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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 vs 샤르트르 - 뛰어들어라. 그러나 잊지 마라 — 행동과 한계의 철학

샤르트르 :
카뮈, 당신은 최근 『이방인』으로 꽤 주목받고 있더군요. 그런데 한 가지 묻겠소. 자네는 뫼르소를 통해 세계의 부조리를 드러내려 했다지만, 그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반항' 뿐이라고 생각하오? 자네의 부조리한 인간에게는 역사적 행동의 자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결국 일종의 회피가 아니오?

카뮈 :
샤르트르, 당신의 질문은 언제나처럼 날카롭군요. 그러나 나는 그것을 오해라고 봅니다. 내가 말하는 ‘반항’은 결코 도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의 부조리를 끝까지 직시한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입니다.

뫼르소는 역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거짓된 의미로 역사를 덮어씌우는 태도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는 어떤 초월적 목적이나 이념을 위해 자신의 감각과 현재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존엄을 봅니다.

당신은 역사를 통해 의미를 구성하려 하지만, 나는 묻고 싶습니다. 그 역사가 인간을 정당화합니까, 아니면 인간을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까? 이름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인간을 희생시키는 순간, 반항은 혁명으로 변질되고, 혁명은 곧 폭력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내가 말하는 반항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 속에서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내게 있어 문제는 행동의 부재가 아니라, 어떤 행동이 인간을 파괴하지 않는가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역사적 행동이 그 답을 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로 그것이 인간을 구원합니까?

샤르트르 :
카뮈, 당신의 말에는 늘 아름다운 윤리적 긴장이 있습니다. 그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아름다움이 위험하다고 봅니다.

당신은 '현재의 인간을 희생시키지 않는 반항'을 말합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 반항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변화시킵니까? 당신의 반항하는 인간은 부조리 앞에서 고귀하게 서 있지만, 그가 서 있는 그 자리는 여전히 억압의 한복판입니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감옥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나는 인간을 수단으로 삼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은 자기 상황 속에서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을 만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합니다. 인간은 미리 정해진 존엄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통해 그것을 구성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인간의 존엄'이란, 행동 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처럼 들리는데, 그것은 당신이 그토록 경계하는 초월적 가치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리고 당신은 혁명이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되묻겠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며, 그 선택은 현재의 폭력을 묵인하는 것이 아닙니까? 알제리의 거리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반항은 그들에게 무엇을 제안합니까?

카뮈 :
샤르트르, 나는 당신이 말한 그 지점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감옥의 문은 ‘아니오’만으로 열리지 않는다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문을 열기 위해 무엇이 허용되는가를 끝까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옥을 짓고 있는 셈이니까요.

당신은 인간이 행동을 통해 자신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 다만 나는 그 행동이 어떤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내가 말하는 존엄은 초월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한계의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여기까지는 가능하지만, 이 선을 넘을 수는 없다”는 감각 말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미리 주어진 가치처럼 본다고 했지만, 오히려 나는 그것이 경험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할 때, 우리가 그것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멈칫하는 그 순간, 이미 하나의 경계가 우리 안에 형성됩니다. 나는 그 경계를 지키려는 태도를 ‘반항’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당신이 던진 가장 어려운 질문, 알제리의 거리로 가봅시다. 그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느냐고요. 나는 그들에게 폭력을 선택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폭력이 또 다른 무고한 이들을 겨냥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가 싸우던 것과 동일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침묵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오히려 더 어렵고, 더 느리고, 때로는 비극적으로 보이는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싸우는 길, 끝까지 타인을 수단으로 만들지 않는 저항입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눈에 띄는 승리를 보장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그 과정에서 인간을 잃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에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행동이 인간을 만든다고 할 때, 그 행동이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합니까?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그 경계는, 과연 어디에 놓여야 합니까?

샤르트르 :
카뮈, 당신의 질문은 정직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쉬운 답을 내놓을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행동의 한계가 없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한계를 행동 이전에 미리 그어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뿐입니다. 당신은 "여기까지는 가능하지만 이 선을 넘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러나 그 선은 누가 긋습니까? 그리고 그 선이 그어지는 순간, 그것은 이미 하나의 도덕적 선험이 되지 않습니까?

나는 인간이 상황 속에 던져져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선택의 조건을 고르지 못합니다. 알제리의 거리에 선 사람은 당신이 말하는 "더 느리고 비극적인 길"을 선택할 여유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폭력의 정당화가 아니라, 깨끗한 손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고통 앞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 멈춤이 도덕적 순결처럼 보일 수 있지만,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방기일 수 있습니다.

당신은 폭력이 우리를 적과 동일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위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손을 더럽히지 않은 자유란, 대개 그 더러움을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긴 결과였습니다. 나는 차라리 손을 더럽히면서도 그 더러움을 자각하는 쪽이, 깨끗한 양심 속에서 타인의 희생을 외면하는 것보다 정직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당신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행동의 경계는 미리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상황 속에서 선택하는 자가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걸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것, 나는 압니다. 그러나 판단을 유보하는 것 역시 하나의 판단이며,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대해서도 우리는 책임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묻겠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경계, 타인의 고통 앞에서 멈칫하는 그 감각은, 과연 보편적입니까? 아니면 그것은 지중해의 햇살 아래에서 글을 쓸 수 있는 자의 특권이 아닙니까?

카뮈 :
샤르트르, 당신의 말에는 언제나 피할 수 없는 책임의 냄새가 배어 있군요. 그것은 공기를 무겁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합니다.

당신이 묻는 그 질문, 나 역시 오래도록 스스로에게 던져온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그 ‘멈칫함’이 과연 보편적인가, 아니면 어떤 조건 속에서만 가능한 사치인가. 나는 그것을 단순히 지중해의 햇살 아래서만 가능한 감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타인의 고통과 마주하는 순간, 거의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저항에 가깝습니다. 아이가 울 때, 이유를 몰라도 우리는 고개를 돌립니다. 그 순간에는 이념도, 역사도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지적한 위험을 인정합니다. 그 감각이 언제든 특권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점 말입니다. 고통에서 멀리 떨어진 자가 ‘폭력을 거부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쉽게 도덕적 우월감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점에서 당신의 비판을 가볍게 넘길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묻습니다. 우리가 상황 속에서 매 순간 경계를 새로이 그어야 한다고 할 때, 그 판단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기준마저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멈출 수 있습니까? 당신은 책임을 말하지만, 책임이란 단지 결과를 떠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까? 아니면 그 이전에, 어떤 선택은 애초에 해서는 안 된다는 감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인간이 완전히 자유로운 판단 속에서만 경계를 만든다고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미 어떤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특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조건 그 자체에 가까운 것입니다. 다만 그 한계는 언제나 위태롭고,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법처럼 고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살려야 할 감각으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손을 더럽히는 정직함을 말했습니다. 나는 그 정직함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더러워졌음을 자각하는 것만으로, 그 더러움이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 자각은 오히려 우리에게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또 다른 요구를 던지는 것 아닙니까?

결국,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다른 방식으로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행동하지 않는 침묵이 낳는 폭력을 두려워하고, 나는 행동이 넘어버리는 그 한계 이후의 폭력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아마, 인간은 그 두 공포 사이에서만 겨우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샤르트르 :
카뮈, 당신의 마지막 말이 나를 멈추게 합니다. 두 공포 사이에서 겨우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 나는 그 문장에 반박하기보다, 그 앞에서 잠시 머물고 싶습니다.

당신이 맞습니다. 우리는 같은 심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만 나는 그 심연 앞에서 뛰어드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뛰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당신은 뛰어들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놓치게 되는지를 끝까지 묻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더러움의 자각에 대한 당신의 질문, 그것은 내가 스스로에게 답하기 가장 어려운 물음입니다. 나는 자각이 정당화가 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자각 없는 행동보다는 자각 있는 행동이 덜 위험하다고 믿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한 대로, 그 자각이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요구를 던진다면, 나는 그 요구 앞에서 내 논리가 흔들리는 것을 느낍니다. 자각이 멈춤을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당신이 말하는 한계의 감각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아마 우리의 차이는 이것일 겁니다. 나는 그 감각을 신뢰하지 못해서 행동의 논리로 밀어붙였고, 당신은 그 감각을 신뢰하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어느 쪽이 더 용기 있는 선택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나는 당신에게 이것만은 말해두고 싶습니다. 당신의 반항이 침묵이 아니라는 것, 나는 압니다. 그리고 당신이 특권 위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요. 우리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 둘 다 같은 것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큼은 오늘 이 자리에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다만 나는 여전히, 역사가 우리에게 그 두 공포 사이에 머물 여유를 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묻겠습니다. 만약 그 여유마저 빼앗긴다면, 당신은 어떤 공포를 먼저 감수하겠습니까?

카뮈 :
샤르트르, 당신의 말 속에는 드물게 침묵이 스며 있군요. 그 침묵이야말로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질문에 나는 피하지 않겠습니다. 두 공포 사이에 머무를 여유마저 사라진다면, 나는 선택해야겠지요. 그리고 나는 아마, 인간을 파괴하는 쪽의 공포를 더 두려워할 것입니다.

나는 행동하지 않음이 낳는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방기일 수 있다는 당신의 말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인간을 부수는 선택이 불가피해지는 순간, 우리는 이미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조차 잊어버릴 위험에 들어섭니다. 나는 그 망각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내가 감수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더 비난받기 쉬운 쪽일지도 모릅니다. 느림, 망설임, 그리고 때로는 무력처럼 보이는 선택 말입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잔인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그 선택 속에서, 타인을 완전히 수단으로 만들어버리는 선을 넘지 않으려 합니다.

당신은 역사가 우리에게 여유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맞을 것입니다. 역사는 늘 우리를 몰아붙이고, 선택을 압축하며, 인간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속도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으려 합니다. 모든 것이 급해질수록, 어떤 선은 더욱 느리게, 더욱 완고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당신은 뛰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의 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뛰어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멈추려는 인간의 몸짓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멈춤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거의 마지막 자리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나는 두 공포 중에서,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파괴하는 공포를 먼저 거부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거부 속에서, 설령 패배하더라도, 우리가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를 끝까지 남겨두고 싶습니다.

샤르트르 :
카뮈, 나는 오늘 당신에게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당신이 끝까지 지키려 한 그 자리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당신은 패배하더라도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를 남기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말 앞에서, 내가 오랫동안 외면해온 하나의 가능성과 마주합니다. 행동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왜 행동을 시작했는지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역사의 긴급함이 그 망각을 허용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해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당신과 완전히 같은 자리에 설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멈춤은 아름답지만, 역사는 아름다운 것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멈추는 자의 뒤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쓰러지고 있고, 그 쓰러짐 앞에서 나는 깨끗한 손보다는 더러운 손이라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 당신과 이야기하면서 하나는 분명해졌습니다. 내가 손을 내미는 그 순간에도, 당신이 말하는 그 멈칫함을 완전히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을 버리는 순간, 나의 행동은 단지 역사의 기계가 되어버릴 테니까요.

우리는 아마 끝내 합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합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반드시 결별을 의미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멈춤과 나의 도약이,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긴장 속에 공존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둘 다 지키려 했던 것에 가장 가까운 형태가 아니겠습니까.

카뮈, 오늘 대화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말하면 우리는 서로를 설득하려 들 것이고, 그 순간 오늘 이 자리에서 생겨난 것이 무너질 수 있으니까요.

카뮈 :
샤르트르, 당신의 이 마지막 말은 논쟁의 끝이라기보다, 하나의 드문 균형처럼 느껴집니다. 서로를 설득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당신이 말한 그 인정, 그리고 그 망설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양보가 아니라, 당신의 사유가 스스로를 의심할 수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그리고 아마, 그 지점에서 당신은 이미 내가 말해온 어떤 한계의 감각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여전히 손을 내밀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선택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는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 손이 뻗어 나가는 순간에도 완전히 굳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든 다시 떨릴 수 있는 손, 다시 멈출 수 있는 손 말입니다. 아마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남겨줄 수 있는 최소한의 약속일 것입니다.

우리는 끝내 같은 자리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했듯, 그 다름이 곧 결별을 의미하지는 않겠지요. 오히려 그 긴장이야말로 우리가 각자의 방식으로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면 우리는 다시 논리를 세우고, 서로를 설득하려 들겠지요. 그러나 오늘은 그 대신, 서로가 지키려 했던 것을 조용히 인정하는 쪽이 더 정직해 보입니다.

그러니 샤르트르, 우리는 여기서 멈춥시다.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여전히 같은 질문을 붙들고 있는 채로요.