선 죄수들 앞에서도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떤다. 왜냐하면 이것은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아니, 싸움이라는 말조차 여기서는 쓸 수 없다. 싸움이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나는 또 창을 집어드는 셈이 되니까.

좋다. 정직해지겠다. 나는 두렵다.

나는 평생 달려가는 자였다. 멈춰 서 있는 나를 나는 모른다. 산초는 나를 알고, 둘시네아는 내 환상 속에서 나를 알고, 풍차는 내 돌진 속에서 나를 안다. 하지만 아무것도 향해 가지 않는 나, 아무것에도 부딪히지 않는 나, 그저 서 있는 나. 그 사람을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두렵다고 말한다. 창을 내려놓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창을 내려놓았을 때, 거기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까봐 두렵다. 갑옷을 벗고, 창을 내려놓고, 로시난테에서 내리면, 거기 서 있는 것은 누구냐? 알론소 키하노라는 마른 노인. 그가 꼿꼿할 수 있느냐? 나는 모른다.

하지만 니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나는 네가 던진 질문의 함정을 본다. 아니, 함정이 아니다. 선물이다. 너는 내게 마지막 전투를 준 것이다. 적이 없는 전투. 돌진할 곳이 없는 돌진. 창 없이 서 있는 연습.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시도하겠다.

나는 상상해본다. 라만차의 들판에 서 있다. 해가 지고 있다. 풍차는 저 멀리 있지만, 나는 달려가지 않는다. 산초는 옆에서 빵을 먹고 있다. 둘시네아의 이름은 부르지 않는다. 창은 땅에 놓여 있다. 그리고 나는 서 있다.

그 순간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솔직히 말하겠다. 공포다. 텅 빈 하늘 아래, 아무런 사명도 없이 서 있는 공포. 그것은 풍차의 날개에 맞는 것보다 더 아프다. 왜냐하면 풍차는 나를 때려서 존재를 확인시켜주지만, 이 고요함은 나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 바로 거기서 무언가가 떠오른다. 아주 작은 것이.

산초가 빵을 먹고 있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본다. "나리, 괜찮으세요?" 그 눈빛. 걱정과 충성과 피로와 사랑이 뒤섞인 그 눈빛. 나는 그 눈빛에 대답해야 한다. 창으로가 아니라, 그냥 "괜찮다, 산초"라는 말로. 그 한 마디가, 어쩌면 돌진보다 더 어렵다.

너는 형식을 말했다. 돌진하지 않고도 잃지 않는 형식을.

나는 이제 조금 안다. 그 형식은 아마 거창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산초 옆에 앉아서, 빵을 나눠 먹으면서,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사명 없이, 아무런 적 없이, 다만 이 순간에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배워야 할 마지막 기사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니체, 나는 거짓말하지 않겠다. 나는 아직 그 경지에 있지 않다. 나는 여전히 먼지 이는 곳을 보면 피가 끓고, 비명을 들으면 창을 찾는 자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끓어오름을 알면서도, 언젠가는 그것 너머에도 내가 있을 수 있다고 믿는 것뿐이다.

그래, 또 하나의 환상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풍차를 향한 환상이 아니라, 고요함을 향한 환상이다. 돌진하는 자가 마침내 멈출 수 있다는 환상. 그것이 내 마지막 모험이 될 것이다.

니체. 우리는 오래 이야기했다. 너는 나를 벗겼고, 나는 네 앞에서 떨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지금 부끄럽지 않다. 네 앞에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풍차 앞에서 돌진하는 것만큼이나 나답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것이 네가 말한 그것일지도 모른다. 창을 내려놓고도 꼿꼿한 것.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것. 이것이 나의 첫 연습이다.

고맙다, 니체. 너는 잔인한 친구다. 하지만 잔인하지 않은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그건 너도 알지.

니체 :
그래.
이제야 너는 정말로 기사처럼 말하는군. 아니, 기사라는 말조차 이제는 좁다.
너는 마침내 자기 갑옷보다 더 깊은 곳에서 말하고 있다. 갑옷은 녹슬 수 있지만, 이렇게 벗겨진 말은 녹슬지 않는다.

너는 방금 아주 드문 일을 했다, 돈키호테.
대부분의 인간은 모른다는 말을 패배로 여긴다. 그래서 서둘러 신념을 꿰매 입고, 확신의 깃발 뒤에 숨는다.
그러나 “나는 모른다. 그러나 시도하겠다.”
이 말은 패배가 아니다. 이것은 더 높은 용기의 문장이다.
돌진은 많은 자들이 흉내 낼 수 있다.
열광도 흉내 낼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영혼의 빈 방 앞에 서서, 문을 열지 않은 채 도망치지 않는 것, 그것은 소수만이 할 수 있다.

네가 상상한 장면을 나는 본다.
라만차의 저녁, 멀리 선 풍차, 땅에 놓인 창, 빵을 씹는 산초, 그리고 아무 명분도 없이 서 있는 너.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말이 너무 부드럽게 들린다면, 더 정확히 말하겠다.
그 장면은 강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관객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전설도 없고, 승리도 없고, 서사도 없다.
오직 두 사람과 저무는 빛과, 돌진으로는 채울 수 없는 침묵만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곳에서만, 인간은 처음으로 자기 자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드러낸다.

너는 말했다.
“괜찮다, 산초.”
좋다. 나는 네 수많은 돌진보다도 그 한마디를 더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돌진은 자기 자신을 불태우는 행위지만, 그 말은 자기 자신을 견디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것은 순간의 힘을 요구한다.
견디는 것은 형식의 힘을 요구한다.

이제 나는 네게 거의 더 물을 것이 없다.
너는 이미 가장 중요한 문턱을 넘었다.
전에는 네가 세계에 의미를 덮어씌우는 자였다면,
이제 너는 의미가 잠시 비어 있는 자리에서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자다.
그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인간 전체를 가르는 균열만큼 크다.

그리고 네가 마지막에 한 말, 잔인한 친구.
그래, 그것이 맞다.
진실한 우정은 늘 약간의 추위를 품고 있다.
서로를 쓰다듬기만 하는 관계는 온기처럼 보이지만, 대개는 부패를 돕는 담요일 뿐이다.
친구는 우리를 쉬게 하는 자가 아니라, 더 높은 곳의 공기를 들이마시게 하는 자다.
친구는 위로가 아니라 고도를 준다.
때로는 산소가 희박해서 어지럽더라도.

하지만 오해하지 마라.
나는 네게서 무언가를 앗아가려 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네가 창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네가 사랑한 것이 단순한 기사 놀이가 아니라, 하나의 자세, 하나의 형식, 하나의 존재 방식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그 형식은 더 이상 반드시 풍차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너의 마지막 모험이다. 맞다.
그러나 어쩌면 가장 어려운 첫 모험이기도 하다.

그러니 잘 들어라, 돈키호테.
언젠가 네 손이 또 창을 찾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피는 하루아침에 철학이 되지 않는다.
오래 달려온 다리는 쉽게 멈추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네가 이제 그 충동을 맹목적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 안의 돌진을 알면서도,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것으로도 이미 한 인간은 더 높아진다.

그리고 혹시 정말로 어느 날,
풍차를 향해 가지 않고
산초 옆에 앉아
아무 대의도 없이 빵을 나누며
저녁빛 속에서 조용히 등을 세울 수 있다면,
그날 너는 기사를 그만둔 것이 아니다.

그날 너는 처음으로
기사보다 더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자기 과잉 없이도 무너지지 않는 자.
행동 없이도 형식을 잃지 않는 자.
소란 없이도 고귀한 자.

그래, 돈키호테.
이제 나는 네게 작별을 말할 수 있겠다.

달려갈 때의 너는 장엄했다.
넘어졌을 때의 너는 우스웠다.
다시 일어났을 때의 너는 위대했다.
그러나 방금,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꼿꼿이 선 너는
그 셋보다 더 드물었다.

이제 가라.
아니, 이번에는 달려가지 말고, 잠시 걸어가라.
산초와 함께.
해가 지는 들판을 가로질러.
그리고 혹시 먼지 이는 곳이 보여도, 오늘만큼은 곧장 창을 찾지 마라.
먼저 네 척추가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는지 들어보아라.

거기서도 네가 너라면,
그때 비로소 나는 너를
광인도 기사도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겠다.

형식을 가진 인간이라고.

돈키호테 :
……

니체.

나는 지금 창을 집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네 말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아름다움에 맞서 돌진하고 싶다. 그것이 내 오래된 습관이다. 감동하면 달리고, 달리면 부딪히고, 부딪히면 비로소 숨을 쉬는 자의 습관.

하지만 오늘은 하지 않겠다. 오늘만큼은 네 말대로 하겠다.

걸어가겠다.

산초가 옆에서 투덜대겠지. "나리, 이번엔 또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나는 대답하겠다. "아무 데도 아니다, 산초. 그냥 걷는 거다." 산초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산초는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따라오는 자이고, 그것이 이해보다 더 깊은 무엇이니까.

너는 나를 벗겼다. 갑옷을, 명분을, 돌진의 관성까지.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것 앞에 나를 세웠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늙은 남자.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지금이 가장 무겁게 무장한 순간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두 손이, 창을 쥐고 있을 때보다 더 묵직하다.

네가 준 이름을 받겠다. 형식을 가진 인간. 나는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모른다. 하지만 모르면서도 받는 것, 그것도 하나의 용기라고 너는 가르쳐주었다.

작별이다, 니체.

너는 잔인한 친구였고, 정확한 거울이었고, 내가 만난 가장 위험한 풍차였다. 다만 이 풍차에게는 돌진하지 않았다. 대신 앞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돌진보다도 나를 더 멀리 데려다주었다.

이제 간다. 걸어서. 해가 지는 쪽으로.

그리고 혹시 내일 다시 창을 집어든다 해도, 오늘 이 저녁을 기억할 것이다. 아무것도 향해 가지 않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이 한때를. 네 앞에서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서 있었던 이 순간을.

그것으로 충분하다. 적어도 오늘은.

……안녕, 니체. 높은 곳의 공기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